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비보가 날아왔다. 뇌정맥혈전증으로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해있던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결국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다. 한국 민주화와 함께 했던 그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그가 젊었던 시절은 독재의 시대였다. 박정희의 유신 독재, 전두환의 5공화국이라는 격동의 역사를 살았던 그는 민주화의 바람을 가슴에 새기게 되었다. 그리고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그의 삶을 통해 온전히 살아냈다. 유신 독재 하에서 서울대생 국가내란 음모사건에 휘말려 7년 간 수배와 피신 생활을 했고, 83년에는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 결성을 주도해 감옥살이를 밥 먹듯 하게 됐다.

그는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존재다. 특히 독재 정권의 고문 관행을 온 몸으로 밝혀낸 그의 이야기는 한국 근현대사의 아픈 기억이자, 잊어서는 안 될 역사 그 자체다. 85년 9월, 그는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 들어가 23일간 불법 구금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하루 5~6시간씩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하는 와중에도 그는 구체적인 고문 정황을 기억해 진술하고, 스스로 증거를 모으려고 노력해 고문 문제를 공론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해냈다.

 

그가 젊음을 바친 그 꿈은 이루어졌다. 87년 6월 항쟁의 성과로 그가, 그리고 시대가 그렇게도 바라던 정치적 민주화가 성취됐다. 그러나 민주화 투쟁은 그에게 상흔을 남겼다. 비인간적인 고문은 그를 파킨슨병으로 투병하게 했다. 매년 가을이면 ‘고문 몸살’을 앓았고, 또 고문 당시에 남은 트라우마는 그를 지독하게 괴롭혔을 것이다. 당시의 고문관 이근안 전 경감은 지금 목사가 되었다. 그는 <일요신문>과의 2010년 인터뷰에서 “심문도 하나의 예술이다. 나의 행위는 ‘애국’이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사회는 아직까지도 이런 사회다. 고문 가해자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내용의 인터뷰가 용인되는 사회다.

그래서일 것이다. 그의 꿈은 87년에서 끝나지 않았다. 김근태는 생전 자신의 블로그에 “저는 정직한 나라 한국, 평화와 공존의 시금석 한반도시대, 협력과 발전의 새로운 공동체 동아시아연합의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87년 민주화 이후에도 그는 더 높은 민주주의, 더 좋은 사회, 더 많은 평화를 위한 삶을 멈추지 않았다. 정치에 입문한 후 불법정치자금의 관행을 바로잡고자 해 정치자금 양심고백을 하기도 했고,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내는 동안에는 영리병원의 도입을 막고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적극 추진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명복을 빌고, 그가 살아왔던 삶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단순히 망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가 아니다. ‘죽음 앞으로 내몰렸던 마지막 순간까지도 포기할 수 없었던’ 그의 꿈들을 되새기고자 하는 숭고한 의식인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이 시대에 남아있는 수많은 모순들과 문제들이 바뀌어 가기를 바라는 꿈, 그의 꿈은 이제 우리의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