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함20의 새로운 연재, 독립기념일!

성인이 된 20대가 왜 독립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독립기념일'은 가상의 화자 '나'가 부모님의 품을 떠나 독립하면서 겪는 일들을 다루는 연재 소설입니다. '나'의 독립 스토리를 통해 20대의 독립에 필요한 정보들을 전달하고, 20대의 독립에 대한 고민을 유도하고자 합니다.




“에...... 그럼 한 주에 한 번씩 조별로 발표해야 되니까...... 대학생들이고 하니, 내가 굳이 조까지 나눠줄 필요는 없겠지? 둘, 넷, 여섯.... 각자 다섯 명이나 네 명씩 알아서 조별로 앉아보세요.”

헉, 망했다. 아르바이트 시간 때문에 도무지 맞는 시간이 없어 혼자 넣은 국문과 전공인데, 강의계획서에는 쓰여 있지도 않았던 조별 과제에다가 알아서 조를 짜라니! 다른 과 학생들, 특히 나처럼 혼자 듣는 학생 몇몇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국문과 학생들은 으레 이런 수업인 것을 알고 있었던 듯, 즐겁게 손을 흔들고 재잘대며 저이들끼리 자리를 이리저리 옮기는 것이었다. 어, 이거 이러다가 완전 나가리되는 거 아냐? 국문과 수업 들어본 적도 없는데...... 넋 놓고 큰일 나겠는데?!

“저희랑 같은 조 하실래요?”

어찌해야 하나 눈만 껌벅거리면서 두리번대고 있는데, 얼굴이 새하얀 여자애 하나랑 동그란 안경을 낀 남자애가 와서 먼저 물어본다. 물어보나마나죠. 감사합니다. 우린 이제 같은 배를 탄 거에요. 먼저 말 걸어주셔서 감사해요.

얼굴이 하얀 여자애와 동그란 안경을 낀 남자애는 다행히도 국문과 학생이었다. 그리고 그 둘과 머리에 스프레이를 잔뜩 뿌린 중국인 유학생 한 명과 나, 이렇게 네 명이 한 조가 되었다. 중국인 유학생이 한국말을 어느 정도 알아들을까 생각하고 있던 찰나, 어? 국문과 애들 둘이 갑자기 손을 책상 밑으로 사삭 잡더니 눈을 마주치고는 헤실대며 웃는다. 뭐야, 얘네 커플이었어?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이름이...... 아, 승원씨? 승원씨가 조장하면 되겠네요~ 잘 어울려요~ 딱 조장감인 것 같아요~”
“아, 다음 모임요...... 근데 저희 지금 급한 일 때문에 가봐야해서...... 다음 모임은 카톡으로 시간 정하죠. 괜찮죠?”

 나머지 셋이 웃으면서 끄덕이는 통에 얼떨결에 조장이 되고, 커플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래, 오늘은 바쁜 일이 있나보지...... 불길한 느낌을 애써 떨치려고 노력하며, 가방을 싸서 나오는데 같은 조인 중국인 유학생이 복도에서 저기요, 하며 갑자기 붙잡는다. 한마디도 안 하길래 한국말 아예 못하는 줄 알았는데, 발음 꽤 괜찮네?

“저기요, 제가 한국말 잘 못해요.... sorry, sorry. 한국말 잘 못해요. 죄, 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느 즈금이 믗시으... 쁠리 드르그르....(너 지금이 몇 시야? 빨리 들어가라)”

 조별과제의 충격에 정신을 놓고 있다가 피자집 아르바이트 시간에 20분이나 늦었다. 매니저 누나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소리를 죽여 말했다. 한참 바쁜 시간이라 손님들이 많아서 그런지 입은 그대로 웃고 있는데, 눈이 하나도 안 웃고 있으니 정말 무서웠다. 아, 알바하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이렇게 많이 지각한 적은 없었는데, 오늘 일진 왜 이러지. 재빨리 직원실로 들어가서 허겁지겁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여기 샐러드 접시 좀 새로 갖다 주세요.”“티슈도 좀 주세요.”
“아, 포크를 바닥에 떨어뜨렸는데 새 것 좀 갖다주세요.”

 한꺼번에 시키면 좋은데 꼭 이렇게 하나하나씩 시키는 손님들이 있다. 벌써 이 손님한테만 세 번이나 왔다갔다했다. 이제 한동안 안 부르겠지, 하면서 뒤돌아서서 다른 테이블로 가는 순간, 또 그 손님이 부른다. 

“저기요, 여기 이거 까만 거 뭐에요? 탄 거 아니에요? 네? 아, 올리브에요? 아닌데? 탄 것 같은데? 헐, 진짜 올리브네? 아니, 왜 이렇게 이상하게 잘라서 올렸어요. 탄 것 같아 보이잖아요, 진짜.”

 민망해서 그런지 괜한 억지를 부린다. 참 피곤하다, 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내쉬는 순간, 손님이 도끼눈을 뜨고 쳐다본다.

“아니 표정이 왜 그래요? 지금 기분 나쁘다는 거야 뭐야?”
 
알바생도 사람인데, 짜증날 때는 표정관리가 안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이 손님한테 그런 식으로 맞받아쳤다가는 정말 일이 커질 것 같았다. 가슴 속으로는 억울함이 치밀었지만 꾹꾹 눌러 참고 연신 죄송합니다, 오해가 있으셨나봅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손님도 보통은 아니었다. 목소리 데시벨이 몇 옥타브가 올라가더니 급기야 ‘매니저 나와!’ 마법의 주문을 시전했다.

결국 매니저 누나까지 와서 고개를 조아렸다. 손님은 알바생 교육을 똑바로 시키라느니, 이런 데서 알바나 하는 애들은 인성이 덜 되었다느니 삿대질을 해가면서 별별 폭언을 다 퍼붓고는 피자값을 내지 않고는 나갔다. 본사 홈페이지에 불만접수를 하겠다는 말도 잊지 않고. 한바탕 난리가 지나가자 매니저 누나도 다른 알바생들도 모두 진이 빠진 모양이었다. 창피하고 억울하고 화가 나서 얼굴이 너무 뜨거웠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목이 메이는 걸 들키기 싫어 씹어뱉듯이 말하고는 화장실로 도망쳐왔다. 뜨거운 얼굴을 식히려 찬 물로 세수를 했다. 찬 물이 얼굴에 닿자 표면의 온도는 식는 것 같았지만, 가슴 속에 얹힌 뜨거운 것은 쉽게 내려가지 않았다. 거울 속의 내 얼굴에 줄줄 흘러내리는 것이 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피크타임이다. 빨리 다시 나가서 내 몫을 해야 했다. 어쨌든 정해진 시간이 지나야 알바가 끝나고 고시원 내 방에 가서 마저 울든 없던 일처럼 고단하게 잠들든 할 수 있다. 오늘 참, 피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