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아침, 뉴스를 듣고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실시간 검색어에 세월호 사고, 단원고등학교가 올라왔지만 ‘금방 수습되겠지’라고 단순하게 여기며 침대에 누워 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별 일이었다. 너무나도 큰 일이었다. 그 날 저녁 뉴스에서 본 영상이 아직까지도 기억날 만큼 무시무시한 일이었다. “아직 제 친구 00가 안 나왔어요”, “00이 저 안에 아직도 있어요”라고 말했던 여학생의 목소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믿을 수 없었다. 사고 현장을 담은 영상을 몇 번이나 보았지만 잘 믿기지 않았다. 그 많은 사람이 바닷속에 가라앉았다는 사실이, 지금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사실이 지금까지도 거짓말 같다. 신문기사를 읽으며 뉴스를 보며 울었다. 분향소에 가서도 울었고, 많은 인파 속에서도 울었다. 또, 집에 있을 때도 알바를 하면서도 불쑥 떠올라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었다.

슬픔이 답답함, 짜증으로 이어졌다. 이해할 수 없는 말들과 행동들을 보면서 답답함과 짜증을 느꼈다.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는 상황에 신경질이 났지만 분노하진 않았다. 내가 느낀 건 분노라고 하기엔 민망한 불편함과 복잡한 마음뿐이었다. 어느 것 하나 달라진 것이 없이 너무도 태연한 이 사회의 맨 얼굴을 바라봐야 했을 때 분노하기보다는 그 속에서 좌절하고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었다.

 

ⓒ민중의 소리


그렇게 거짓말 같던 잔인한 4월이 그렇게 지나갔다. 쉽게 갈 것 같지 않던 시간은 5월, 6월을 지나가고 어느새 11월이 되었다. 그동안 잠시 중단했던 예능 프로그램도 다시 방송하기 시작했고, 뉴스에도 세월호 소식이 점점 줄어들었다. 지인들과 만나서 하는 얘기도 다른 이야기가 더 많았고, 그 날의 기억을 떠오르기만 해도 눈시울이 붉어졌던 나도 이제는 예전만큼 슬퍼하지는 않았다. 그 날 이후로 바뀐 게 아무것도 없고 너무나 많은 사람이 4월 16일에 살고 있었지만 적어도 나는 그 속에서 살지 않게 되었다. 

6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잘 지냈다. 가끔 울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했지만, 일상이 무너질 만큼은 아니었다. 알바를 하면서 돈도 모으고, 여행도 가고, 친구들도 만나고 좋아하는 공연이랑 전시도 잘 보러 다녔다.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내가 목표했던 것을 이루기도 했고, 게을러진 모습을 보며 실망하기도 했다. 그냥 언제나 그랬듯이 주어진 일을 잘하려고 노력했고,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땐 좌절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살아가고 있었다. 슬퍼했던 일은 별로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 유가족 간담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껏 들었던 이야기와 같을 것 같아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그래도 한번 찾아가 보았다. 그 자리에 앉아 사고 당시 영상도 잘 보고 유가족과 학생들의 이야기도 잘 들었다. 슬퍼하기엔 이미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난 것일까? 눈물은 나지 않았고 그냥 차분히 바라보기만 했다. 2시간 가까이 이어졌던 간담회에서 나는 지금 상황이 어떠한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알게 되었다. 내게 남은 건 그런 팩트같은 말들뿐이었다. 마음이 아프기는 했지만 더 이상 슬프지는 않았다.

유가족 간담회를 다녀온 후 우연히 세월호 관련 영상을 보게 되었다. 그 영상 속에서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아이의 부모는 매일 같이 딸에게 아침밥을 차려 주고 있었다. 또, 생일을 맞은 아이의 부모는 차마 불을 붙이지 못한 케이크를 들고 아이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눈물이 터져버렸다. 몇 달 동안 울지 않았던 내가 한순간에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매일 아침 아이의 아침상을 차리는 부모의 마음이, 케이크를 앞에 두고 같이 노래를 부를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이 어떨까 감히 상상해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날,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이젠 다 울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직도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점점 잊어가고, 아무렇지 않은 듯 했지만, 그 순간 터져 나온 슬픔은 이미 끝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도 슬퍼하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간담회를 마치고 마지막 나가는 길에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며 웃어주면서 유가족분이 내게 했던 말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직 잊지 말아 주세요.”

많은 것을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잊지 않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