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덜대지 말고 노력하라. 고난 속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우리 현대인들이 ‘너’ 혹은 ‘나’에게 하기도 쉽고, 듣기도 쉬운 말이다. 여기서 슬쩍 ‘긍정과 노력’이 녹아있는 우리네 인생을 되짚어보자. 중학교까지의 생활은 차치하더라도, 흔히 공부기계가 된다고들 하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 평소 공부를 하지 않던 친구들도 밤새 공부한다. 물론 힘들게 대학에 와서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취업을 위해서는 일단 큰 학문(大學)은 제쳐주고 스펙도 쌓고, 봉사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취업에 성공한 사람들이라 고난이 없을 것이라는 꿈같은 소리는 아무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야근도 불사한다. 생각보다 참 별 것 없는 인생이다. 한 치의 투덜댐도 용납되지 않은 채, 긍정과 노력의 쳇바퀴 속에서 우리는 빙빙 돌고 있는 것이다.

이 책「긍정의 배신」에서 저자는 ‘투덜댈 시간에 긍정적으로 노력하라’는 극단적 긍정주의가 우리를 어떻게 기만하는지 많은 예시를 통해 밝혀낸다. 재미있는 것은, 저자가 제시한 여러 예시가 한국사회에서도 충분히 적용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고3, 대학생, 직장인의 대다수는 “불만을 억누르고 긍정적으로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을 당연하듯이 받아들인다. 그들은 아무리 힘들고 말도 안 되는 고난이더라도, 그 고난의 순간들이 나 자신을 성찰할 기회라고 여긴다. 대학생은 ‘힘들었던 고3시절이 나를 성숙시켰다’고 말하고, 복학생은 ‘힘들었던 군생활을 통해 나를 성찰했다’고 말한다. 직장인은 심지어 해고를 통해 성숙했노라고 회상한다. 책에 의하면 이러한 긍정적 경향성은 이미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있다. 바로 ‘자본주의’의 확산과 함께 말이다.






자본주의가 농익으면서 우리(혹은 자본가)는 자본주의의 부흥을 위하여 몇 가지 암묵적인 원칙을 세워왔다. 격렬한 경쟁 끝에 남은 엘리트가 성공한다는 원칙, 엘리트가 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노력해야한다는 원칙, 힘든 사회에서 ‘묵묵히’ 노력해 성공한 소수자들을 동경해야한다는 원칙, 성공한 소수가 있었기에 패자는 말이 없어야 한다는 원칙이 바로 그것이다. 이 확고한 원칙들은 우리가 고난을 이겨내는 도중 무언가 불합리한 일에 대하여 항거하려는 찰나에 입을 틀어막는다. 만일 자신이 입을 틀어막지 않는다면, 옆 사람이 친절하게 입을 막아준다. 결국 우리는 고3생활이, 군생활이, 그리고 직장생활이 비인간적이고 비합리적이더라도 잠자코 있어야만 한다. 마치 군사독재시절 같다.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경찰이 아니라 서로서로가 감시자이며 처벌자라는 점이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비합리적이고 비인간적인 상황을 누구든지 개인적 노력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환상’과, 정말로 이겨내는 사람이 극소수밖에 존재하지 않는 ‘현실’의 괴리는 엄청나지만, 사람들은 변혁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어차피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요.’라고 변명한다. 이것은 충격적인 정치·사회적 무기력증이다. 우리가 자랑할 만한 인류의 진보, 예컨대 인권선언이나 노예해방, 여권신장 등은 대부분 시민들의 변혁의지와 행동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런데 진보와 변혁을 맛봤던 인류는 왜 이제 와서 변혁을 포기하고, 자기성찰에만 열광하는가. 문제는 자본이 이끄는 교육에 있다.

대부분의 초등·중학교가 고등학교를 위해, 고등학교는 대학교를 위해, 대학교는 기업을 위해 존재하지 않았던가. 이 시대의 교육은 진정한 목표를 잃었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남을 짓밟아야 올라갈 수 있다는 인식을 주입받으며, 강요된 서열은 무한경쟁을 불렀다. 제도에 대한 불만은 선생의 권위 혹은 성적표의 권위를 통해 억압되었고, 덕분에 자신과 다른 의견을 대화와 타협을 통해 조화시킨다는 민주주의의 정신과 올바른 민주시민을 양성한다는 중등교육의 목적은 그저 구절로만 남아있다. 초중등 교육부터 잘못되었는데, 당연히 고등교육기관인 대학 또한 제대로 되었을 리가 없다. 이제 대학은 그저 취업준비학교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년들에게 사회변혁을 말해보아야 꿈같은 소리에 불과하다. 사회변혁을 외칠 시간에 공부를 하면 그것이 더 이득이라고 생각하며, 개인의 성공을 위해 개인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자랑스러워해야하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문제가 교육이듯 답도 교육이다. 저자는 책 말미에 극단적 긍정주의에 해답으로써 (현실주의와 함께) 방어적 비관주의와 비판적 사고의 교육이 대학에서 이루어져야한다고 말한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필자는 대학교육 이전에 초·중·고교의 교육부터 비판적 사고를 기를 수 있도록 바뀌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초중고교의 교육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한국과 미국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한국의 초중등교육의 목표는 앞서 언급한‘교육의 목표’와 분명히 어긋나있다. 본래 초중등교육이란, 전문인을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대학과는 달리 올바른 민주시민의 양성을 기본적이자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다. 

특히 비판적 사고력을 기르기 위해 상대방의 의견을 듣고, 내 의견을 이야기하게 하는 제대로 된 정치교육이 시급하다. 그러나 올바른 민주시민이 되기 위해, 나아가 비판적 사고를 표현하기 위해 무엇보다 올바르게 진행돼야 할 ‘정치교육’은 한국의 어느 중·고등학교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과목이 있긴 하나,사실상 현재의 정치교과는‘법과사회’에 편입되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로 헌법의 내용에만 충실하다.

자고로 정치교육의 목적은 민주사회의 시민으로써 타인과 토론을 할 수 있고, 사회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고력을 배양하는 것이 아닌가. 정치적 사고력의 배양은커녕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정치로부터 눈과 귀를 막아놓고서, 성인이 되는 순간부터‘이제 어른이니까, 너의 정치적 생각을 펼쳐라’라는 것은 수많은 청년에 대한 기만이다.



 

무엇이 진정으로 학교 본연의 역할인지 떠올린다면, 또한 무엇이 진정한 민주시민을 양성하여 또 한 번의 진보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인지 깨닫는다면, 우리는 교육의 개혁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물론, 개혁된 교육이 우리에게 어떤 무기를 가져다 줄 것인지는 말 하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긍정의 파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불합리한 것에 투덜대는 사람이 조금씩 보인다. 그들은 계속해서 투덜댄다. ‘왜 항상 웃지 않으면 해고당해야 하지?’, ‘왜 군대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아야하지?’, ‘왜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 안 되지?’라고 묻는 그들을 보며 우리는 얼굴을 찌푸려왔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비판적 사고라는 무기를 들었다면, 이제 그들을 다르게 바라보아야 한다. 투덜거림 속에 숨어있는 비판을 찾아내고, 불합리한 사회에 대해 의문을 품자. 투덜거림을 살펴보면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신선한 의문을 제시하는 투덜거림. 이제는 긍정의 미학이 아닌, 투덜거림의 미학을 권해보는 것이 어떨까. 나 자신은 물론 미래의 꿈나무들에게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