이준석(27)의 등장은 ‘뉴스감’이었다. 벤처 기업을 운영하는 하버드 출신의 20대 기업가에게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의 직함이 주어졌다는 것에 사람들은 놀랐다. 누군가는 그를 두고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꼭두각시라고 비난했고, 다른 누군가는 미래 대통령으로 점찍었다. 그에 대한 평가가 분분한 가운데, 분명한 건 비대위원의 임기를 마쳤다고 해서 그만 볼 인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등장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그런 이준석이 반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남긴 존재감은 뚜렷하다. 그가 개설한 페이스북은 더 이상 친구를 받지 못한다. 페이스북 친구 추가의 최대 인원인 5000명을 초과했기 때문이다. 추석 때 개최한 신당동 떡볶이 정모에는 이백 여명의 사람이 모였다. 비대위원의 임기를 마친 후에도, 사람들이 그를 잊지 않고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직접 만나본 그는 역시나 거리낌 없고 솔직했다. 비대위원 활동에서부터 청년 정치인들에 대한 가감 없는 평가까지, 질문을 하자마자 거침없이 의견을 쏟아냈다. 비대위원 활동을 마치고 대한민국 평범한 20대의 한 명으로 돌아간 그가 차기 정권에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그럼이만’ 100인의 20대 인터뷰, 이준석을 만났다.




Q. 최근 근황이 궁금합니다. 어떻게 지내세요.

회사 일 열심히 하고 있어요.




Q. ‘서울과학고에서 카이스트에 입학한 뒤, 한 달 만에 미국 하버드대에 합격’이라는 화려한 이력을 갖고 계신대요. 초,중,고 시절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별로 없어요. 특히 고등학교 입학 이전의 삶에 대해서는요.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은 어땠나요?
 
그냥 초, 중, 고 열심히 다녔어요. 대한민국 사람 중에 초중고 때 대단한 이력이 있는 사람이 드물잖아요.

 

Q. 대학생활은 어땠어요? 세 가지 단어로 정리해본다면?

컴퓨터 많이 했고, 게임 많이 했고, 편하게 공부했어요. 당시 스타리그가 유행해서 스타 많이 했죠. 지금은 안한지 3-4년 됐네요. 편하게 공부했다는 건, 공부하는 절대량으로 보면 하버드가 힘들지 모르겠지만, 하버드가 한국보다 편한 게 있다면 친구들이랑 술을 먹어야 한다든지 하는 쓸데없는 시간낭비가 적어요. 미국에서는 만 스물한 살 되기 전까진 밖에서 술을 못 마시고, 또 열시만 되면 상점이 문을 다 닫아요. 그래서 우리나라처럼 밤새 술 먹고 다음날을 통째로 날리는 그런 일이 없죠.


 

Q. 이준석하면 엄친아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또래의 친구들이 하기 힘든 여러 일들을 하셨는데요, 인생에서 좌절을 겪어본 적이 있나요?


굉장히 많죠. 그런 건 상대적인 거니까요. 고등학교 입학했을 때 물리학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가 평생 물리학을 공부해서 (물리학 분야에서) 전 세계 1%가 돼도, 쟤는 이길 수 없겠다 하는 애들이 (과학고에) 있었어요. 제 위에 또 누가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한 이상 그 욕구가 상실되는 거죠. 하버드에서 성적이나 활동 면에서 저보다 적극적이었던 애들이 부럽기도 했었고, 정치에서는 같은 나이 대는 아니었지만 부러움을 자아내는 정치인이 있었어요.

 

Q. 배움을 나누는 사람들 (이하 배나사), 클라세 스튜디오 모두 교육 분야의 일입니다. 교육 분야에 집중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2007년 한국에 돌아와서 병역특례 회사를 다녔어요. 병역특례 회사 다니는 애들 보면 고액과외해서 돈 버는 애들 많아요. 그런데 저는 양심에 찔려서 하지 않았죠. 그런데 또 제가 가만히 있을 성격도 아니라서 ‘교육봉사 단체를 해보자’하는 생각에 (배나사를) 하게 된 거예요.

클라세 스튜디오가 만든 문제지 어플리케이션은 교육 분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우리 회사가 하는 일 자체는 전산이에요. 효율화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전산으로 효율화 시키는 게 우리 회사 일이죠. 우리 회사 대표제품에 설문조사·여론조사 어플도 있어요. 딱히 교육용 어플을 만든다기보다는 시장성이 있는 것들을 만드는 거죠.



Q. 준석씨의 책 ‘어린 놈이 정치를’에서 "5년 간의 교수 경력이 있어야 해서 지금은 할 수 없지만 정치를 하게 된다면 교육감을 해 보고 싶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교육감이 되려면 교사 생활이나 교수 생활을 5년 이상 해야 해요. 그런데 교수 5년 한 사람이 50년 전에 초·중등교육 받아본 것 빼고 초·중등교육에 대해 어떤 경험이 있는지 의문이에요. 제도권 초·중등 교사도 어쩔 수 없이 교사 입장을 일정부분 옹호하게 되죠. 미국은 (5년 이상의 활동경력 같은) 제한이 없어요. 교육감 자체가 문호가 열려야 하지 않나, 하고 화두를 던진 거예요. '국방부장관은 군인이 해야 하는가'처럼 교육감도 교육계에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이 해야 하는 건가 하는 거죠. 그런데 어차피 현실적으로 안돼요. 제가 교수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Q. 집안 환경이나 교육 환경에서 환경적인 이점이 있었던 것은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환경적인 혜택이랄 게 없어요. 저는 서울시 최북단인 노원구에 있는 온곡 초등학교를 나왔어요. 온곡 초등학교에서 저보다 잘된 사람 옥동자밖에 없어요(웃음). 거기서 무슨 기득권을 갖고 공부를 했겠어요. 중학교는 목동에 있는 월촌 중학교 다녔는데, 학군이 좋다고 하지만 오히려 힘들면 힘들었지 이득이 된 건 없었어요. 제가 비대위원 됐을 때, ‘대한민국 1% 혜택 받고 태어난 것 아니냐’는 말도 있었는데요, 어느 대한민국 1% 집안이 서울시 노원구에서 13년 동안 살겠어요. 심지어 노원구는 제가 태어나기 5년 전 만해도 서울시도 아니었어요.


 

Q. 페이스북에 맥도날드로 끼니를 해결하는 사진이 올라와 화제가 된 적이 있었죠. 그만큼 매우 바쁘게 생활하고 계신 것 같은데, 취미로 하는 활동이 있나요?

바쁘게 생활한 다기보다는, 맥도날드에 매니아적인 측면이 있어요. 미국에 있을 때 오히려 더 못 먹어서 그런 것 같아요. 미국에서 맥도날드가 저희학교에 하나도 없었거든요. 병역특례 회사가 코엑스 옆에 있었는데 직원들끼리 매일 3000원짜리 빅맥런치 먹으러 다녔어요. 그게 그냥 적응이 돼버린 것 같아요(웃음).

요즘은 취미활동 별로 못하죠. 교육봉사 활동 자체가 취미활동에 근접해요. 배나사가 교육봉사 활동이라고만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굉장히 다양한 활동을 해요. 삼사백 명 애들 데리고 캠프를 가기도 하고요.


"빨간파티 in 서울" 추석 때 개최한 신당동 떡볶이 정모 ⓒ 새누리당 전하진 의원 블로그

"빨간파티 in 서울" 추석 때 개최한 신당동 떡볶이 정모 ⓒ 새누리당 전하진 의원 블로그



여의도 인턴, 당시 만나던 여자친구 집과 가깝다는 이유로 시작해
새누리당 비대위원직, 큰 사고 칠 기회 주어진 것
비대위원 하면서 정치에 대한 막연한 동경 사라져



Q.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뚜렷하게 있나요?

뚜렷하게 (그런 계기가) 있다기보다는요, 큰 사고를 칠 기회가 주어진 거죠. 아무리 정치혐오증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총선에서 비대위원 할래?’ 물어보면 거절하는 사람 없을 거예요. 아무리 삼성에 반감을 갖고 있더라도 ‘삼성전자 임원 할래?’ 제안하면 거절하는 사람 없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Q.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대선캠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총선과 대선은 판이 달라요. 총선은 모든 국회의원들이 자기 지역구에 나가 자기가 당선되기 위해 노력해요. 그 외 중앙의 사람들이 선거를 진두지휘하는 구조죠. 그런데 대선은 당의 모든 사람이 뛰어들어 하나의 선거를 위해 뛰어요. 자리가 좁은 거죠. 제게 제안이 왔던 자리가 열다섯 개예요. 그런데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에 참여했던 것만큼 책임을 갖고 임할 수 있는 역할이 없었어요.




Q. 유승민 의원실에서 2개월간 인턴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유승민 의원실을 택한 이유는 아버지와의 인연도 아니고, 한나라당 의원 중에 마땅한 사람을 찾아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왜 한나라당이었나요? 처음부터 한나라당에 비교적 더 호감이 있으셨나요?

그 당시 한나라당이 145석 정도 하는 거대정당이었다가 120석으로 내려앉았고, 열린 우리당이 육십 몇 석이었다가 150석이 돼버렸어요. 여야세력의 급격한 교체가 이뤄진 거죠. 열린 우리당 의원들은 처음 당에 들어와서 속된 말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어요. 하다못해 국회의원 홈페이지 하나 있는 게 없었죠. 유시민 백바지 사건이나, 티코타고 등원하는 것과 같은 정치 이슈를 만드는데 주력했어요. 그런데 그런 것들에서 인턴이 배울 수 있는 게 거의 없거든요.

새누리당에 ‘여의도 연구소’란 정책 조직이 있어요. 정책을 배우려면 그런 곳에서 배워야 하는데, 당시 제가 추천받은 의원이 여의도 연구소 소속이거나 학자출신인 이한구, 유승민, 진수희 의원이었거든요. 제가 두 번째로 전화한 곳이 유승민 의원실이었는데, 마침 번역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해서 그곳에서 인턴을 하게 된 거죠.

‘유승민 의원이랑 제 아버지랑 고등학교 동창이라서 그런 게 아니냐’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렇게 따지면 (아버지와) 고등학교 동창인 사람 정말 많아요. 김문수 의원도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고, 주성영 의원, 유성걸 의원, 김부겸 의원도 그렇거든요. 가려고 했으면 그런 의원실 못 갔겠어요. 더군다나 당시 유승민 의원은 초선이었는데요.



Q. 인턴 하기 전에 정치 성향을 갖거나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활동을 하지는 않았나요?

그런 거 전혀 없었어요. 왜 여의도에서 인턴하게 됐냐면 당시 만나던 여자 친구 집이 당산동이었어요. 퇴근하고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곳을 찾다보니 국회더라고요. 버스타고 세 정거장이면 바로 갔죠. 대학교 1학년이 방학 때 한국에 들어와서 3개월 동안 할 수 있는 인턴치고 조건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 다음 해에도 여의도에 있는 한화증권에서 인턴을 했어요. 여자 친구랑 헤어지고 나서는 인턴 안 했죠.



Q. 처음 비대위원직을 제안 받았을 때 기분은 어땠나요?

처음엔 (위원직을) 제안받고는 뭔지 몰라서 거절했는데, 나중에 어느 정도의 파워나 임팩트를 가진 조직인지 확인해봤어요. 당에서 최고위원회가 사퇴하고 나면 비대위원은 항상 자동으로 생겼지만, 이번 총선 때만큼 임팩트있는 비대위는 없었어요. 저는 인턴을 하면서 본 게 있기 때문에 ‘자근자근 정치를 해서는 성공하기 힘들다, 내 의견이 반영되기 전에 내가 더러워 질 것이다’라는 걸 잘 알고 있어요. 제가 정치를 한다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하고 싶지 않았죠. 대신 짧게 참여하더라도 기록을 남길 수 있고 ‘뭔가 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하겠다는 거였거든요. 그걸 충족시킨 거죠.

 


Q. 비대위원 활동 당시 이뤘던 가장 큰 성과는 무엇이라 생각하세요?

정치 이슈에 대해서 기사가 많이 나왔는데, 정책이슈에 대해서도 의견을 많이 냈어요. 특히 야당의 반값등록금 정책에 맞서서 고교 무상화를 하자고 했었거든요. 또 주목받지 못한 것 중에 장애인도 민간보험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한 게 있어요. 장애인은 보험가입이 원천적으로 금지가 돼있는데, 그런 것을 보험사의 로비 때문에 폐지를 못하고 있었죠. (장애인 민간보험 가입 안이) 원래 민주노동당 박정숙 의원의 안이었는데 그걸 새누리당 비대위가 받았어요. 그런 식으로 정책적으로 많은 변혁을 이뤘어요. 우리(비대위원)가 쏟아 부은 것의 80%가 정책인데, 그런 건 기사가 나지 않았죠.



Q. 비대위원을 하면서 긍정적인 점과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요?

비대위와 같은 고위직은 우물 같은 거예요. 정치권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대위 정도의 정치 참여 기회를 얻기 위해서 2~30년 정도 정당 주변에서 맴돌아요. 그렇게 바깥세상을 돌아다니던 개구리 같은 사람들은 우물 꼭대기에 올라가기 전에는 우물 밑에 뭐가 있는지 몰라요. 그래서 그렇게 우물을 올라가기 위해 평생을 보내는 거예요. 그러다 우물 올라가서는 ‘절벽이다, 망했다’ 이러고 다시 내려가는 거죠. 제가 만약 나중에 정치를 한다고 해도 당대표나 대통령이 아니면 비대위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긴 힘들어요. 저는 비대위하면서 그걸 한번 찍어본 거죠. 어린나이에 정치를 면밀하게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됐다는 것도 장점이었고요.

단점은 정치에 대한 막연한 동경 같은 게 많이 사라졌다는 거예요. 제가 앞으로 정치를 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인 애기를 할 수 밖에 없어요. 예를 들어 안철수 대선후보처럼 ‘국민에게 실망을 주는 정치를 끝내겠다’는 식의 추상적인 얘기는 못해요. (인터뷰 당시는 안철수 전 후보가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하기 전이었다.) ‘무엇을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하는 식의 구체적인 얘기밖에 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제가 정치를 한다면 이젠 신선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Q. 비대위원 활동을 자평한다면요?

총선 직전에 솔직히 120석 예상했는데 152석을 달성했어요. 정치적인 성적을 점수로 따지면 130점 이상인거죠. 하지만 (아쉬운 점은) 비대위 입장에서는 정강정책에 (변혁의 내용을) 명시하고 당내에 변화 의지를 천명해놨으니 나중에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이걸 변경시키려고 하진 않겠지,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것보다는 정치인들의 자존심이 강했던 거죠. 요즘 정작 공천 받을 때는 아무 말 안 하던 사람들이 그걸 탈피하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데 그런 건 비대위가 조금 더 생각했어야죠.

 


Q. 비대위원 당시 청년정책이 제대로 만들어진 것이 없다는 비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비대위원은 모든 걸 관장해야 해요. 청년이 불합리하게 공격받고 있으면 그걸 방어하고 보호하는 게 청년정치인의 의무겠지만, 세대 이기주의에 입각해서 청년 비대위원을 하는 것은 최악의 선택이에요. 정책이 오가는 자리는 선동이 오가는 곳이 아니에요. 제가 일명 ‘고대녀’라 불리는 김지윤 씨와 토론을 했는데요, 김지윤 씨가 ‘내 친구가 죽어가고 있는데, 이준석 씨는 그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라는 식의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죽어가는 청년이 있듯이 다른 곳에서 죽어가는 사람도 있거든요. 그 논리를 갖고 정치권에서 열심히 싸우는 거죠. 그런데 ‘죽어가는 친구가 있는데 외면하다니 나쁘다’는 식의 ‘선한 논리’로 가다보면 이룰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게 결국 민주당에서 청년 표를 얻겠다는 일념 하에 세대 이기주의를 부추기고 선악구도로 몰았던 거거든요.

그리고 20,30대 정책을 반드시 20,30대가 대변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등록금 내는 사람이 20,30대일까요? 40,50대일까요? 등록금의 92%는 40,50대가 내요. 반값등록금을 원하는지 아니면 다른 복지를 원하는지, 그건 40,50대가 답할 문제지 20,30대가 답할 문제가 아니에요.




Q. 그래도 대학생 입장에서는 일자리나 등록금 정책 등 대학생 이슈에 관한 정책을 내놓는 후보를 지지하기 마련 아닐까요.

학보사에서 대학생을 대상으로 대선 후보 공약 블라인드 테스트를 했어요. 후보 이름을 가려 놓고 어떤 공약이 마음에 드냐고 물어본 거죠. 박근혜 후보가 1등 했어요. 박 후보를 지지하고 말고를 떠나서, 우리 삶에 도움이 되는 공약이 어떤 건지 고민해봐야 해요. 일자리 문제를 정책적으로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문재인 후보는 일자리 문제 해결을 위해 공무원 수를 늘린다고 하는데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인가? 생각해봐야 해요.

 

Q. 청년정치인으로 이름을 알리셨잖아요. 본인은 20대를 대표한다고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20대로서 내세울 수 있는 강점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또 ‘20대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이 이준석씨에게 바라는 게 있지 않았을까요?

20대 정치인의 능력이 ‘20대’에 국한된다면 (그 정치인의) 생명력이 다하고 말아요. 발언권이 사라지는 거죠. 50대 정치인들도 자기 지역구에서 20대 표를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요. 그보다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해요. 방송에 나가서 TV 토론을 한다고 해도, 20대라고 해서 발언권을 더 주고 그런 게 아니거든요. 상대편의 논리를 이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20대 대변한다는 것 자체가 '탈20대' 하는 게 먼저예요. 20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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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일부 언론에서는 손수조씨와 이준석씨를 ‘박근혜 키드’라고 부르기도 해요. 그 호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근혜의 남자’, ‘박근혜 키드’라는 타이틀 자체가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에요. 박 후보를 좋아하거나 싫어해서 그런 게 아니라, 우리나라의 음모론적 특성을 대변하는 것 같거든요. 포털 사이트에 이준석을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이준석 아버지’가 떠요. ‘이준석이 저 정도 위치에 올라가려면 아버지가 대단한 사람일거야’라는 식의 음모론적 생각을 하는 거죠.


 

Q. ‘박근혜 후보가 김종인과 이준석을 내세워 이미지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는데요.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건 잘 모르고 하는 비판이에요. 김종인이라는 사람은 그 정도로 호락호락한 정치인이 아니에요. 위와 같은 비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새누리당의 정강정책을 바꾸겠다’고 처음부터 문서화해놓았죠. (새누리당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정강정책에 경제민주화를 명시해놓은 거예요. 저도 함께 고교 무상화, 청년 정치 네트워트 강화 같은 것들을 명시해놨죠.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호락호락하진 않았어요.




Q. 준석씨는 대표적인 20대 보수로 불리고 계시는 데에 거부감은 없나요? 그리고 흔히들 20대는 진보적이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정 가운데에 선을 그어놓는다면 저는 좀 더 보수적일 거예요. 그런데 변희재 씨는 저를 위장 보수라고 부르기도 하죠. 이런 건 상대적인 거라 신경 안 써요. 2007년 선거에서 53.1%가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했어요. 당시 이 대통령은 중도실용으로 인식됐죠. 정동영 후보도 진보가 아니었어요. 우리나라 국민의 80%가 탈이념적이에요. 20대가 좀 더 이슈에 민감한 세대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아요.



Q. 김영경 공동선대위원장, 손수조 씨, 김광진 의원 등 정치에 뛰어든 청년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비대위 들어오기 전부터 ‘청년정치’라면 속된 말로 10년간 도제식 교육을 받은 운동권 애들을 말했어요.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열심히 했으니까 인정해주자’ 생각도 했었죠. 그런데 껍질을 까고 알맹이를 들여다보니 10년 동안 한건 마이크 잡고 청중 앞에서 연설한 것 밖에 없는 거예요. ‘열심히 했다‘까지는 인정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자기 발전이나 자기 세력의 논리 발전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는지 의문이라는 거죠. 과거에 운동했던 사람들 보면, 실제로 봉제공장에 가 일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굉장히 패셔너블해졌어요. 패션좌파라는 말이 어울리는 거죠.

지금 좌파 운동권을 보면 선착순 활동을 많이 해요. 누구나 이름 얹을 수 있는 활동이요. 예를 들어, 인터넷 할 수 있고 트위터 아이디만 있으면 누구든지 SNS 소통위원회에 들어갈 수 있어요. 지역에서 나이만 젊으면 누구든지 어느 정당의 청년조직에 들어갈 수 있고요. 그런 건 선착순 활동이죠. 하지만 그런 활동이 아니라, 사회 변혁을 위한 활동을 정말 했냐는 거죠.  그렇게 10년 동안 좌파 운동하다 보면 10년 뒤엔 다른 걸 할 수 없기 때문에 정치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그러다보면 사람이 망가지는 거예요. 전 운동권 자체가 생명이 다했다고 생각해요.
 


Q. 보수 쪽에서 한국 대학생 포럼(이하 한대포)나 전경련의 관변단체인 듯한 집단도 있는데 여기에 대해선 비판할 게 없는지요.

마르크스주의 못지않게 이념적인 성향을 강화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모순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 많아요. 제일 존경하는 인물에 이명박 대통령을 꼽는데,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선거에서 내세운 기치가 ‘중도실용’이었어요. 저는 이명박 대통령처럼 탈이념적인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웃음). 이것도 좌파에서는 극우 신자유주의로 포장하겠지만요. 어폐가 있는 거예요. 이념성향을 강화하려면 이념 성향이 투철한 사람을 지지해야죠.

우리나라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단어가 자유민주주의예요. 이미 단어에 정치색이 가미되었어요. 그런 점에 관해서도 내부적인 고민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시장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 내에서도 모로 가도 ‘종북’인 사람들이 분명 있거든요. 어떤 사람을 싫어하기 위한 이유를 항상 ‘종북’으로 몰아간다면 오히려 시장주의를 지지하거나 실용적인 스탠스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굉장한 두려움을 갖게 되요.

저도 종북이라고 공격 받은 적이 있었어요. 김광진 의원과 밥을 함께 먹었다는 이유로요. 백분 토론 끝나고 그냥 밥 먹은 거거든요. 무기로 삼을 게 그거 밖에 없는 거죠. 김광진 의원은 또 나름대로 왜 이준석이랑 밥먹었냐, 하고 욕먹었어요. 이념적인 성향이 너무 투철한 사람들은 좌, 우 막론하고 문제인 것 같아요.

 

Q. 이영조 교수에 대한 역사관 문제를 거론해서 공천에서 탈락시킨 적이 있죠. 박근혜 후보에게도 역사관 문제에 대한 전향적 자세가 필요하다가 말씀하셨는데, 아직도 그 부분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시나요? 인혁당 사건 사과 이후에도 박 후보가 과거사에 대해 더 개선된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박 후보는 이미 총선 과정에서 ‘산업화 과정에서 피해를 입으신 분들께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얘기했어요. 저는 오히려 그런 포괄적인 언어가 좋다고 생각해요. 방송 대기실에서 민주통합당 핵심 당직자 10위 안에 드는 의원과 만난 적이 있어요.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요즘 당에서 하는 꼴을 보면 웃기다. 민주통합당 사람들이 언제부터 장준하 선생을 챙겼다고 갑자기 정치 쟁점화하는 건지, 내가 봐도 역겹다’라고 했어요. 장준하 선생의 죽음에 관해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이 중요한 거지, 특정 정치세력의 도구로 이용되는 것 자체가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요. 정치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하면 사실관계와는 상관없이 공격당하는 입장에서는 방어할 수밖에 없게 돼요. (과거사를) 정치논리에 이용하지 말고 평상시에 잘했으면 좋겠어요.

 

Q. 그렇다면 더 이상의 사과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더 이상의 사과가 뭐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산업화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있다면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에, 그 포괄적인 입장에서 더 이상 얘기할 게 없다고 생각해요. 효자동 이발사까지 끌어내서 사과하라는 건지, 구체적으로 무엇을 요구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Q. 이번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의 승리를 원하실 텐데요, ‘새누리당이 이건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선거를 전쟁에 비유해보자면, 전쟁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건 ‘우리 땅이 아닌 곳을 전장으로 삼아라’예요. 전쟁에서 이기면 그 땅을 얻고 아니면 원상복귀 하는 거죠. 비대위 핵심 전략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성을 쌓기 시작했어요. 야전을 벌이고 전격전으로 몰아 부치는 형태로 2012년 초반을 보냈다면 지금은 수성전을 펼치고 있는 거죠.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한계선, ‘48%의 보수층’이란 성을 쌓고 지지층을 보호하겠다는 건데, 글쎄요. 수성전은 전투 과정에서 아군의 성벽이 허물어지기도 하고, ‘성벽이 뚫리면 끝난다’는 식의 불안감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좋지 않은 전략일 수 있어요. 확장적인 정책을 펼치고 공격적으로 나가야 해요. 그리고 ‘국민대통합’을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지역적으로는 포괄적인 정책을 펴고 있는데 반해, 이념적, 세대적으로는 과거보다 축소되고 있는 경향이 있거든요. 이걸 극복해야겠죠.



Q. 20대를 비롯한 젊은 유권자들 사이에서는 박근혜 후보의 지지율이 고연령층에 비해 낮은 것이 사실입니다. 박근혜 후보가 20대의 표심을 사로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특정 세대에 접근할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전장을 넓혀야 돼요. 세대 타겟팅을 하면 포퓰리즘 공약이 되기 쉽거든요. 광범위하게 호소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해요.

앞서 말했듯이 이명박 대통령은 2007년 대선 당시 53.1%의 지지를 받았어요. 정치인이 아닌 CEO출신의 실용적인 행정가로 비춰졌기 때문이죠. 이회창 씨도 정치인이 아닌, 뛰어난 법관이자 관료였기 때문에 20대에서 높은 지지율을 얻을 수 있었던 거죠. 하지만 박 후보는 한 게 정치밖에 없는 정치인이에요. 필연적으로 정치 혐오증을 안고갈 수밖에 없는 거죠.

 

Q. 정치에 대해 무관심한 20대가 많은 것 같아요. 정치가 20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이 정치와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치혐오가 생기는 거예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너 국회의원할래?’물으면 아마 누구나 다 한다고 할 거예요. 국회의원이라는 자리 자체를 혐오하는 게 아니라 그 자리가 자신과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혐오하는 거죠.

광의의 정치와 협의의 정치를 구분해야 해요. 선출직, 임명직에서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게 정치참여라고 생각하면 정치가 멀게 느껴질 수 있겠죠. 하지만 광의의 정치로 봤을 때는 박원순 서울 시장처럼 정치권 밖에서 활동하다가 정치권 안에 들어올 수도 있는 거예요. 저만 해도 그래요. 배나사 활동을 하면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인식이 있었거든요. 청년들도 그런 식으로 정치에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해요.


Q. 비대위원 활동을 하면서 직접적으로 정치를 경험하셨는데요, 비대위원을 마친 뒤 준석씨가 느낀 ‘정치’는 무엇인가요?
 
정치 안에 들어 와보면 쉽게 이해가 되요. 밖에서 정치를 바라보면 음모론이 횡행하고 전략가들이 뛰어다니는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 판돈 걸고 자기가 하는 도박판에 가까워요. 도박판에서는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죠. 나의 정책을 가지고 내가 국민들에게 심판받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음모론에 빠질 필요가 없어요. 문재인 후보 참수 만화를 올렸던 건 제 실수인거예요. ‘새누리당 전략가가 문재인을 이준석과 동급으로 만들려고 그랬다’고 말하는 건 정말 얼토당토않은 소리죠.

 



Q. 대선 캠프에 지금 들어가 계시지 않잖아요. 혹시 선거 유세 하실 생각은 없나요?

당원으로서 할 수 있죠. 유세는 재미있어요(웃음). 'tvN 스타특강쇼' 이후로 총선 때보다 인지도가 더 올라갔어요. (이를 토대로) 아마 당에 도움되는 일을 할 수도 있겠죠.



Q. 만약 박 후보가 차기 대통령에 당선돼 준석 씨에게 당이나 정부에서 비대위원급의 자리를 제안한다면 받아들일 의향이 있나요?

제가 비대위에 참여하면서, 박 후보께 ‘제 마음대로 얘기해도 되겠습니까?’하고 물었더니 그러라고 했어요. 그게 받아들여진다면 할 것 같아요. 지금도 당에서 직위가 없는 건 아니에요. 상임전국위원회 안에 청년 대표를 맡고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고 제가 그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위치에 가야한다는 거죠. 그 정도면 최고위 수준에 해당해야 하는 것 같아요.
 

Q. 만약 제안이 온다면 새 정부에서 어떤 자리를 맡을 수도 있다는 건가요?

새 정부에서는 안 해요. 별정직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아요. 제 회사를 하면서 별정직보다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서요(웃음).


 

Q. 당에서 다른 비중 있는 역할을 맡을 수도 있지 않나요?

아니요. 이미 비대위원이라는 비중있는 역할을 했으니, 소위 ‘말단’은 못해요. 하려면 최고위원급의 국회의원을 해야 해요. 그런데 국회의원을 하면 회사 운영을 못할 것이고, 최고위원하면 돈을 진짜 많이 쓰고 다녀야 할지도 몰라요(웃음).

 

Q. 회사에 집중하신다는 의미인가요? 

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Q. 꿈이 무엇인가요?

앞서 정치참여에 대해서 말씀드렸는데, 회사를 하면서 소위 잘 먹고 잘 살게 되면 정치를 할 거예요. 회사가 소위 대박이 터지면 선거에 나올 수도 있어요(웃음). 생계형 정치인이 되지 않겠다는 것이 제 원칙이기 때문이에요. 
 

Q. 혹시 대통령의 꿈을 갖고 계신 건 아닌가요(웃음)?

대한민국 초등학생 대다수의 꿈이 대통령이에요(웃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 이상 이 이하도 아닌 것 같아요. 

 

Q. 차기 대통령에게 한 마디 하신다면요?

당연히 (대통령을) 공격하는 세력이 있을 거예요. 이명박 정부를 돌아보면, 뭘 하든지 간에 무작정 욕하는 세력이 있었어요. 촛불시위에 매끄럽게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이후에 비합리적인 비판까지 전부 듣게 된 거죠. 그런 혐오증을 조기에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또 대통령이 관리해야 할 일이 굉장히 많아요. 만 명 정도의 사람이 대통령과 대통령을 따르는 사람들이 결정하는 별정직일텐데, 그들의 일부가 비리를 저지르는 건 어쩌면 자연적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 만 명의 일반인 중에 일정 비율의 소위 ‘또라이’가 있기 마련인 것처럼, 그 부류 중에도 그만큼의 ‘또라이’가 있을 수도 있는 거죠.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국민의 지탄을 받는 정도의 위치까지는 올라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좀 더 인사검증에 신경을 썼으면 해요. 덧붙여 정책이라는 것은 가변적이기 때문에 경직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