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 공교육비 정부부담 낮고…민간 부담 '최고'”라는 기사를 봤다. 교육비를 부담하는 당사자로서 씁쓸하기 그지없다. 등록금이 비싸다 비싸다 했지만, 엄격한 시장자유주의 덕에 학비가 비싸기로 유명한 미국의 뒤꽁무니를 바짝 쫓고 있었다니 우리가 내는 등록금이 비정상적이긴 한가보다.

추석에 시골을 다녀왔다. 오랜만에 보는 동생들과 친구들이 근황을 전해왔다. 건너 건너 아는 녀석이 집안 형편을 고려해 서울은 포기하고 지방 국립대들을 중심으로 원서를 넣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대학 입학원서를 쓸 때에는 점수 때문에 포기한 학교는 있었지만, 경제적 문제 때문에 포기한 학교는 없었다. 내가 만약 경제적 문제 때문에 학교를 포기해야 했다면 좌절감에 대학 생활을 보냈을 지도 모른다. 원래 인간이라는 것이 자신의 능력 밖에 있는 환경의 힘에 굴복할 때 좌절감이 더 크기 때문이다.

 ‘왜 80이 20에게 지배 당하는가’에서 홍세화씨는 프랑스의 교육제도를 예로 들며 우리나라의 교육제도에 관해 언급한 바 있다. 프랑스는 모든 교육이 무상교육이다. 대학은 국립이고 완전히 평준화되어 있기 때문에 시험에만 합격하면 자신이 사는 지역의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 결국 교육비의 일부를 프랑스 사회가 부담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자기가 교육을 받은 것이지만, 이 능력의 일부는 프랑스의 몫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사회 환원 의식이 생기는 것이다. 세대 간 연대가 가능한 부분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초등학교부터 사교육을 하지 않으면 낙오될 것처럼 굴고, 좀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몇 백 만원의 과외도 불사하지 않는다. 대학들 간의 격차가 몇 백 만원, 몇 천 만원을 들일 정도로 큰 것인가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세계 대학 순위를 보면 몇 몇 대학을 빼놓고는 그 놈이 그 놈이다. 그렇다고 높은 대학을 나오면 좋은 곳에 취직이 잘 되는가하면 이제는 그렇지도 않다. 어느 대학을 나오든지 간에 되는 놈은 된다는 게 우리들의 결론이다. 단, 지역과 수도권이라든지, 4년제와 2년제의 차이 같은 것은 존재하는 것 같다. 그 이외에는 그렇게 큰 차이는 아니라고 본다.

우리나라의 구조상 의대나 포항공대, 카이스트를 나오지 않는 이상, 대학 졸업과 함께 좋은 직장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제2의 시험을 또 패스해야 한다. 사법고시, 임용고시, 행정고시와 같은 고시 시험부터 공무원시험, 언론사 시험, 대기업 적성 검사 등 곳곳에 시험이 가득하다. 입사전쟁을 치루기 위해 우리는 또 사교육의 장으로 발길을 향해야 한다.

이제 중학교도 특수 중학교가 늘어나니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입시시험을 준비하고, 중학교에서는 고입, 고등학교에서는 대입, 대학교에서는 직입(??)... 장장 8세부터 평균 26세까지 이성을 멀리하고 음주가무를 자제하며 책상머리에 죽도록 앉아 책을 파야만 입신양명을 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남겨주고 우리 20대에게 ‘너네는 왜 그렇게 약해 빠졌느냐’고 묻는다면 어불성설이다. 살아남기 위해 갖은 경쟁을 치러 온 우리가 약해 빠졌을 리 없다. 아니면 지친 것이 틀림없다. 이 모든 과정에서 국가가 우리에게 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중학 과정까지의 무상교육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상교육만 해주면 뭘 하나. 급식을 못 먹어 굶은 아이가 태반이고, 무상교육으로 중학교까지 나와 봤자 홀대받기는 마찬가지이다. 이제는 고등학교까지만 나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학력이 언제부터 부(富)를 가늠하는 지표가 되었단 말인가.

게다가 우리에게 사회로의 관심, 사회에의 책임, 정치참여의식, 사회 환원 의식, 국가를 위한 희생정신 등을 강요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국가가 우리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덮어놓고 애국심 운운하며 철이 없다 하겠지만, 우리가 힘들 때 국가는 무엇을 했는지 묻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프랑스에서 존재하는 무상교육과 대학 국립화를 보자. 사회가 청소년, 청년에게 투자하고, 그들이 커서 그 은혜를 사회에 갚는 선투자 후순환 구조가 사회 환원 의식을 정립시킨다. 사회에 빚지고 있기 때문에 내 능력을 사회에 일부나마 기부해야 한다는 인식이 의식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다. IMF 시대를 겪고, 세계불황을 겪으면서 최악의 구직난을 겪고 있는 우리의 의식 저변에는 ‘나 살기도 바쁜데 사회문제까지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겠냐’가 깔려 있다. 연금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부모가 아닌 이상, 사회가 나한테 해 준 것도 없는데 그 많은 연금을 제공하기 위해 우리는 돈을 퍼부어야 하느냐고 물으면 국가는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국민의 의무라고 할 것인가? 나도 말하고 싶다. 국민의 의무를 묻기 전에 국민의 권리부터 보호해 달라고.

국민에게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 “당신은 행복합니까?”라는 질문에 행복하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이상 행복권은 지켜질 수 없다. 계급은 공고화되고 빈부격차는 커질 수밖에 없다. 세대 간 단절은 더욱 격화될 것이다.

연금을 내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국민의 의무를 강요하려면, 국민의 권리와 기본적인 생활에 대해 적극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행복할 수는 있어도 사회적으로는 행복하지 않다. 표현의 자유도 집회의 자유도 탄압되고, 무전유죄라는 말만 되뇌이게 되는 현 상황에 무력감마저 느낄 뿐이다.

대학에 들어오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 같았던 10대의 꿈은 머지않아 산산이 부서졌고, 암울한 미래를 걱정하며 대학생활의 절반을 취업준비에 보냈다. 이력서 한 장에 정리되는 대학생활이 허무해 술을 들이붓기도 했다. 취업시장을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을 켜면 ‘20대는 암울하다. 10대를 기대하자’라는 기사가 뜬다. 흥분할 기운조차 없다. 미래에 사회의 중추가 될 20대가 건강하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혁명이 필요하다. 10대와 20대를 넘어 세대 간 연대를 낳을 수 있는 교육에서의 혁명, 그리고 경제적 혁명까지. 우리는 만화 속 혹은 영화 속 이야기처럼 혁명을 원한다.




고함20의 글이 다음 메인에 노출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