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만치가 않네. 서울 생활이란 게.

이래 벌어가꼬 언제 집을 사나.

답답한 마음에 한숨만 나오네.

월세 내랴 굶고 안 해본 게 없네.

이래 힘들라꼬 집 떠나온 것은 아닌데.

점점 더 지친다 이놈에 서울살이


밴드 장미여관의 '서울살이' 中


밴드 장미여관이 타향살이의 애환을 담아 부른 노래다. 사실 타향살이의 애환은 꼭 서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청년의 타향살이는 대체로 고달프다. 내 고향이 아닌 곳, 경제적 기반을 닦지 못한 곳, 가족과 떨어진 낯선 곳에서의 새 출발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타향살이엔 ‘빈곤함’이나 ‘외로움’과 같은 단어가 실과 바늘처럼 딸려온다.


그럼에도 많은 청년들은 타향살이를 고민하거나 선택한다. 그들이 '빈곤함'과 '외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타향살이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타향살이는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에드워드 호퍼作 ⓒ고함20


#1. 서울 취업에 성공해야만 하는 대구 출신 최승리(28세, 가명) 씨


오늘도 어김없이 9시 30분을 알리는 핸드폰 알람이 울린다. ‘시팔, 내가 돈만 더 있었으면.’ 귀에서 귀마개를 빼며 외치는 마음의 소리다. 저녁만 되면 시작하는 옆집 청년의 기타연주 소리와 윗집의 샤워 소리를 막기 위해 준비한 귀마개다. 옆집과 윗집의 소음 덕에 귀마개 없인 잠을 이룰 수 없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붙은 20살 무렵, 대구에서 올라와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군 복무 기간을 제외하면 벌써 7년째 타향살이 중이다. 하나 있는 아들을 서울로 보낸 부모님을 생각해 귀향도 고민했었다. 하지만 서울에서의 취업을 포기할 수 없었다.


서울에서 내게 허락된 5.5평 반지하


대구(좌측)와 신촌(우측)의 월세 벽보. 보증금은 기백만 원의 차이가 나고 월세는 몇십만 원의 차이가 난다. ⓒ고함20


서울 땅이 1억 8천 평이 넘는단다. 그 1억8천 평 중 내게 허락된 공간은 고작 5.5평 반지하다. 사실 서울에서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으로 5.5평 방을 구한 것도 감지덕지 다. 최저가에 월세를 구하기 위해 인터넷 부동산 카페를 15일간 잠복했었다. 그런데 난 최근 들어 이 최저가의 행복이 썩 달갑지 않다. 아침에 일어나 귀마개를 뺄 때면 부모님께 부탁해 좀 더 시설이 좋은 곳으로 가는 게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서울살이를 한 지 7년 차, 부모님께 더 손 벌릴 염치는 없다.



오래되고 습한 자취방에서 곰팡이는 벽지 장식의 일부다 ⓒ고함20


자기소개서를 손질하기 위해 책상에 앉는다. 불현듯 불만이 밀려온다. 이 책상만 아니면 내 방이 조금은 더 넓어지리라. 그러나 책상은 치울 수 없다. 집 밖에서의 공부는 돈이 들기 때문이다. 졸업을 미뤄 둔 대학교 도서관도 떠올려봤지만, 대학교는 재학생이 아닌 내게 도서관을 개방하지 않았다. 도서관을 이용하려면 1년에 10만 원을 내란다. 학교 도서관에 가려면 버스비도 든다는 생각이 들자 학교 도서관에 대한 관심은 차갑게 식었다.


아르바이트 때문에 늦어진 취업은 누구도 보상해주지 않는다


아침 식사를 아직 하지 않았다. 대충 라면으로 때울까 고민해본다. 어제도 먹고 조금 있으면 또 먹을 라면이다. 굳이 지금도 먹을 필요는 없다. 건강을 위해 직접 밥을 해먹을까도 생각했지만, 요리의 문턱이 꽤 높다. 결국 인터넷에서 인스턴트 식품 할인 행사를 기다리거나 15분 거리 할인마트를 방문한다. 집 앞 편의점도 있지만 편의점은 할인마트보다 비싸다.


부모님께 용돈을 받는 것이 죄송해 아르바이트를 생각해 본 적도 있다. 그러나 아르바이트와 취업 준비를 병행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자기소개서를 촘촘히 채워나가야 함’은 ‘하루하루를 촘촘히 채워나가야 함’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지난 달 어머니와 취업 문제로 언쟁을 한 적이 있었다. 서로의 생각이 일치하지 않자 어머니께서는 “이제 취업 준비는 알아서 해”라며 용돈을 끊으셨다. 생활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몇 개 회사에 넣어야 할 지원서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결국 그 회사들의 서류 지원은 포기해야 했다.


다행히 이번 달부터는 용돈을 다시 보내주셨다. 덕분에 아르바이트를 관두고 취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르바이트 때문에 서류 지원을 하지 못한 것은 지금까지도 미련으로 남아 있다.


물론 부모님의 재정적 지원에 떳떳한 것은 아니다. 부모님의 지원은 분명 내 마음속 빚 목록에 쌓이고 있다. 하지만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취업에 늦는 것보다 하루빨리 취업을 해서 그 빚을 갚아나가는 게 빠르다고 생각한다.


패잔병이 될 수 없다


내게 있어 서울은 의식주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 구질구질한 장소다. 그럼에도 서울에서의 타향살이를 포기하지 못하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내가 서울 취업에 실패해 대구로 돌아간다면 나 자신을 ‘패잔병’으로 규정할 것만 같기 때문이다. 


물론 그 생각에 옳지 못한 부분이 있음을 안다. 그러나 7년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들인 노력을 위해서도, 그리고 날 지원해 준 부모님을 위해서도 난 패잔병이란 꼬리표를 달고 싶지 않다.


#2. “이제는 천안이 내 안식처다”, 천안 거주 중인 26세 주찬 씨


“20살부터는 독립해 살아라.” 내가 대학에 막 들어갈 무렵 부모님이 하신 말씀이다. 난 부모님의 말씀대로 고향인 서울을 떠나 학교가 있는 천안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새벽까지 계속되는 아르바이트, 결국 남긴 건 우울증


물리적, 경제적으로 독립한 나는 자취를 시작한 이후 모든 돈을 직접 벌어야만 했다. 그런 내게 아르바이트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저녁 7시부터 새벽 4시까지 패스트 푸드점과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9시간에 가까운 아르바이트 야간 노동, 그러나 남는 돈은 없었다. 매달 고정적으로 나가는 비용만 따져도 월세 35만 원과 공과금 10만 원이었다. 거기에 차비와 식비, 생활비가 합쳐지니 매달 100만 원 가까운 돈이 필요했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이어지는 아르바이트는 내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결국 내게 남은 건 물질적 풍족이 아니라 우울증이었다.


나를 보듬어 준 ‘하늘 아래 편안한(천안天安)’ 사람들



충청도 청년 커뮤니티인 ‘무기공장’에서 주최한 "혼자 왔니?" ⓒ주찬 


‘무기공장’과 또 다른 커뮤니티인 ‘호두와트 마법학교’가 협력 주최한 "우리 여기 살고 있어" 행사 현황 ⓒ주찬


우울증에 빠진 내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건 천안의 지인들이었다. 아는 형님은 사회적 기업의 일자리를 소개해 주었다. 보수는 적지만 좋은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됐고 일에도 잘 적응했다. 뜻이 맞는 친구들끼리 청년 커뮤니티도 꾸렸다. 청년이 놀 곳이라곤 술집밖에 없는 천안에서 청년들을 위한 새로운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다. 최근에는 중증 장애인 활동 보조 일도 시작했다.


사회적 기업 근무, 청년 커뮤니티 활동, 중증 장애인 보조. 몇 년 전만 해도 우울증에 시달리며 자기 자신을 챙기기도 바빴던 내가 이제는 다양한 문화 사업도 벌이고 다른 사람도 돕고 있다. 


물론 일은 고되다. 매일 오후 3시에 출근해 새벽 6시까지 일을 한다. 우울증에 시달렸던 대학 초년기보다 노동 시간도 길고 노동 강도도 몇 배나 높다. 그러나 그때와는 다르게 현재의 생활은 행복하다. 육체와 정신에 찾아오는 피로보다 내가 하는 일에서 오는 만족감이 몇 배는 더 크다. ‘하늘 아래 편안한 곳’이라는 천안의 지명대로 천안에서의 내 삶은 더없이 좋아졌다.


월세를 벗어나 전세로, 천안에서의 새로운 삶


군 전역 후 월세를 벗어나 전세로 집을 옮겼다. 매달 나가는 월세가 부담스러워 내린 결정이기도 했고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하며 천안에 정착하겠다는 의지 표명이기도 했다. 전세 비용 2,300만 원은 어머니께 무이자로 빌렸다. 부모님의 철학대로, 그 돈 역시 매달 백만 원씩 꾸준히 갚아나가고 있다.


월세가 아닌 전세라지만 달라진 건 없다. 방은 여전히 좁고 습하다. 그래도 천안을 떠날 마음은 없다. 천안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계속 함께하고 싶다. 보수는 적지만 지금 하는 일이 만족스럽다. 6년 전 우울증을 안겨준 천안이 이제는 내 유일한 안식처다.


#3. 충북 음성군 감곡면에서 상경을 고민하는 김관대(22세, 가명) 씨


나는 공시생이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위해 1년 반째 아침 6시에 집을 나선다. 대학을 다닐 땐 서울에서 2년간 자취 생활을 했었다. 하지만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하면서 고향인 감곡으로 돌아왔다. 서울에서의 자취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다.


떠밀리고 떠밀려 도착한 곳, 30분 거리의 타 대학 시민 열람실


감곡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땐 집에서 공부를 했다. 하지만 집에서 공부할 때면 가족도 날 신경 쓰고, 나 역시 그런 가족이 신경 쓰여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결국 가족을 피해 집 밖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감곡 골목 ⓒ고함20


감곡 시내. 청년을 위한 시설은 없다 ⓒ고함20


그런데 막상 집을 나서려고 하자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감곡엔 변변한 독서실 하나가 없어 공부할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다는 거다. 카페에서 공부하는 것도 떠올려봤다. 하지만 집에서 받는 용돈 10만 원이 수입의 전부인 지금, 카페에서의 공부는 사치다. 


결국 집에서도 밀려나고 독서실과 카페에서도 밀려난 나에겐 타 대학 시민 열람실뿐이었다. 대중교통도 마땅치 않은 감곡이다. 아침 6시에 집을 나서서 30분 거리를 걸어간다. 운동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될 것도 안 될 것 같은 감곡, 벗어나야 하는 거 아닐까?


평화로운 감곡의 풍경 ⓒ고함20


논밭이 반인 감곡의 분위기는 여느 시골 마을 마냥 평화롭다. 그리고 그 평화로움은 내게 나태함을 안겨준다. 자취 시절 경험한 서울의 분위기와는 딴판이다. 서울에는 공부뿐만 아니라 대외 활동, 취업 준비를 하는 대학생이 넘쳤다. 그들이 내뿜는 치열함은 내게 나태해질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감곡은 나 혼자 남겨진 외딴섬 같은 곳이다.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현실감각은 무뎌진 지 오래다.


괜히 지치고 공부도 하기 싫다. 이럴 때는 영화 한 편 보고 오면 참 좋으련만 감곡에서 영화 한 편 보고 오려면 버스 시간만 왕복 1시간 20분이다. 공시생이 택하기엔 과한 취미활동이다. 친구도 보고 싶지만 친구들도 모두 서울에 가 있다. 감곡에선 공부 중간에 끄적이는 그림과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것만이 유일한 낙이다.


공부할 환경도 마땅치 않고 나는 자꾸 나태해져만 간다. 쌓이는 스트레스도 풀 곳이 없다. 서울의 교육 환경, 대학생들의 치열함, 힘들 때 함께 할 친구들이 그립다.


물론 과거의 서울 생활을 떠올리면 서울에서의 삶이 항상 장밋빛이었던 건 아니었다. 부모님께 신세 져야 했던 월세와 공과금, 생활비를 위한 아르바이트, 돈이 부족할 때면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던 용돈 부탁 문자, 잦은 아르바이트로 끊기게 되는 공부 흐름 등 공부 외적으로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았다. 하지만 외딴섬 같은 이 감곡에서는 될 것도 안될 것 같다. 무엇을 하든 서울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 정말 서울 가야 할까?


[지방 빼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다음 편은 지방 청년의 ‘아르바이트’에 관한 이야기다. 지방의 아르바이트 환경은 어떨 지, 최저시급은 잘 지켜지고 있을 지, 지방 청년의 목소리를 통해 직접 들어보도록 하겠다.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기사를 재구성했음을 알립니다. 

 


인터뷰.글/ 콘파냐(gomgman3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