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어원 표준어국어사전에 따르면 ‘성희롱’이란 “이성에게 상대편의 의사와 관계없이 성적으로 수치심을 주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일. 또는 그 말이나 행동”을 의미한다. ‘이성에게’라는 단서는 성희롱이 ‘동성에게’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전제함을 의미한다.

국립국어원 표준어국어사전 '성희롱' 검색 화면 갈무리ⓒ고함20


국립국어원의 설명에 따르면 표준어국어사전에서 ‘성폭행’이란 “강간과 동의어로 폭행 또는 협박 따위의 불법적인 수단으로 부녀자를 간음(부부가 아닌 남녀가 성관계를 맺음)함”을 의미하며, ‘성범죄’란 “강간ㆍ강제 추행 따위의, 성(남녀의 육체적 관계. 또는 그에 관련된 일)에 관련된 범죄”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성과 관련된  어휘들에 ‘이성 간’ 또는 ‘남녀 간’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있는 이유를 국립국어원에 질의하자, 국립국어원측은 “사전에서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의미와 쓰임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라고 답변했다.

하지만 국립국어원의 설명처럼 성희롱과 성폭행, 성범죄에서는 ‘이성 간’에 발생하는 것이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현상일까. 이에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는 2011년 배포한 성희롱 예방 지침서 ‘성희롱, 모르고 당하셨나요? 알고도 참으셨나요?’에서 동성 간에도 성희롱이 발생한다고 명시한다. 해당 성희롱 예방 지침서를 통해 인권위는 “성희롱은 남성과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과 남성, 여성과 여성 간에도 일어날 수 있”다며 동성 간에 성희롱도 분명한 문제임을 지적한다.

국가인권위원회법 제2조 3항에 따르면 성희롱은 “직위를 이용하여 또는 업무 등과 관련하여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성적 언동 또는 그 밖의 요구 등에 따르지 아니한다는 이유로 고용상의 불이익을 주는 행위”를 말한다. 표준어국어사전의 의미와 비슷하지만, 뒤에 “고용상의 불이익”이 첨언 된 정도의 차이가 있다. 요지는 비슷한 의미를 두고 국립국어원은 ‘이성 간’에만 성희롱이 발생한다고 전제하는 반면, 인권위는 상대의 성별과는 무관하게 성적 수치심과 굴욕감을 느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작한 성희롱 예방지침서 첫 페이지 갈무리ⓒ고함20

 
실제로 성희롱과 성폭행을 비롯한 성범죄는 동성과 이성의 구분 없이 발생한다. 2011년 여성가족부가 조사한 ‘청소년유해환경접촉종합실태조사’에 따르면 전체 성폭력 피해자의 32.1%는 동성에 의해 성폭력 피해를 본 것으로 나타났다. 해당 조사에서 피해를 경험한 응답자들은 강간(50.3%), 성추행(22.6%), 성희롱(27.1%)을 당했다고 답했다. 이는 국립국어원의 설명처럼 성희롱, 성폭력과 같은 성범죄가 ‘보편적이고 일반적’으로 ‘이성 간’에만 나타나는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는 점을 의미한다.

특히 동성 간의 성희롱과 성폭력 등의 성범죄는 성 소수자들에게 당면한 ‘현실’의 문제다. 학창시절에는 동급생 학우들에게 성 소수자라는 이유로. 이후에는 군대의 집단적인 폐쇄성 속에서보다 동성 간 성범죄에 직접 노출된다. 그러나 성희롱과 성폭행, 성범죄가 ‘보편적이고 일반적으로’ ‘이성 간’에만 발생한다고 서술한 국립국어원의 설명은, 사회에서 동성 간의 성범죄를 인식하는 것과 현실간의 괴리를 보여준다. 이런 인식 위에서 동성 간의 성범죄 피해자들이 보호받기란 쉽지 않다. 아니 동성 간에 성희롱이나 성폭행이 발생했다고 인정받기조차 어렵다.

국립국어원은 지난해 11월 ‘애정’, ‘연애’ 등 어휘의 의미에서, 기존에 있던 ‘남녀 또는 이성 간’이라는 단서를 빼고 ‘서로’라는 설명을 더해 의미를 개정한 바 있다. 당시 의미개정 결정은 성적 소수자들을 존중하고자 하는 의견을 국립국어원이 수렴한 결과였다.(관련기사 보기) ‘사랑’은 남녀에 상관없이 모두가 할 수 있는 세상의 밑그림을 그려준 국립국어원이, 성희롱과 성폭력, 성범죄는 이성 간에만 발생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모순이다. 사랑은 아무나할 수 있고, 성범죄는 남녀유별 난 건가.

국립국어원 홈페이지 갈무리 ⓒ고함20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고 말했다. 이는 언어가 단순히 인간 삶의 수단이 아니라 인간 사유의 반영이자 실존의 대상임을 의미한다. 즉 언어란 사회문화를 반영하고, 때로는 그 자체를 대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립국어원에서 정의하고 있는 ‘성희롱’, ‘성폭행’, ‘성범죄’ 등은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이성에게’라는 단서를 두어 성적 소수자들이 받는 피해를 굳이 외면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국립국어원은 작년 11월의 의미 있는 변화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