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함20의 새로운 연재, 독립기념일!

성인이 된 20대가 왜 독립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독립기념일'은 가상의 화자 '나'가 부모님의 품을 떠나 독립하면서 겪는 일들을 다루는 연재 소설입니다. '나'의 독립 스토리를 통해 20대의 독립에 필요한 정보들을 전달하고, 20대의 독립에 대한 고민을 유도하고자 합니다.



채영이는 먼저 뭔가 하고 싶단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내가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참 요즘 애들스럽지가 않게도. 사귀기 전에는 별로 친하지 않아서 그러나,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사실 연애는커녕 여자애랑 얘기하는 것도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지라, 처음에는 내가 불편한가 걱정도 많이 했다. 언젠가 지나가듯 물어보니, 별거 아니란 말투로 말했다.


“그냥...... 어릴 때부터 그랬어. 원래 하고 싶은 것도 별로 없구....... 없다기보다는 어차피 떼를 써봤자 안되는 걸 아니까? 습관인가, 이것두?”


아...... 채영이네 집 형편이 그다지 좋지 못하단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언뜻언뜻 듣는 이야기로는 아버지가 채영이 어릴 때부터 아프셔서 일을 못하고 계신 것 같았다.


“왜, 오빠네도 비슷하잖아. 그냥저냥, 비슷비슷한......”
 

채영이는 아마 우리집도 형편이 어려워서 내가 알바를 길게 하고 고시원에서 방값에 벌벌 떨어가며 사는 걸로 생각한 모양이다. 굳이 아니라고 하기도 뭐하고, 사실, 전부터 채영이한테 독립이니, 어른이니 하는 말을 꺼내기는 좀 껄끄러웠다. 혹시라도 복에 겨워한다고 생각할까봐 겁이 났다. 갑자기 내가 기만적인 인간이 된 것 같았다. 어깨가 묵직했다. 작은 손이 부드러워 가슴이 찡했다.


“오빠, 저 영화 진짜 재밌대. 내 친구가 어제 봤는데 평도 엄청 좋구......”


좀체 뭘 하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없는 채영이가, 콕 집어서 ‘저 영화’를 보고 싶단다.

 

“그래? 그럼 저거 보러가자! 다음주 월요일 오전에 저거 보구 점심 먹구 딱 알바하러 같이 가면 되겠는데, 어때? 내가 쏠게!”

“와, 진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집에 들어와서 생각을 해보니 아뿔싸, 월급날이 가까워져서 수중에 돈이 없었다. 아, 연애그렇다고 얘가 날 뜯어먹는 것도 아닌데...... 사실 채영이네 집 사정을 뻔히 짐작하면서 항상 5:5로 내게 하는 것도 왠지 미안했다. 누굴 만나지만 않으면 고시원에서 라면만 끓여먹으면 되니까 다음 주 월요일까지는 4천원으로 버틸 수 있는데, 버틴다 해도 만나서 영화 보기로 한 건데 도저히 표 값이 나올 구멍이 없었다. 주말에 집에 가서 엄마한테 용돈 좀 달라고 해볼까......? 아, 독립하면서 용돈 안 받겠다는 다짐을 했는데.

 

다행인지, 채영이는 추석 밑이라 이번주부터 주말에 대형마트에서 행사 알바를 하게 되었다고, 주말에는 못 만날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아쉽다 ㅠㅠ 일 쉬엄쉬엄 해’ 라고 보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돈이 없으니 사람이 자꾸 구차해진다. 채영이에게 ‘웅웅 ㅠㅠ 주말에 못보니까 월욜에 꼭 보자!’ 라는 답장이 왔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또 나왔다.

 

“채영아, 우리 저기서 잠깐 헌혈 하고 갈까?”

“헌혈? 왜?”

“음...... 그러면 영화표 준대.”

 


채영이는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헌혈카페 안으로 순순히 같이 들어와 주었다. 나는 그 전에도 헌혈하러 몇 번 와봤지만, 채영이는 헌혈이 처음이라고 했다.

“유채영씨는 헌혈 못하시겠네요. 평소에 빈혈 있으시죠? 젊은 여성분들은 이런 경우 많으니 평소에 철분제 드시는 것도 좋아요.”

나 혼자 주사바늘을 팔에 꽂고 멍하니 누워 ‘나 혼자 하면 영화표도 한 장만 줄텐데......어쩌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빈혈이라니, 잘 못먹고 일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 거 아닌가? 돈만 많으면 맛있는 것도 많이 사줄 텐데...... 휴...... 철분제는 비쌀까? 다음 달 월급 받으면 그거부터 사줘야겠다! 그 때 밖에서 기다리던 채영이에게 카톡이 왔다.

 
'
나 오늘 그냥 먼저 갈래’ 

헌혈이 끝나자마자 헐레벌떡 뛰어나가니 채영이는 이미 가고 없었다. 전화를 몇 번이나 걸어도 받지 않았고, 급기야 마지막에는 통화음이 가던 중간에 핸드폰을 꺼버린 것 같았다. 아, 왜 이렇게 됐지......고시원으로 돌아와 멍하니 누워 있다가 점심도 먹지 않고 피자가게로 갔다. 채영이는 나보다 먼저 와서 벌써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뒤였다. 가게에는 우리가 사귀는 걸 비밀로 하기로 해서, 채영이는 평소에도 딱히 아는 척을 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더 냉랭한 것 같았다. 알바 내내 눈이라도 한 번 마주쳐 볼까 호시탐탐 쳐다보았지만, 어쩜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렸는지 우연히도 눈길이 한 번 얽히지 않는 것이었다. 서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채영아, 미안해.....”

“...... 뭐가 미안해? 미안할 게 뭐 있어?”

“그냥..... 그냥 다 미안해.”

“미안할 거 없다니까...... 그냥 기분이 좀 안좋아서 그랬어. 휴, 내가 미안해.”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도대체 어떡해야 하지? 솔직히 뭐가 잘못된 건지 잘 모르겠는데, 여자친구는 여전히 화가 나 있다. 나 때문에 화가 난 것 같은데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다시 웃게 하지? 그렇지만 괜히 어줍잖게 분위기를 바꿀 엄두도 나지 않았다.

 

“오빠도......후...... 우리집 형편 대충 알지? 나 근데 궁상맞은 건 싫어. 이거 이해 못할 수 있는데, 그래두, 그냥. 아까 거기 혼자 앉아 있는데 순간적으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진짜 아닌 말로 피 팔아서......자격지심일 수도 있어. 근데, 그냥 난 그랬어.”

 

채영이는 집 얘기나 돈 얘기를 하는 걸 꺼려했고, 나도 채영이가 싫어하는 건 하고 싶지 않아서, 우린 이런 얘기를 직접적으로 꺼내 본 적이 없었다. 아마 가볍게 얘기할 수 없었던 만큼, 더 신경 쓰고 있는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애써 모른 척 한 거였겠지, 우리 둘 다.

 

침묵 속에서 어색하게 채영이를 바래다주고 난 그 날 이후, 우리는 어째 서로 계속 일정이 엇갈려서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카톡은 했지만, 어쩌면 둘 다 서로 피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사실 만난다 해도 아직 월급이 안 들어와서 커피 한 잔 마시자 할 돈도 없었고. 사실 돈 없어도 재밌게 지낼 수 있지만, 그 마지막 만남이...... 아, 모르겠다.

 

"아니, 추석에 집에 안 온다니 무슨 소리야?"

 

엄마한테 오랜만에 전화해서 이런 소리나 하는 아들이라 죄송스러웠지만, 계획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전화기 너머로 아버지가 화내시는 소리가 들렸다. 저눔시끼 저거! 집에를 왜 안 와! 오지 말라고 해!

 

"아, 과제가 많아서 못 내려간다니까. 네. 아, 전공이라 중요해. 추석 연휴 끝나고 바로 내야한다니까? 몰라, 교수님이 그렇게 하라는데 어떡해? 아, 조별 과제라 다른 사람들도 다 추석 때밖에 시간 안 맞아서 그 때 같이 하기로 한 건데 어떻게 나만 빠져? 무슨 뻥이야, 뻥은, 엄만 진짜."

 

사실은 뻥이 맞았다. 추석 동안 단기 알바를 하기로 했다. 알바찾기 사이트에 20대, 남자, 를 체크하고 추석알바를 치니 제일 위에 나오는 것이 바로 택배 상하차 알바였다. 저녁 7시부터 아침 7시까지 12시간 일하고 일당 9만원. 만약 추석 연휴 3일 내내 일하면 27만원. 이 돈이면 영화를 둘이 열 번도 넘게 볼 수 있다. 아, 그 놈의 영화.

정우형도 추석에 집에 안간다길래, 단기 알바 얘기를 해줬더니 선뜻 같이 가자고 한다. 형 요즘 돈 필요하세요? 물었더니, 평소라면 몰라도 명절에는 집에 안간지 오래라고 멋쩍게 웃는다.


"나 그 공무원 시험 준비한다고 몇 년 보냈잖냐. 공부할 때는 공부한다고 안 갔고, 공부 그만하기로 하고 나서는 눈치 보이기도 하고, 사실 무서워서 못 가겠더라. 우리 부모님이야 뭐 속이야 어떠신지 몰라도 별 말씀 안하시는데, 친척 어른들이야 그런가. 우리 집에서 사실 대학 간 사람이 나 말고 몇 없거든. 근데 뭐 이래저래 몇 년이나 빌빌대고 있으니, 한심해 보이겠지. 가봤자 기분만 나빠져서, 그냥 안간지 꽤 됐어."


친척들은 어딜 가나 비슷한 모양이었다. 수능을 치고 생각보다 점수가 안나와 의기소침하던 때에 맞이한 설날, 친척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어디에 원서를 넣었는지 물어보고는 "너 공부 잘한다고 하지 않았냐? 허." 하던 작은삼촌의 표정이 떠올랐다.

정우형과 미리 만나서 느긋하게 지정된 택배 집하장으로 향했다. 거기엔 늙수그레한 아저씨도 있었고, 우리처럼 두셋씩 같이 온 딱 대학생처럼 보이는 애들도 많았다. 30대 정도의 남자가 나와서, 간단하게 일을 설명해주고 일당이 얼마인지 말해주었다. 추석이라 물량이 많으니 부지런히 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빨리 할수록 빨리 갈 수 있다고 했다. 옆에 아저씨는 몇 번 경험이 있는지 "빨리 끝나긴, 니미" 라고 중얼거렸지만. 담당자는 마지막으로 중간에 시간 다 못채우고 그만두면 돈은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하면서, 가려면 지금 가라고 했지만, 사실 여기서 누가 힘들 것 같으니까 전 집에 갈래요, 하겠는가? 남자 자존심이 있지.

정우형과 나는 집하장으로 물건을 싣고 온 트럭에서 물건을 내려 컨베이어 벨트 위로 옮기는 하차 일을 하게 되었다. 처음 트럭엔 휴지만 들어있었다. 물건이 가벼워서 그런지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깨질 염려도 없으니 레일 위로 휙휙 던졌다. 정우형도 신이 나는지, 야, 이거 완전 꿀알바인데? 우리 이참에 이쪽으로 이직할까? 하며 웃고 떠들었다. 다음 11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두 번째 트럭 문을 열자, 우리를 반겨준 것은 1.5리터 들이 생수 묶음이었다. 아직 힘이 많이 남아있어서 처음엔 그럭저럭 잘 들어서 옮겼지만, 20번째 묶음을 들 때쯤엔 내 입에선 신음소리가, 정우형 입에서는 쌍욕이 터져 나왔다. 과일 통조림 박스와 포도즙, 배즙 박스, 김치박스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팔뚝이랑 허리가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정우형과 나는 어느새 말이 없어졌고 입에서는 헐떡거리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아까 그 담당자가 우리 쪽으로 와서 "아니 지금 뭣들 하는 거야, 수놓고 있어? 정신 차리고 빨리빨리 해!" 하고 소리를 질렀다. 네가 와서 한 번 해봐라, 소리가 턱까지 차올랐지만 아직 그 정도로 정신줄을 놓은 것은 아니어서 꾹 참고 통조림박스를 레일 위로 던졌다. 밥을 12시에 먹는다고 했으니, 그때까지만 어찌어찌 버티자, 생각을 하고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아직 10시밖에 안된 것이었다. 근래 들어 이렇게나 구체적인 절망감은 없었다.

12시가 되자 정우형과 제일 먼저 뛰어가서 밥을 먹고, 줄을 서서 밥을 한 번 더 먹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팔에는 벌써 언제 생겼는지 모를 생채기들이 많이 나 있었다. 잠시 다리 뻗고 앉아있기가 무섭게, 담당자가 와서 밥 다 먹었으면 다음 차 물건 내리란다. 울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엉덩이가 천근은 되는 것 같았다.

 너무 힘들어서 사실 상품의 안전은 생각도 못하고 웬만한 것들은 다 레일 위로 던질 수밖에 없었다. 티셔츠가 마치 비라도 맞은 것처럼 푹 젖었고 얼굴에 땀이 말 그대로 줄줄 흘러 턱 밑으로 뚝뚝 떨어졌지만 닦을 정신도 힘도 없었다. 채영이고 뭐고 생각도 안나고 정말 그냥 딱 누워서 눈 감고 자고 싶었다. 이성이 점점 희미해져서 '사람들은 왜 집에서 배추를 안 키워먹고 배달시켜 먹는 거냐.' 이런 생각까지 했다. 정우형도 비슷했는지 옆에서 40kg짜리 쌀 포대를 질질 끌어 던지면서 "아 이런 쌀같은! 쌀 포대!" 하면서 울부짖고 있었다.

목이 너무 말라서 정수기로 물을 마시러 가자, 담당자의 욕이 바로 날아온다. "야, 너 임마, 자꾸 그렇게 뺑이 칠래! 빨리 자리로 안가?" 물도 마시고 욕도 먹고 배부르게 자리로 돌아갔다. 오장육부가 빠질 것 같이 힘들었다. 머리가 띵했다. 시간은 어쨌거나 갔다. 이제 돈이고 뭐고 빨리 그만하고 가고 싶다, 지금이라도 갈까, 아, 아까 담당자가 집에 가랄 때 갈 걸, 진짜 죽을지도 몰라, 진짜 죽을 거야,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제 끝났다고 알려왔다. 어디서 왔는지 커다란 나방이 팔에 붙었는데 뗄 힘도 없어서 그냥 두고 휘적휘적 가니 알아서 날아갔다. 하늘엔 아침 해가 아물아물 떠오르고 있었다.

고시원에 도착하자마자 샤워고 뭐고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 문득 핸드폰 진동 소리에 일어나니, 사방이 어두웠다. 한 12시간은 잔 것 같았다. 발신자를 보니 채영이, 받으려는 찰나 끊어진다. 부재중 전화가 어제 저녁부터 20통이 와 있었다. 카톡이랑 문자도 엄청 많이 와 있었다.

 

[오빠 왜 전화 안 받아]

[이거 보면 빨리 연락줘]

[전화 아직도 안 받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걱정된단 말야. 빨리 연락줘!]

[혹시 어디 아파?]

[오빠 1시간 안에 연락 안 주면 경찰에 신고할거야]


이 카톡 메시지는 허구입니다.


 

30분 전에 보낸 카톡을 보고 깜짝 놀라서 재빨리 채영이한테 전화를 걸었다. 채영이는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많이 놀랐는지 내가 멀쩡한 것을 재차 물어보고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아, 생각해보니 오랜만에 전화 통화다. 갑자기 둘 다 말이 없이,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

"........"

"오빠" "채영아"

 

서로 먼저 말하라고 실갱이를 좀 하다가, 결국 내가 이겼다. 채영이는 잠시 망설이더니 "내일 시간 돼?"하고 묻는다. 절대 NO라고 말할 수 없는 제안. 원래는 연휴 내내 택배 하차 알바를 하려고 했지만, 오늘 하루 일해보고 도저히 계속할 엄두가 나지 않았으니, 시간은 많았다. 알바비는 당일 지급이라 했으니, 통장에는 그래도 9만원이 있을 것이다. 정우형에게 살아계십니까, 하는 문자를 하나 보내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거의 일주일만에 만난 채영이는 좀 야윈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마른 편인데, 좀 더 피곤해보이기도 했고. 안쓰러웠다. 사실, 고작 일주일인데 좀 어색했다. 채영이도 이런 분위기를 느꼈는지, 착하게도 일부러 장난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오빠, 나 오랜만에 봤다고 낯가리는거야?"

"어? 아, 아냐... 오랜만에 보니까 더 이쁘다."

 

아, 나 좀 찌질이처럼 말한 것 같다. 그래도 채영이는 이런 내가 뭐 좋다고 샐쭉 웃어주었다. 서로 쳐다보며 웃다보니 어느새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옛날처럼 친밀한 분위기로 돌아가 있었다. 갑자기 채영이가 내 손을 제 눈앞에 가져다 자세히 본다.

 

"오빠, 손이 왜 이래? 다친거야?"

"어? 아...... 아냐. 그냥 좀 넘어졌어. 헤헤."

"넘어졌는데 손등은 왜 까져, 어머, 소매 좀 걷어 봐."

 

채영이는 연신 어머, 를 연발하며 내 팔뚝에 난 상처를 보고 말았다. 난 솔직하게 택배 하차 단기 알바를 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전화도 못 받은 거라고, 미안하다고, 그래도 하루 고생하구 돈 되게 많이 벌었다? 하고 머리를 슥 긁으며 가볍게 말했다. 채영이가 아무 말이 없어 슬쩍 눈치를 보니, 어라,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오빠, 그 날 내가 이상하게 굴어서...... 맘에 담아두고 있었지. 이렇게 고생하고..... 많이 아프지? 미안해."

 

어, 정말 여자애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 울어? 채영아? 나 좀 봐 봐. 고개 좀 들어봐, 아 어떡하지, 채영아, 우리 여, 영화 보러 갈까?" 내가 어쩔 줄 몰라하며 허둥지둥 하니까, 채영이가 울다가 피식 웃는다. 울어서 그런지 얼굴이 더 말갛게 보였다.  

"그래, 영화 보러 가자. 에이, 그 놈의 영화."

웃는 얼굴을 보니 안심이 되어 '너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하면서 농을 던지니 채영이가 더 크게 웃으며 뭐야아, 하고 어깨를 팡팡 친다. 아, 좀 아프다. 어제 알바 때문에 근육통이..... 좀 오바해서 엄살을 부리자 이번엔 채영이가 "맞다, 오빠 아프지. 괜찮아? 많이 아파? 아, 파스, 파스 안붙여도 되겠어?" 허둥지둥 거린다. 둘이 눈이 딱 마주치고는 하하 웃었다.

 

"오빠가 영화표 살게!"

"아냐, 그러지마. 나도 추석알바 했단 말야. 아니다, 그럼 오빠가 나 사주고 내가 오빠 표 사줄게!"

"아냐, 내 표 살 필요 없어. 난 그 날 헌혈하고 받은 영화표 쓸 거야. 넌 못 받았겠지만~"

"아, 진짜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