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거슬러 600년 전, 역사에 길이 남을 ‘언어배틀’이 있었다. 이방원과 정몽주가 벌인 ‘시조배틀’이 바로 그것이다. 이성계는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위해 아들 이방원으로 하여금 고려의 대신 정몽주를 설득하라고 명한다. 이방원은 정몽주에게 ‘하여가(何如歌)’를 읊어 정몽주가 고려를 단념하도록 권한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 교과서에서 배웠듯이, 고려의 충신 정몽주는 이방원에게 ‘단심가(丹心歌)’로 답하며 고려에 대한 본인의 마음이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을 확인시켜준다.


시제를  현재로 돌려보자. 또 다른 언어배틀에 대한 포털의 검색 순위와 유투브, SNS의 반응이 뜨겁다. 유명 랩퍼들이 가세한 ‘랩배틀’ 때문이다. 방송에 나와서 흥겨운 힙합 음악을 부르거나 공연장에서 랩을 노래하던 이들이 서로에게 ‘디스’를 하는 모습은 대중에게 분명 흥미롭다. 그러나 이방원과 정몽주의 시조배틀과 오늘날 랩배틀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이 틈새는 랩과 시조라는 형식의 차이로 웃고 지나치기는 힘들다.

시조 배틀과 달리 랩배틀은 단지 불평불만을 토로하거나 상대에게 비판을 가하는 선을 벗어나곤 한다. 랩배틀은 종종 풍자를 넘어 상대에 대한 경멸의 언어를 사용한다. 혹자는 말한다. 랩배틀에 사용되는 ‘디스(Diss)’란 단어가 ‘disrespect’에서 출발했기에, 또는 이 모든 경멸과 저속한 비난이 모두 힙합의 역사이자 문화이기 때문에 이해하기를 요구한다. ‘랩배틀을 도덕과 윤리로서가 아닌 문화와 예술로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힙합 칼럼니스트 김봉현의 주장은 그런 '요구'의 뉘앙스를 느끼게 한다.

랩배틀에서 통용되는 '디스'는 상대에 대한 경멸의 언어로 상대를 헐뜯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디스'라는 그 넓은 범위 안에는 여성에 대한 비하와 혐오도 담겨 있다.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과 여성에 대한 혐오 등 이 모든 경멸을, 힙합의 역사라는 이유로 긍정하라는 것은 명백히 발생론적 오류다. 그 역사적 기원이 어떠하든 또 그것의 재미 유무와는 무관하게, 오늘날 기본적으로 공유되는 가치들을 무시하면서 존재할 수는 없다. 

이 모든 것을 힙합의 역사를 거친 문화이기에, 이를 오늘날의 도덕적․윤리적 잣대로 평가할 수 없다고 단정을 짓는 답은 자기방어를 넘어 힙합의 폐쇄적인 성격을 느끼게 한다. 힙합의 문화에서 랩배틀을  통째로 지워버려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인신공격, 여성비하, 타자에 대한 혐오 등 각종 '디스'를 모두 힙합의 문화, 랩배틀로 둔갑시키려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경계하는 것 이상으로, '문화'라는 이름으로 모든 디스를 옹호하려는 태도는 냉혹하게 비판받아야 한다.

현재 계속되고 있는 랩배틀 구도ⓒ힙합엘이(HiphopLE)

힙합을 노래하는 이들이 배틀을 통해 남을 ‘씹고’ 상대방을 비판하는 것도, 본인을 뽐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랩배틀이 문화이자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시선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굳이 비열한 언어를 쓰지 않아도 랩배틀에서 본래의 의도를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 그럴 경우에만 통용가능한 문화이자 예술이 될 수 있다. 진행 중인 랩배틀의 최전선에 있는 랩퍼 E-SENS가 트위터를 통해 'Diss, Beef가 절대 힙합의 코어는 아니다'고 설명하는 모습에서, 필자는 랩퍼들이 분명 스스로 자정할 여지가 있다고 믿는다. 남은 것은 팬들의 역할이다. 랩퍼들의 저열한 언어 사용에 광분하여 그들을 부추기지 말고, 최대한 차분하게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