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과 '20대'에 대한 인상비평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에 청년이슈팀의 [청년연구소]는 청년과 20대를 주제로 한 다양한 분야의 학술 텍스트를 소개하려합니다. 공부합시다!

 

여기, 청년의 사회계급과 미래관의 관계에 대한 상반된 주장이 있다. ‘헨드리와 클롭’의 연구에 따르면 중간계급 청년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태도를 가진다. 반면 하층 노동계급 청년들은 20대 전반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해 별다른 기대를 갖고 있지 않다. 중간계급 청년들은 자신의 계급적 지위를 존속할 수 있는 이점, 예컨대 고학력과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한 사회적 자본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층 노동계급 청년들은 이런 이점을 갖지 못한다. 이들은 중간계급 청년들이 활용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로부터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 비관적인 태도를 가진다. 직업선택에 있어서도 대부분 저임금의 힘들고 단조로운 일로 한정되어 있다. 한편 ‘아넷’은 전혀 다른 주장을 제기한다. 오히려 중간계급의 (백인) 청년들보다 빈곤한 노동계급의 (이주민) 청년들이 자신의 미래를 더욱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반론이다. 이처럼 미국 사회를 대상으로 분석한 두 연구는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논문 <청춘 밖의 청춘, 그들의 성인기 이행과 자아정체성-빈곤 청년을 대상으로>은 아넷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돈 있으면 살만한 나라라고. 돈 있으면 살만한 나라기 때문에. (중략) 위에 있는 사람들은 다 돈 있다는 사람이고. 그럼 위에 있는 사람들은 지네가 더 잘 살기 위하여 이걸 불릴 테고. 없는 사람은 없고, 없고, 없고. 있는 사람은 또 있고, 있고, 있고. (중략) 뭐야, 이렇게, 쓸모도 없는 삼류학교 나왔잖아? 근데 삼류라고 할지라도 인재는 있을 수 있거든요? 그 사람이 진짜, 지금 보기에는 돌같이 보이지만, 알고 보면 금이 들어가 있는 금광석이라든가.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근데 우리 사회에 우선 일자리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 자체를 금인지, 돌인지, 확인하는 자체가 힘든 것 같아요.”


논문은 빈곤계층 청년들이 성인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자아정체성의 특징을 살핀다. 이를 위해 만 19세에서 만 29세까지,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계층에 속하는, 미혼 청년들을 조사 대상으로 삼는다. 그들의 생애사 면접법(유년기부터 현재까지 체험해본 생애 이야기를 인터뷰)을 통해 빈곤 청년의 성인기 이행 과정을 심층적으로 재구성한다.

 


ⓒKBS TV

 

왜 빈곤 청년인가? 20대 청춘론의 외부에 주목하라!

 

‘88만 원 세대’부터 ‘달관세대’까지 다양한 버전의 청춘 담론이 넘쳐난다. 청춘 담론이 부상하게 된 계기는 상당히 복잡한 구조적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경제 불황으로 인한 취업 문제, 사회적 위험에 대한 개인적 부담의 증대, 무한 경쟁의 심화 등, 오늘날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구조적 모순들이 청춘들에게 상당한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논문은 이런 현상에서 청년들의 성인기 진입이 지속적으로 유예”되며, “미래를 준비할 시간을 좀 더 연장함으로써 성인기 이행의 시기가 늦어진다”라고 분석한다. 졸업, 취업, 안정적인 직장 확보, 연애, 결혼, 출산 등 성인기 이행의 경험들이 뒤로 밀려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청년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 무기력과 체념, 낙심과 수치심 등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다.


하지만 논문의 문제의식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이런 사회적 문제가 청년문제의 본질인가? 혹은 모든 계층의 청년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가? 저자는 질문에 대처하는 사회의 행태가 “지극히 중산층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가난한 가정환경에 자라온 청년들에게 청년 담론이야말로 구태의연하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이전부터 “유예된 청춘”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산층의 청년들과 달리 미래를 준비할 충분한 기간과 자원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 자신의 생계비를 벌기 위해서 혹은 집안 살림에 도움을 줘야 하기 때문이다. 논문이 빈곤계층 청년들을 분석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여전히 발견되지 않은 묻혀있는 ‘청년’들을 조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번 청년연구소 [구태의연한 청년 담론, 빈곤 청년들의 목소리는 어디에?]에서는 가정, 학교, 노동의 차원에서 빈곤 청년의 환경적 특징을 살펴본다. 그들은 빈곤한 경제상황 때문에 일찍부터 생계를 부담하고, 가족관계를 재구성하며, 학업보다는 아르바이트에 시간을 더 쏟고, 노동현장에서 저임금과 착취를 당하는 청년기를 보낸다. 그 결과 '통상적인 의미에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했다. 이런 논의를 바탕으로, 다음 [빈곤 청년들을 위한 사회적 탄력성을 높이자]는 빈곤계층 청년들의 성인기 이행은 상당히 압축적이지만, 그에 따르는 사회적 인정이 뒷받침되지 못함으로써, 자아정체성 형성에서 다양한 굴절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민중의 소리 / 청년들의 주거 빈곤을 체험하고 있는 문재인 의원.

 


탈출과 차안의 중층성 :: ‘탈 가족’과 ‘재 가족’

 

가족은 생물학적 의미에서는 혈연집단이기도 하지만 가족구성원들 간의 사랑, 헌신, 배려, 신뢰 등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감정 집단이기도 하다. 특히 가족은 청소년들의 자아 정체성 형성에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차원에서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부모와 친밀한 관계를 어떻게 형성해왔는가는 자아정체성을 파악하는 데 중요하다. 조사에 참여한 청년들의 경우 상당수가 가족해체를 경험했다. 25명의 응답자들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부모의 이혼 및 사별을 경험했다. 7명은 취학 전(0세~7세)에 , 8명은 초등학교 시절, 나머지 4명은 중학교 시절에 부모의 이혼 및 사별을 경험했다. 이러한 가족해체를 경험한 응답자들 중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한 청년들은 어릴 적부터 부모에 대한 ‘무관심’ 혹은 ‘거리두기’로 대응해온 경우가 많았다.


‘무관심’은 가정해체로 인해 부모 중 한 명의 경제활동이 강화되면서 시작한다. 함께 거주하지 않거나 대화가 단절되면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어진다. 여기서 서로에게 무감각의 느낌이 발생한다. 나아가 부모와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감정적 충돌에 부딪힌다. 부모의 폭력이나 알코올 중독과 같은 부정적 경험은 ‘거리두기’라는 형태로 강화된다. 김현중(가명) 은 아버지와의 갈등관계 속에서 아버지를 "죽여 버릴지도 모르"는 극한의 상황을 마주하고, 부모와의 관계를 스스로 단절하려고 했다. 그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 표준적인 자식의 표상을 형성할 경험이 없었다. 부모의 폭력과 무관심 속에서 자란 청년들은 스트레스, 불안, 두려움, 격분 등과 같은 명사로 부모와의 관계를 평가했다.


부모와의 갈등관계는 청년들이 부모로부터 일찍 독립하려는 의지를 갖게 만들었다. 사실상 독립보다는 불가피한 도피의 성격이 훨씬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때 독립에 수반되는 불안정성이다. 인터뷰이들은 방황이나 가출, 아니면 자기만의 주거공간을 확보한다고 해도 방을 전전했다. 그들이 유사 성인으로서의 위치에 서게 되는 원인은 또 있다. 어릴 때부터 부모의 싸움, 이혼, 재혼 과정을 지켜보면서 성인들의 천태만상을 일찍이 목격한 사실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청년들은 일반적인 부모-자식 관계에서 볼 수 있는 수직적 관계나 보호-피보호 관계를 벗어난다. 부모의 행위를 대등한 관계에서 인식하고 판단하게 된다. 신영희(가명)은 “정말 잘 자랐다면 다른 애들처럼 제가 그런 것을 몰랐"을 것이고, “빨리 철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성인화된 청년들은 일상생활에서도 성인에게 기대되는 역학을 직접 수행한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갈등에 직접 개입하거나, 부모가 수행하지 못하는 역할을 대신하기를 요구받는다. 아픈 부모나 동생들을 돌보거나, 가사 일을 챙겨야 하거나, 본인이 직접 생활이나 가족과 관련된 일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몰린다. 윤미령(가명)은 자신의 성인기가 중학교 때 시작되었다고 표현할 정도이다. 가족 내에서 성인 역할을 해내야 하는 위치에 놓이는 것은, 곧 동일한 연령대의 청년들과 다른 시간을 보내야 함을 의미한다. 학업, 자아실현을 위한 문화자본 쌓기 등을 기대하기 어렵다. 빈곤 청년들의 일상은 생계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가족에 대한 책임과 부담을 떠안음으로써 빠르게 성인기에 진입한 청년들은, 역설적으로 가족에 대한 애착을 보였다. 가정해체의 경험, 부모 갈등으로 편입, 부모로부터의 폭력 노출 등의 경험이 ‘그렇지 않은 가족’을 긍정하는 것이다. 부모와 상당 기간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미래에 있는 자신의 가족 구성에 대해서는 안정성을 기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이중성은 실제적으로 이들이 처한 경제적 현실과 깊이 맞물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가정에서는 비(非) 학생, 학교·사회에서는 반(半) 학생

 

교육은 성인기 이행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과정의 일부다. 그런데 ‘학생’으로서의 정체성은 학교생활 외에도 가족의 지원과 보호의 정도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실질적으로 학생은 가정에서도 ‘생산’되기 때문이다. 논문에서 응답자들 중 다수는 “부모가 본인들의 교육과정이나 진학 등에 거의 개입하지 않았거나 못했다”고 말했다. 이들 부모들은 경제적으로 어렵고, 학력수준이 낮기 때문에 자녀 교육에 대해 깊이 관여하거나 지원을 충분히 해주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은 자녀가 가정에서도 점차 ‘학생’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중산층 이상의 청소년들이 오랫동안 가정에서 ‘학생’의 지위를 누리는 데 비해 빈곤계층 청소년들은 일찍부터 ‘학생’의 지위를 상실하는 것이다. 몇몇 응답자들은 자신의 부모들이 경제적으로 궁핍하기 때문에 공부는 제대로 시키지 못해도 ‘올바른 인간’으로 자라도록 강조했다고 말한다. ‘학생’보다는 ‘올바른 사람’이 강조된다는 점에서 청년들은 ‘학생’(사회적 정체성)보다는 ‘착한 아들/딸’(생물학적 정체성)로서 커왔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가정에서와 달리 이들은 학교를 통해 ‘학생’이라는 정체성을 어떻게 형성했을까. 대부분의 응답자들은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하거나, 학업에 관심이 없고, 학교로부터도 방치된 학생들이었다고 말했다. 여기서 부적응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학교생활에서 요구되는 규범이나 규율을 거부하지는 않지만 학업 자체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학업을 포기한 채 규율적인 학교생활에서 벗어나 탈 규범적으로 행동하는 경우이다.


이들은 청년이 되어 대학에서도 별다른 의미를 거의 찾지 못했다. 특히 고등학교 시절부터 학업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 청년들은 대학생활에 있어서도 쉽게 적응하거나 대학문화를 흡수하지 못했다. 엄밀히 말해 청년들은 ‘대학생’으로서의 정체성도 구축하지 못한 것이다. 응답자들 중 몇몇은 대학에서 배우는 것도 별로 없고, 비싼 등록금을 내도 그에 응하는 교육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실망감과 불신을 안고 있었다. 이연희(가명)는 “등록금이 너무 쓸데없이 비싼 거 같"다며 “책이 이만 오천 원인데 배우는 거는 오천(원)밖에 안 된다는 그런 느낌?” 이라고 말한다.


이들이 ‘대학생’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는 데에는 대학생활에서 사회자본을 쌓는 데 겪는 어려움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전문대를 다니는 청년들에게서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이들에게 대학은 ‘선배’도 ‘후배’도 ‘로망’도 없는 고등학교 때랑 별반 다르지 않는 곳이다. 이들은 대학에 대한 별다른 기대 없이 진학한 데다가 학업보다는 알바를 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특히 선후배나 동기들 간의 상호작용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대학생활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실제로 이들은 대학생이라는 정체성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또는 학문 성취의 장이 아닌 ‘대학생’이라는 지위를 매개로 더 열려진 알바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로 여긴다.


요컨대, 빈곤계층 청년들의 성인기 이행에 대학의 역할이 큰 부분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대학생활에 대한 의미를 찾지 못하며, 대학교육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크게 이해하지 못한다. 대학은 고등학교의 연장이거나 등록금만 ‘쏟아 붓는 곳’으로 인식될 뿐이다. 결국 이들은 대학 밖의 다른 사회경험, 예를 들어 또래집단과의 소통이나 알바 등을 통해서 성인기로 이행한다.

 


생계형 ‘유령’노동자들

 

빈곤계층 청년들이 겪는 학교생활은 순수하게 학업에만 집중할 수 없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부모의 경제적 지원이 일정 정도 가능한 경우를 제외하고 이들은 빠르면 초등학교부터 알바를 학업과 병행해왔다. 이들은 보통 최저 임금 수준이나 그 이하의 임금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알바는 그만둘 수 있는 선택적인 사항이 아니었다. 중고등학생 때부터 해온 알바는 일시적인 ‘경험’이 아닌, 생계나 용돈벌이와 직결되는 “필요노동”이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불가피하게 전단지 알바를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했던 최태훈(가명)은 각종 알바를 해오면서 “일 버러지 같은 인생”을 살았다고 말한다.


노동은 경제적 목적에서 시작되었지만, 노동에 대한 관점은 친교와 생계의 중간지점에 있었다. “친구도 있고, 수다도 떨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면 쉽게 참여하지 않는다. 인터뷰 중에 이들은 지속적으로 “친구와 함께 해서 즐겁다. 함께 하지 않았으면 못 했을 것이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 청소년들이 통상 학교나 학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경향이 강한 반면, 응답자들은 또래 집단과의 친분을 형성하면서 노동시장에 진입한다. 청년들은 이른 시기부터 알바를 시작했지만, 노동자라는 정체성이 아닌 또래집단 내 한 멤버로서의 정체성을 구축해갔다. 그러나 이들이 알바를 지속적으로 행해야만 하는 경제적 상황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아르바이터’라는 이중성을 벗어나기 어렵다.


주말마다, 혹은 평일 밤마다 이루어지는 노동은 일상적인 일이며,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학업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은 대학생이 되더라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논문의 인터뷰들 중 14명이 대학을 다니고 있는데, 이들 모두는 등록금 부담을 떠안고 있다. 4년제 대학을 다닌 유지혜(가명)는 “무엇보다 학업이 계속 이어갈만한, 등록금 문제가 가장 컸던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집에서의 어느 정도 지원이 있었어야 되는데, 전혀 없었고, 알바로 등록금을 해결할 순 없”는 상태에서 등록금이 400(만원)에 상당했기 때문에 대학을 중퇴하고 만다.


빈곤 청년들은 등록금이나 용돈 마련을 위해 상당한 시간을 알바나 일에 매달려야만 했다. 그만큼 대학생활에 적응하기도 어렵고, ‘스펙 쌓기’ 등 자기계발을 위한 노력에도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까지 혹은 20대 내내 줄곧 알바를 하면서 학비, 용돈 등을 벌어왔다. 그들은 ‘학생’보다는 노동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노동자 정체성을 갖고 있지는 않다. 이른 시기부터 노동시장에 참여함에도 불구하고 빈곤 청년들의 정체성은 매우 불안정하다. 일 자체로부터 어떤 직업의식이나 자존감을 표출하지도 않을뿐더러, 궁극적으로 하고 싶어서 하는 일도 아니고, 안정적인 직장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논문은 노동을 하면서도 스스로 노동자로서 정체성을 갖지 못하는 이들을 “유령 노동자”로 정의한다.


가정, 학교, 노동의 영역에서 살펴보는 과정에서 응답자 대다수는 “사회가 자신이 성인이 되는데 어떠한 도움도 제대로 주지 못했고, 오히려 방해나 장애물이 되었다”고 말한다. 독립 후에도 최저임금으로 홀로서기를 해야만 하는 청년들의 경우에 부정적 인식은 더욱 강화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빠르게 “유사 성인”의 위치에 서지만, 오히려 자신의 삶이 더욱 불안정해지는 역설이 발생한다. 다음 [빈곤 청년들을 위한 사회적 탄력성을 높이자]는 빈곤계층 청년들의 성인기 이행은 상당히 압축적이지만, 그에 따르는 사회적 인정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현실을 살펴본다.

 

글. 아호(9208kjh@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