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크나이트라이즈 스틸컷.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제공]





다크나이트라이즈 개봉 전 최대의 화두는 과연 놀란이 히스레저의 ‘조커’를 극복할 악역을 찾을 수 있는가 였다. 그리고 개봉 후 기괴한 근육과 그로테스크한 마스크를 쓴 새로운 악역 ‘베인’은 기대만큼이나 뜨거운 논쟁의 한가운데 섰다. ‘베인’ 자체에 대한 분석이 다크나이트라이즈 전체를 다루는 리뷰만큼 만만찮은 논쟁거리였던 것은 '베인'이 그 자체로 ‘조커’와 비교를 넘어선, 철저히 다른 종류의 악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커의 목적이 인간의 그늘을 파헤치고 인간성을 뒤흔드는 데 있다면 베인의 목적은 라스알굴이 주창한 종착지인 인간성의 파괴와 완전한 파괴를 통한 문명의 재건에 있었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방식은 그 자체로 인간의 역동성을 대변하는 ‘혁명’이었다. 이를 상기라도 하듯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혁명의 이념형인 프랑스 혁명을 차용한다. 우리는 풋볼 경기장에서의 폭발에서 테니스 코트의 선언을, 배트맨 무기고 습격은 바스티유 감옥 점거를, 재판장에서 혁명 당시의 공포정치 하의 인민재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개과정의 유사성만으로는 그가 일으킨 ‘혁명’을 설명할 수 없다. 문제의 초점은 베인은 왜 희망을 넘어선 절망의 ‘수단’으로 혁명을 택했는가 이다. 베인이 일으킨 ‘혁명’은 무엇을 배격한 것이었기에 왜 그 혁명이 고담 일부의 무조건적인 복종을 불러왔고 기존 체제를 전복할 수 있었는가. 이 문제는 영화가 상정한 고담의 ‘구체제’가 과연 무엇이었으며 현재 미국 사회에 무엇을 반영했느냐에 따라 충분한 논쟁의 시의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미국에 있어 ‘앙시앵 레짐[각주:1](구체제)’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필자는 여기서 아메리칸 드림과 극단적 신자유주의를 미국의 구체제로 상정하여 논지를 진행하고자 한다.


1. 희망과 절망의 변주, 허구가 된 아메리칸 드림
  “나는 고담시에 희망이란 독극물을 주입한다”

[다크나이트라이즈 스틸컷.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제공]

고담을 점령한 베인의 무기는 외계의 힘이나 특별한 첨단 기계가 아니다. 그의 무기는 사람의 공포를 이용하여 절망을 주입하고 실현가능성 없는 희망을 제시하는 방식 그 자체이다. “나는 고담시에 희망이란 독극물을 주입한다”는 작중의 선언과 같이 베인은 그 방식 자체를 ‘어느 계층’의 ‘어느 인간’들에게나 동등하게 제시한다.

혁명옹호자에게 베인은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는 선동자요 혁명가다. 사회적으로 낙인찍힌 이들이 그의 지지자다. 고아원에서 출소 한 후 받아줄 곳 없는 사회에 등을 돌리고 베인의 하수구로 향하는 청년들, 억압적 지배체계인 하비 덴트 법에 의해 감옥에 갇혀있던 자들의 일부가 바로 그들이다. ‘고담은 이제 너희의 것이다’라는 베인의 선동에 그들은 베인의 혁명과업을 수행한다. 그들에게 혁명이 재생산해내는 무질서나 구시대적 약육강식 세계로의 회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는 더 고차원적인 정화의식이 남아있다. 혁명을 옹호하는 이들에게 ‘앙시앵 레짐’은 그들을 억압한 ‘월가’로 대변된 타락한 자본주의와 양극화, 고착화된 계층체제 자체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혁명은 희망 그 자체이다.

그러나 혁명반대자들에게 베인은 배트맨 이전에 고담이 품고 있었던 '근원적인 악'일 뿐이다. 혁명가인 베인의 지위는 이들에게 있어 '앙시앵 레짐' 그 자체이며 공포이고 절망이다. 그들에게 베인이 지배한 5개월의 시간은 누가 트리거맨(triggerman)[각주:2]인지도 모르는 의심과 약육강식의 죽고 죽이는 절망속의 날들이다. 연방정부는 그들 중 하나라도 영역을 벗어나면 시민을 죽일 작정이지만 시민에게 마음을 굳건히 할 것을 요청하며 거짓 희망을 심고, 시민 또한 그 긴 시간동안 배트맨이 돌아올 것이라는 작은 희망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버티게 만든다.

그러나 베인이 두 가지 집단에 두 개의 ‘앙시앵 레짐’을 재생시켰다 할지라도 두 집단의 결말은 동일하다. 바로 고담의 완전한 파괴이다. 집단이 직면한 앙시앵 레짐이 신자유주의가 불러온 양극화이든 만연한 범죄조직이든 멸망은 동일하다. 그들이 헛된 희망에 굶주린 때 베인은 둘 모두에 거짓 희망을 설파한다. 그것은 배트맨을 무너뜨리고 원형 감옥에 그를 가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절망이 개전되지 않는 상황에서 시민들은 기적 같은 희망만을 바라보다 죽을 운명이다.

‘희망고문’은 위 상황을 빗대기에 지나치게 가벼운 표현이다. 그러나 이 상황은 너무도 익숙하지 않은가. 끊임없는 희망의 주입. 약속 없는 빛의 강조. "무계급 사회와 경제적 번영의 재현, 압제가 없는 자유로운 정치 체제의 영속되는 등의 개념" (출처 : 위키백과) 바로 ‘아메리칸 드림’이다.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적 질서가 단결을 이룬 ‘정신적’ 이루어진 방식이다. 그러나 계층적 이동이 가능했던 대공황시대와는 달리 현재의 미국에 아메리칸 드림은 유효하지 않다. 일례로 지난 달 퓨 자선신탁 (PCT)이 실시한 조사에서 소득 최하위 계층에 속한 사람의 자녀가 이 계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비율이 43%, 소득 최상위 계층에 속한 사람의 자녀가 이 계층에 남아 있는 비율이 4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일보, 미국인, 부모 세대보다 소득 늘어났으나 계층 상승 안돼, 국기연 특파원) 이처럼 이제는 유효하지 않은 아메리칸 드림의 강조는 결코 유리천장[각주:3]의 존재를 말하지 않으며 20:80으로 양극화된 사회의 고착화된 계층 구조를 지적하지도 않는다. 몇몇은 탈리아 알 굴이, 배트맨이 그랬듯이 절망을 딛고서 어둠을 탈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외 절대다수는 상승에 열망을 품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다 원형감옥으로 떨어진다. 이에 베인은 아메리칸 드림을 비틀어 희망을 강조하며 결국 파괴로 모두를 몰아가는 것이다.   


2. 신자유주의가 불러온 탐욕적 자본주의, 그리고 양극화 
 "이곳은 증권 거래소라 가져갈 돈이 없어요."
 "너희들은 증권 거래소에서 없는 돈도 훔쳐가잖아?"

증권거래소를 점령한 베인 [다크나이트라이즈 스틸컷.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제공]


‘아메리칸 드림’이 정신적으로 미국의 신화를 지지하고 있다면 물질적으로 미국을 움직이는 것은 ‘월가’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사조하의 자본주의 질서다. 2011년 反 월가시위와 현재의 유럽위기는 이미 체제의 한계를 노정했고 그 진앙은 여진으로 남아있다. 앞서 베인이 혁명옹호자와 반대자 모두에게 희망을 양날의 칼로 사용하고 장래의 절망의 필연을 강조한 것과 같이 영화 속 혁명의 시발점이 된 증권거래소의 사건도 ‘어느 계층’, ‘어느 인간’에게나 이중적인 해석을 낳을 여지를 가진다.

“너희야말로 돈 훔쳐가는 인간들” 증권거래소의 딜러에게 일갈로 본 베인의 목적은 범죄행위가 잠잠해진 자리를 대체한 금융범죄에 대한 비난이다. 그러나 베인의 혁명은 데거트로 대변되는 자본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월가를 교란하는 그의 행위는 주가를 조작으로 이득을 취하는 자본가의 전횡을 답습한다. 목적과 이반된 방식 때문에 베인은 신자유주의 사조의 양극화를 극복하는 혁명가로서의 모습과 그 뒤로 감춰진 극단적 자본주의의 첨병으로서의 모습 두 가지 모두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배격한 베인의 혁명의 결과가 독점적 자본주의 시대에 나타났던 무제한의 자유와 약육강식의 상황적 한계로 드러난 때 베인의 행위의 아이러니는 극대화되는 것이다. 아이러니는 혼돈이다. 그리고 이 아이러니 자체가 베인이 목적하는 바다. 자본주의를 비난함으로써 현 체제의 불합리성을 역설하고 동시에 이율배반적으로 혁명의 상황까지 필연적 멸망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물론 이 부분, 베인의 목적과 방식의 이중성, 그리고 ‘악’인 베인의 집단과 동일시된 월가 시위자에 대한 표현은 베인을 자신의 페르소나로 활용한 놀란에 대한 사상검증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최후의 전투를 보고 있노라면 놀란의 정치적 견해가 불건전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씨네21. <다크나이트 라이즈> 어떻게 볼 것인가. 장영엽) 그러나 해석의 이중성 자체가 해석이 동반한 각기 다른 모든 입장과 시각의 비판을 불러오는 것을 볼 때, 이렇게 모인 의견들을 다시 영화 내부로 가져가 고담 내부에 제기되었을 법한 혁명 상황으로 치환하면 이 장치는 베인이 의도한 혼돈 상황을 더욱 격화시키는 베인 자신의 파괴력이 된다. 때문에 이 부분의 해석은 놀란에 대한 ‘실망’을 운운하기 이전에 그가 베인과 베인의 ‘혁명’을 통해서 월가로 대변되는 금융자본주의를 ‘문제’로 인식하고 그 사실을 영화를 통해 환기할 뿐이라는 관점으로 한정 짓는 것이 옳다. ‘악’인 베인의 행동이 월가시위대를 연상케 하여 월가 시위를 미국적 질서에 대항하는 악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일차원적 독해에 대한 거절은 놀란이 시사회 직후의 인터뷰에서 이미 표명한 바 있다.

배트맨 시리즈는 상징적이고 신화적인 영화다. 가상의 세계를 다룬 오락영화일 뿐 현실과 관련된 메시지는 없다. 하지만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며 지금 우리를 위협하는 악이 무엇인지,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중앙일보, 왜 다시 배트맨인가? 세상의 악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정현목 기자)



베인을 극복한 배트맨의 해법, 그렇다면 우리의 방향은 무엇인가.

[다크나이트라이즈 스틸컷.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제공]

지금까지 우리는 ‘혁명’과 혁명이 타파해야할 ‘앙시앵 레짐’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주지한 사실로 혁명의 이념형에 베인의 파괴행위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종말을 위해 베인이 차용한 거짓 ‘혁명’의 방식이 완성되지 못했다고 해서 그가 혁명으로 사람들을 이끌기 위해 사용했던 모든 부조리들이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다. 파괴를 목적으로 한 베인의 행위에서 우리는 숙제를 얻는다. 베인이 ‘혁명’을 위해 활용한 ‘고담’의 문제는 지금까지 미국과 서구문명, 그리고 세계의 질서에 널리 퍼진 부조리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놀란은 이 숙제를 인간을 중심으로 한 낭만적 자유주의에서 그 해법을 찾았다.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해법이다. 배트맨은 절망의 나락에서 ‘일어서’ 고담을 구했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아이의 어깨에 담요를 덮어준 한 시민’에게 돌렸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벽을 제거하지 않은 채 계층 상승의 욕구를 부추기며 상대적 박탈감을 조장하는 성공사회의 환상, 신자유주의가 불러온 양극화와 이미 실물을 뛰어넘은 화폐의 힘은 더 이상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고담과 같은 고민 속에 빠진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우리 시대의 배트맨은 과연 누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결코 낭만적으로만은 풀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을 다시 돌아봐야할 때다.

 


 







  1. 프랑스혁명 이전의 절대왕정기의 사회체제를 가리키는 프랑스 말로 당시 절대군주가 소수의 승려, 귀족 등과 결탁하여 인구의 90%를 차지하는 농민과 시민을 억압한 정치질서를 뜻한다. [본문으로]
  2. 방아쇠를 쥔 사람, 암살자. 영화에서는 폭탄을 터뜨리는 고담 시민으로 규정된다. [본문으로]
  3. 여성이나 소수민족 출신자에 대해 고위직 승진을 가로막는 조직 내에 보이지 않는 장벽. 미국의 경제주간지 「월스트리트 저널」이 1980년대 중반, 미국사회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성차별·인종차별을 비판하면서 만들어진 신조어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