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도 자본이 침투한 이후로 인문학은 언제나 구조조정 대상의 1순위가 되었다. 이 시대의 제 1덕목인 유용함이 없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 장관이 ‘청년실업은 문․사․철의 과잉공급‘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인문학은 취업에 도움이 되지도 않으며, 기업으로부터 자금을 유치해 오는데도 힘을 못 쓴다.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은 그 존재 이유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받아 왔으나 ‘인문학은 죽어서 안 된다고 역설할 뿐 그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

인문학과 사회의 상호작용


문학비평가 김현은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고 이야기 하며 문학이 유용하지 않기 때문에 유용한 것들의 억압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줄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문학은 사회의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이 세상이 어떤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문학을 비롯한 인문학이 사회의 외부에서 관조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필요에 의해서 세계 구조와 상호작용 하며 존재하고 앞으로도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문학을 비롯한 인문학의 이 사회에 저항하게 한다는 특징, 세계 안의 자신을 깨닫게 하는 점은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좋은 문학이나 인문학의 척도가 될 수는 있어도 인문학 전체를 아우를 수는 없을 것이다.

인문학은 이 사회의 필요에 의해 존재하고 있다. 이 시대의 모든 유용한 것들마저도 인문학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 인문학이 없는 세상은 마치 벽돌이 있는데 석회가 없어 아무것도 만들 수 없는 것과 같다.

인문학이 생산하는 것은 잠재력
우리가 인문학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쉽게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인문학이 여타 실용학문처럼 가시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우리와 사회의 잠재력을 제공한다. 언제나 발현을 기다리고 있고 발현 되고 있는 형태인 것이다.

이는 개인에게 인문학이 영향을 주는 방식을 생각하면 이해가 조금 더 쉬울 것이다. 한 개인이 칸트나 헤겔의 텍스트를 읽고 무언가를 배웠을 때, 그것이 실용적인 기술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저 쌓여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발현된다. 인문학을 통해 얻은 것으로 사고할 때 우리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사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분야에서 인문학에 의지하고 있다.

인문학의 변질? 아닙니다. 인문학의 가능성입니다


하지만 인문학이 이렇듯 사회 내부에 존재하기 때문에, 본래의 가치를 제대로 실현하기 힘들 수 있다. 누군가는 모든 것이 금전적인 가치로 환산되는 이 시대에 인문학이라는 것이 설 자리는 없는 것이 아니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에 병합되어 변질된 상태로만 존재할 기회를 얻을 수 있는 현재의 인문학은 진정한 인문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은 유사 이래로 언제나 살아남았다. 중세에는 종교의 힘이 강해 신학에 편입된 형태로만 근근히 살아남았지만 중세 말에서 근대를 여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현재의 상황은 종교가 자본주의로 대치된 것을 제외하고는 같은 상황으로 보인다. 일견 인문학에게 좌절의 상황으로 보일 수 있지만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를 열 수 있는 것도, 그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도 인문학이다.

‘사람’을 통해 기능하는 인문학
그렇다면 인문학은 어떻게 이 시대에서 살아남아야 하는가? 나는 그것이 김현이 말한 것처럼 사회와 외따로 떨어진 순수한 형태로만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개개인에게 인문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을 아는 사람의 세상의 곳곳에 존재하는 것. 그것은 사회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잠재력이다. 꼭 사회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추동을 느껴 운동에 가담할 필요는 없다. 개인의 재능과 역량에 맞게 사회 적재적소에 살아가면서 무의식적으로 인문학을 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불려지는 ‘광고’를 보자. 몇 년 전 한 보험회사가 남편이 죽자 보험금으로 10억을 받아 행복하게 사는 여성을 보여주는 광고를 한 적이 있다. 잘생긴 보험 설계사와의 불륜 코드까지 있는 이 광고 시리즈는 많은 이들의 불쾌하게 했다. 하지만 이런 광고가 일상화 된다면, 그 광고 안에 녹아있는 사상을 이 시대의 보편적인 생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일 지도 모른다.

이런 광고가 만들어 진 것은 인문학을 발현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두산그룹의 ‘사람이 미래다’라는 슬로건을 단 최근 캠페인은 사람들이 더 나은 생각을 공유하게 한다.

말주변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더 신중히 말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출발이 늦은 사람이 아니라, 준비를 더 충분히 한 사람일 뿐입니다.
누가 당신에게 부족한 점이 많다고 말하던가요?
부족하다는 점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좋아질 점도 많다는 것입니다.

이를 보고, 자본주의의 억압을 깨닫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방해 할 뿐 이것은 진짜 인문학이 아니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 체제를 당장 전복할 수 없다면, 그 안에서 더 나빠지지 않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광고의 목적 자체는 기업을 위한 것 일지라도, 그 내용은 사회에 영향을 준다. 그것이 인문학을 통해 더 나은 내용을 담는다면, 세상은 더 나빠지기를 멈추거나 더 나아질 수도 있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결여된 광고가 판치는 세상보다는 나은 것이다.

인문학이 영향력 있는 세상
광고를 예시로 들었지만 다른 모든 분야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회 운동이 꼭 사회 운동의 범주에서 이루어 져야 한다거나, 인문학이 인문학의 영역 안에서만 이루어 져야 한다는 생각은 운동과 인문학을 고립시키고 그것의 영향력을 감소시킬 뿐이다.

인문학은 소수의 사람들만 향유해서는 안 된다. 인문학과 직접적으로는 관련 없는 일에도 인문학을 배운 사람이 포진하고,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가치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전 국민이 인문학을 배울 수 없다면, 인문학을 통해 생산된 것들을 향유하고, 경쟁과 자본의 원리에 찌들지 않은 행복을 나눠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