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롱’개념의 탄생 배경
'성희롱(sexual harassment)' 개념은 1974년 미국 코넬 대학의 린 파얼리(Lin Farley)이 진행한 '여성과 노동'이란 주제의 강좌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많은 여성 노동자들의 경험담을 토대로, 파얼리는 여성에게서 근로자의 역할보다 여성의 성적 특성, 성역할을 강조하는 비우호적 행동을 가리켜 성희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성희롱을 성폭력(sexual violence)이라는 개념과 비교해보면,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 여부를 따져서 그에 따른 책임을 상대방 개인에게 묻는 것이 성폭력이다. 성희롱은 개인 대 개인의 구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사자들이 속한 단체 차원의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성희롱은 노동, 교육 등에 있어서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권리인 '평등권'을 침해하는 차별 행위가 된다.
이러한 개념 정의를 바탕으로 했을 때, 성희롱 사건이 발생한 경우 당사자들에게 사건 해결을 방치해서는 안 되며, 소속 단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책임이 생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성희롱이라는 단어 자체는 널리 쓰이고 있지만 정작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 충실한 단체 내부적 제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듯하다.
직장 내 성희롱 문제 해결, 밖에서만 심각하게 안에서는 나 몰라라
우선 직장의 경우,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나서기보다는 외부에서 법률 등을 통해 단체 내부적 제재를 촉구하는 식이다. 지난 1993년 발생한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을 계기로 성희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면서, 성희롱을 규제하는 법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관련법들은 직장 내 성희롱에 한해서, 사업주 등에게 노동법상 성희롱 예방 및 해결의 의무를 부과하는데 그쳤다.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르면 사업주는 의무적으로 성희롱예방교육을 실시해야 하며(제13조), 성희롱이 발생한 경우 지체 없이 관련 조치를 취해야 한다.(제14조) '여성발전기본법'에서도 공공기관의 장 등에 대해서 유사한 내용의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제17조, 제17조의2) 외국에서 먼저 형성된 성희롱 담론을 그대로 수입해서, '성희롱은 우선 단체 내부에서 해결되어야 한다'는 정신에 충실하게 법을 제정한 것이다. ⓒ 여성신문
이처럼 큰 사건이 한번 터지고 난 뒤, 사회적 각성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도 전에 그것을 전제로 한 법들이 제정되면서 현실과 법은 따로 놀기 시작했다. 관련법이 제정된 지 20년이 지난 2012년, 여성부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국가기관, 지자체, 각급학교 등 1만5805개 공공기관 중 98.9%가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했다. 86.3%의 기관이 성희롱 예방지침을 갖고 있으며, 성희롱 고충 상담을 전담하는 기구를 설치 및 운영 중인 기관도 91.1%에 달했다. 그런데 여성부 조사에서 공공기관에서 근무하는 응답자 2015명 중 '성희롱이 (매우) 심각하다'고 답한 비율은 50.2%에 이르렀다. 성희롱을 당했을 경우 '참고 넘어간다'고 답변한 비율이 90.8%에 달한 반면, '사내 기구를 통해 공식적으로 처리한다'고 답한 비율은 3.9%에 그쳤다. 심지어 이 통계는 공공기관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정부의 통제 영역 밖에 있는 사기업 등에서는 그 해결 여건이 더욱 열악할 가능성이 크다. 성희롱이 왜 문제인지, 왜 단체 내에서 해결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이 선행되지 않는 이상, 직장 성희롱의 내부적 해결을 진정으로 도모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방증한다.
대학 내 성희롱 문제 해결, 시작은 창대했으나 그 끝은 미약하다?
반면 대학가에서는 비교적 활발하게 성희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내부 규약이 만들어져 왔다. 이는 학내 성차별, 성폭력의 주요 피해자들이었던 여학생들이 1990년대 들어 집단적으로 활동하며 문제를 제기한 결과였다. 그 결과 2001년 전국 대학의 76.9%가 관련 규정을 제정하였으며 83.8%가 상담창구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내부 제재의 실효성에 있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최근 한 연구에 따르면 전국 대학생 1244명 중 성희롱 피해자가 주로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를 묻는 질문에 '뭐라고 꼬집어서 항의하기 힘들어서 알고도 그냥 참는다'고 응답한 비율이 63.8%로 가장 많았다. 성희롱 관련 교육을 받은 88.1%의 대학생 중 학내 성희롱 교육이 도움이 되었다고 답한 학생은 28.9%에 불과했다. 한편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각 대학 성폭력상담소에 접수된 사례는 2009년 평균 0.6건, 2010년 0.8건, 2011년 1.2건 등으로 연간 평균 1건 안팎에 그쳤다.
직장, 대학 외의 다른 단체에서는?
그나마 직장, 대학의 경우에는 성희롱 피해자가 더이상 참지 못하고 소속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로 인해 당사자의 노동권, 학습권 등이 크게 침해받기 때문에 해당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단체 안에서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는 당위가 존재한다. 그런데 동아리, 온라인 커뮤니티 등과 같은 단체에서는 탈퇴에 따른 불이익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단체 내부적 해결은 거의 기대하기 어렵다. 대부분 사건을 덮기에 급급하거나 심지어 피해를 주장하는 측에 대해 괜한 소란을 일으킨다며 면박을 주거나 쫓아내기도 한다. 지난달 고함20에서 취재했던 채식 단체 대표 성희롱 논란 사건의 경우, 피해자 측에서 게시글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자 카페 운영진은 "양 당사자 사이에서 형평성을 유지해야 한다"며 급히 글을 블라인드 처리해버렸다.
"그럼 그냥 범죄로 규정해 버리면 안 돼?"
이처럼 이제까지 우리 사회에서 성희롱 문제는 단체 수준에서는 제대로 해결되어 온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성희롱 피해자들은 언론에 폭로하거나 소송을 제기하는 등 개인적 차원에서 수단을 강구해야 했으며, 그에 따른 대외적 신상 노출 등의 2차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아예 성희롱을 전부 범죄로 규정해서 가해자를 형사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법적 수단을 대폭 강화해서 단체 내부의 자율적 해결의 미비함을 보완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성희롱에 따른 피해가 심각하다면 법적 구제를 도모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성희롱의 발생 근원에 대한 고민 없이 법적 제재의 수위만을 높인다면 근본적인 해결은 쉽지 않다. 성희롱은 민감하고 어려운 문제다. 이제는 제도의 정치 못지않게 일상의 정치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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