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고함20 기획이었던 ‘관계’의 글 중 하나였던 ‘대학가 선후배 관계 신풍속도(http://goham20.com/157)’에 달린 댓글 중에 재미있는 것이 있었다.

권위주의 | 2009/12/13 00:12 | PERMALINK | EDIT/DEL | REPLY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은 사회공동체 내에서 '평등한' 관계를 지향합니다. 그러나 한두살 혹은 학번 차이로 수직적 상하관계를 만드는 비정상적인 군대식 대학문화가 아직도 공공연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구식적인 권위 있고 '끌어주는' 선배와 순종하며 '따라가는' 후배 관계를 복원하자는 취지의 기사라면 저는 반대하겠습니다. 기사는 후진적인 군사주의 남성주의 대학문화의 관계의 복원을 외치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화 되는 인간들이 맺는 관계에 대해 조명했으면 훨씬 훌륭한 기사가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같은 날, 포털사이트의 메인을 ‘여주 모 대학, 선배들이 후배들 집단구타해 물의’라는 기사들이 채웠다. (기사 원문보기 : http://news.nate.com/view/20091213n02185) 학과의 두 여학생이 심하게 다툰 일이 생기자, 기합이 빠졌다는 이유로 2학년 선배 10여명이 후배 30여명을 체육관으로 불러 얼차려를 가했다는 기사였다. 네티즌들은 이런 기사에 언제나 그렇게 반응하듯이 익명 처리된 대학 알아내기, 학력으로 까고 놀기, 무작정 욕하기 등의 댓글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이런 기사가 나온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던가. 체육대를 필두로 한 예체능계에서는 매년 구타로 인한 사고 소식 - 심지어 과도한 구타로 신입생이 사망하기도 했었다 - 이 들려온다. (이런 일이 지방대에서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지난 해 6월, 연세대 성악과의 ‘얼차려 폭력’ 논란이 인터넷상을 뜨겁게 달구기도 했다.)



'여주 모 대학, 후배들 집단구타해 물의' 기사에 달린 댓글들 (출처 : 네이트)



지난 해 2월 아르바이트포털 알바로(www.albaro.com)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학생의 27.9%가 선배로부터 신체적 피해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예체능계열 뿐만 아니라, 가장 폭력 문제가 덜한 것으로 조사된 상경계열 학생들도 15.3%가 신체적 피해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이 설문 결과는 생각보다 선후배 관계의 폭력 문제가 보편적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주변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학벌의 프레임으로 봤을 때 전혀 하위 계층이 아닌 일부 의대, 치대, 한의대 등에서도 이러한 ‘학과의 관례에 따른’ 기합 혹은 그 이상의 문화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후배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부 예비 의사들에게 내 생명을 맡겨도 되는 거냐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몇 가지 사실들을 통해 알아본 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대학 내의 잘못된 폭력 문화가 학력 수준과 큰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과는 상관없이 보편적이다. ‘폭력’이라는 말이 주는 뉘앙스가 너무 과격한 것이라 내 주변엔 없는 것 같고, 폭력 문화가 일반적이라는 말이 잘 와 닿지 않는가? 그럼 한 번만 생각해 보자. 주변에서 먹기 싫다는 술 마시기를 강요하고, 집에 가야 한다는 후배를 잡으려 하고, 못 나온다는 후배를 술자리에 나오게 하고, - 물론 정말 후배에 대한 애정을 전제하고 장난을 하는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지만 - 과도하게 후배에게 지적하는 선배(이 선배는 자기 자신이 될 수도 있다.)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는가?

본디 ‘폭력’이라는 것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입장에서 규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같은 선배라는 지위가 단순히 ‘먼저 학교를 다니고 있는 사람’ 이상의 권위를 갖는 환경에서는 선배가 보기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행동이 후배에게는 상처와 불만으로 남을 수 있다.

분명히 이러한 폭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매년 많은 언론들이 사건을 잡아내서 사회적 이슈화를 시키려 하는데도 불구하고 문제가 고쳐지지 않고 반복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아마도 아직도 우리나라의 조직 하나 하나,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권위주의적인 문화에 더 익숙하고 게다가 그것을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 지적한 대학은 물론이고, 이러한 권위주의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다.)


학교 폭력의 현장 (출처 : http://news.nate.com/view/20090507n05086)


초등학교 때부터 선도부 선배에게 억울한 벌을 받았던 경험, 학년이 올라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보았던 ‘친구를 때려도 공부를 잘하니 문제가 되지 않았던 사람들’, 그리고 다시 대학교, 군대, 직장을 거치며 권위적 문화는 개인의 뇌 속 깊숙이 박혀버린다. (권위적 문화는 물론, 절차적으로 잘못된 것이 있어도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논리까지 아이들에게 심어주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이다.)

이러한 내면화로 인해 현실의 문제를 느끼면서도 아무도 그것을 깨려고 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1987년 권위주의 정권이 붕괴하고 정치적으로는 민주화가 이루어졌지만, - 물론 작금의 현실은 이 문장이 사실인지를 의심하게 한다. - 사회 전반적으로는 아직도 민주주의 사회를 이끌어갈 힘이 부족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아무도 학교 실내에 들어갈 때 실내화로 갈아 신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아, 운동화 신은 채로 복도로 들어갔다가 (기껏 5살 위였을) 선도부에게 맞았던 일이 생각난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민주적인 대한민국은 점점 멀어져간다는 것이다. 교육 환경도, 개개인의 의식도, 정치도 좀 더 변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을 보았을 때 너무 먼 일처럼 보이니 또 다시 슬프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