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 바랜 부모님의 연애시절 사진을 보고 가슴이 설레고, 헌 책방의 쾨쾨한 냄새를 좋아하며, 유행하는 일레트로닉 음악보다는 통기타에서 울리는 소소한 음악에 더 끌리는 당신. 그대에게 닥 맞는 ‘아주 오래된 낭만’을 선물합니다. 


요즘 TV를 아예 안 본다. 한 온라인 파일공유 사이트에서 지상파 방송을 싼 가격에 공급해주던 1년간의 이벤트가 끝난 이후로 그렇게 됐다. 돈이나 좀 있으면 제값 주고 ‘굿 다운로더’ 행세 좀 하겠는데 잔고를 보면 그건 안 되겠고, 또 토렌트(신종 P2P 서비스) 같은 나름 신기술까지 동원할 만큼 컴퓨터 능력자도 못 되는 터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소소한 재미가 필요할 때는 옛날 드라마를 찾는다. 옛날 드라마는 저작권 분쟁에서 그나마 좀 자유로운지, 10편쯤 받는데 500원 정도면 충분하다. 화질은 좀 ‘구리고’, 내용도 좀 어색하다고 느낄 때가 있지만 말이다. 이상하게 영화나 음악은 세월이 지나도 촌스럽다는 생각이 안 드는데, 드라마는 유난히 그렇다. 워낙에 유행을 타는 장르라서 그런가.

옛날 청소년드라마 <반올림>은 조금 달랐다. 이 드라마가 2003년 시작했으니 벌써 거의 10년.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게다가 중학생들이 주인공인 드라마를 20대 중반에 접어든 사람이 보고 있음에도 옛날 느낌이 거의 나지 않았다. 인물들이야 당시에도 지금도 한국 중학생이라고 믿기 힘든 머리 길이와 교복을 장착하고 있었으니 그렇다고 쳐도, 10대들의 이야기에 다 큰 대학생이 이렇게까지 공감하고 자신을 투영하고 또 질질 짜게 만든 것. 그게 <반올림>이라는 드라마 자체가 가진 힘이었을 거다. 64회나 되는 긴 분량을 여러 달에 걸쳐 ‘정주행 완료’하고 나니, 스물셋이라는 나이에 맞게 ‘반올림’, 조금 자란 척 하고 싶은 기분이다.



첫 방송 그 때, 중학생들 사이에서 <반올림>은 나름의 센세이션이었다. <학교>로 대표되는 고등학생 드라마나 <요정 컴미> 같은 어린이 드라마 사이 어딘가의 빈 공간을 메우는 참신한 기획이었던 것이다. 당시 <반올림>의 주인공들은 극중 나이도, 실제 나이도 중학생이었으니 그 때 중학생이었던 우리도 그들과 함께 성장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법 한데 돌아보면 막상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그 당시에 우리가 주인공들을 바라보는 마음은 공감이나 연민이 아닌 동경이었다. 외모도 생각도 우리보다 한껏 성숙하고 잘나 보이는 그들을, 같은 나이인데 훨씬 더 다양한 경험을 하며 자라는 그들을 부러워했던 것이다. (우리들 중 누가 중학교 때 친구들끼리만 제주도에 놀러간 적이 있나.)

극중 인물들의 대사와 생각은 다시 봐도 확실히 그 나이의 정신연령에서 나오는 보통의 그것 이상이다. 매주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수많은 관계에 대한, 세상의 문제들에 대한 내레이션은 중학생의 철없는 한 마디라고 하기에는 꽤나 그럴 듯한 면이 있다. 중학생이 가질 수 있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함, 세상에 대한 당당함이 더해지니 오히려 어쨌든 어른인 우리들을 부끄럽게 하기도 한다. 아직까지 이 나이 먹도록 채우지 못한 생각을, 또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중학생인 그들이 경험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당연히 우리 어렸을 적엔, 그런 생각 못했을 것 같다고 말이다.



중학생 시절의 기억을 되새겨보면 그 때 우리의 세상은 집과 학교, 학원, 놀이터 같은 곳이 전부였다. 한 달에 한 번쯤 친구들이랑 함께 가는 ‘시내’가 그나마 일탈의 공간이었을까. 고등학생들만큼은 물론 아니었겠지만, 우리는 그 나이를 공부에 대한 모종의 압박감을 항상 안은 채로 보내야 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왜 태어났나, 가족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정이란 무엇인가, 또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은 머리에 담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성적에 관계된 문제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냥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대로만 대충 알고 있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우리는 그러한 문제들을 실제 세상에서는 스스로 경험할 수 없었다. 다만 궁금증이 머리끝까지 차오를 때엔 책이나 TV를 보고, 신해철의 라디오를 켰다.

어쩌면 대학생의 ‘반올림 공감 증세’는 아주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극중 인물들이 중학생의 나이에 경험하고 아파가며 배워가는 세상을, 대학생이 되어서야 이제야 막 하나씩 경험해가고 있기 때문일 거다. 한국의 20대 청춘들이 유난히 아픈 이유도 사실은 이런 것이 아닐까. 입시 앞에 유예해왔던 아픔들, 세상과의 충돌을 한꺼번에 몰아서 겪어야 하는 운명에 처했으니 말이다.



<반올림>의 1편을 끝으로 중학생이 전면에 등장하는 공중파 드라마는 자취를 감추었다. <반올림>의 속편, <달려라 고등어> 등으로 얇게나마 명맥을 이어가던 고등학교 배경의 드라마도 입시드라마 <공부의 신>, 오디션드라마 <드림하이>로 대체되어버렸다. 요즘 아이들은 <반올림>을 보면 어떤 느낌을 받을까. 중학생 때 우리들과 또 비슷하지 않을까. 그 아이들도 대학생이 되어서 <반올림>을 접하면 또 그제서 공감과 탄식을 말하게 되지 않을까.

어릴 때부터 주름이 지긋해졌을 때까지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준다는 어른들의 동화 ‘어린 왕자’. <반올림>도 사실상 그런 드라마가 아닐까 싶다. 드라마를 보는 사람 스스로가 스스로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체크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의미의 ‘성장드라마’. 다음에 <반올림>이 지금보다 ‘더’ 오래된 취향이 되었을 때는, 그러니까 더 나이를 먹고 주인공들을 만났을 때는 그들과의 소통 속에서 스스로 더 자라있음을 느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