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듯한 이불에 들어가 TV 연말 시상식을 보다 보면 문득 이대로 2014년을 보내기 아쉽다. 그래서 속 깊은 고하미들이 한 해를 되짚어 볼 수 있도록 '올해의 어워드'를 준비했다. 그냥 어워드는 아니다. 아이돌, 패션, 영화 등 다양한 분야를 혜자 부문과 창렬 부문으로 나누어 올해의 000상을 선정했다. 질소 과자처럼 더없이 실망스러운 분들에게는 '창렬'을, 혜자 도시락처럼 은혜로운 분들에게는 '혜자'를. 물론 수상자를 위한 두둑한 상금 혹은 번쩍이는 트로피는 없다. 다만 혜자 부문 수상자는 "수고했어 올해도!", 창렬 부문은 "수고해라 내년은!".




올해의 아이돌  (by. 페르마타)

혜자 부문 : EXID, 규현 (공동수상) 

ⓒ EXID


기자의 빠심으로는 에이핑크를 혜자 아이돌로 뽑고 싶었다. 그러나 올해의 혜자 아이돌은 EXID로 선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ID는 2013년의 크레용팝에 이어서 차트 역주행 신화를 이뤄냈다. ID 'pharkil'이 유튜브에 올린 멤버 하니의 무대 직캠 영상이 SNS상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면서, 발매시에 100위권에도 진입하지 못했던 음원차트 성적이 어느새 1위에 등극! 처음에는 '야한 춤사위'가 주목받았지만 유치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작년의 '빠빠빠'와는 달리 곡 자체의 완성도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13인조 보이그룹 슈퍼주니어의 멤버 규현에게도 2014년은 최고의 한 해였다. 7년간 기다려온 첫 솔로앨범 '광화문에서'로 음원차트 1위에 오르며, 올해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에서 가장 좋은 음원 매출을 기록했다. 아이돌이 솔로 발라더로도 성공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기며, 성시경을 이을 발라드 대표주자로까지 손꼽히고 있는 상황. 명동에 외국인전용 게스트하우스를 오픈하고, 3년째 진행해 온 <라디오스타>로 MBC 방송연예대상 우수상까지 받으며 한 해를 승승장구로 마무리했다.


 


창렬 부문 : EXO, 소녀시대 (공동수상) 

SM 코엑스 아티움에서 판매 중인 엑소 아이스크림


연이은 멤버들의 열애설, 탈퇴가 끊이지 않은 두 남녀 대표 아이돌그룹이 올해의 창렬 아이돌로 선정되었다. EXO는 크리스, 루한, 소녀시대는 제시카가 그룹을 탈퇴하면서 팬들을 '멘붕'에 빠뜨리고 팬덤 내 균열까지 만들어낸데다가, EXO의 백현과 소녀시대의 태연의 열애설, 두 사람의 인스타그램 포스팅으로 팬들의 '쿠크'는 완전히 깨져버린 상황!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는 두 그룹 팬들에게 음반장사, 굿즈장사로 총알들을 뽑아내는데 혈안이었다. 코엑스에 오픈한 카페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은 그룹 이름을 새기고 하나에 6,000원이라는 창렬 가격을 매기고 있고, 그룹 EXO는 12월에 발표한 콘서트앨범에서 '신곡 2곡'을 애매하게 추가해 팬서비스인지 장삿속인지 모를 애매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올해의 책을 샀더니 (by. 페르마타)

혜자 - 책을 샀더니 허지웅 달력

 

허지웅 <버티는 삶에 관하여>의 사은품 달력


TV에 자주 나오는 허지웅의 에세이집 <버티는 삶에 관하여>가 꽤 나쁘지 않다고 하여 현장구매하였는데 책이 비닐로 싸여있고 무언가 작은 물체가 책과 함께 동봉되어 있었다. 뜯어보니 허지웅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말 얼굴도 있고 발도 나온다) 열두 달 내내 그를 감상할 수 있는 달력이었다. 기자가 남성인데다 허지웅 얼굴이 딱히 워너비도 아닌 관계로 도대체 이 물건은 "어따 쓰라고 있는 것이오"라고 생각하여 창렬인 줄 알았으나, 허지웅 팬인 여성에게 연말 선물로 저 작은 달력을 주었을 때 저 달력이 왜 혜자인지를 알게 되었다. 허지웅과 함께 지웅한 2015년 되시길~


창렬 - 책을 샀더니 패션잡지

책 사은품으로 온 쎄씨 잡지


트위터를 자주 하지도 않는 기자이지만, '책을 샀더니...' 사은품으로 쎄씨 잡지가 따라왔다는 트윗들을 여러 번 목격할 수 있었다. 어떤 트위터리안은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라는 존 그린의 소설을 샀더니 저 잡지를 받았다고 하는데... 어떤 독자들에게는 쎄씨 화보가 유용하겠지만, 책은 사고 잡지는 안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두께와 무게의 창렬 잡지가 강제기증된 셈인 듯.

 


올해의 억울상  (by. 달래)

땅콩

 

트위터 갈무리


올겨울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군 이슈는 단언컨대 ‘땅콩’이다. 우리 사회의 갑의 횡포를 단적으로 보여준 대한항공 땅콩리턴 사건은 외신에도 보도되며 국제적인 망신을 당했다. 논란의 중심에 있는 ‘봉지 째 땅콩’은 씻을 수 없는 불명예를 떠안았다. 그런데, 그때! 그 땅콩이 사실 땅콩이 아니라 마카다미아 넛이란다. 땅콩은 땅에서 나고 마카다미아 넛은 나무에서 난다.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인데 평생 일등석 근처에도 못 가본 땅콩만 억울하다. 그럼에도 땅콩 회항이 아니라 마카다미아넛 회항으로 정정 보도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멀고도 험난한 진실보도의 길 앞에서 외로운 투쟁을 벌이는 땅콩에게 위로차 올해의 억울상을 준다. 


올해의 아버지  (by. 소소한)

헤자 부문 : 유민 아버지

ⓒ오마이뉴스


2014년은 세월호 침몰 사고로 모든 국민이 슬픔에 빠졌던 한 해였다. 세월호 침몰 사고는 4월 16일 304명의 목숨을 앗아간 불행한 사고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가족을 잃은 슬픔을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올해의 혜자 아버지로 선정된 유민 아버지는 진상규명을 위해 46일에 걸친 단식 투쟁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세월호 사건 진상규명에 대한 의지를 북돋게 하였다. 단식투쟁을 하던 광화문 광장에서 일베가 폭식투쟁을 하는 등 비난 여론이 있기도 했지만 사고가 발생한 지 205일 만인 11월 7일. 그의 염원대로 세월호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였다. 죽은 딸을 위해 진실을 꼭 밝히려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의 기나긴 투쟁을 통해 가늠할 수 있었다. 유민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세월호 아이들에게 부끄러운 부모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창렬 부문 : 박희태 전 국회의장

ⓒMBN


2014년 창렬 아버지로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 선정되었다. 지난 9월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한 골프장에서 캐디 A 씨의 엉덩이와 가슴을 터치하며 성추행을 하였다. 결국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캐디 A 씨에게 고소를 당했다. 국회를 대표하는 국회의장이 여성을 성추행한 것도 어이가 없었지만, "캐디가 딸 같고 손녀 같아서 손가락으로 가슴을 한번 툭 찔렀을 뿐"이라며 한 그의 해명은 국민을 더욱 분노케 하였다. 박희태 전 국회의장의 해명대로 딸을 가진 아버지가 딸의 가슴을 찔러도 되는지 의문이다. 그에게 영광스러운 2014년 올해의 창렬 아버지상을 수여한다



올해의 연기  (by. 은가비)

혜자 부문 : 장수원

ⓒMBC


욕만먹던 어중간한 아이돌 발연기는 가라! 로봇연기의 창시자 장수원 앞에서는 한낮 하룻강아지에 불과하다. 차원이 다른 발연기로 시청자들을 마니↗ 놀라게 했던 그는 새로운 연기영역을 발견하고 개척한 콜럼버스가 되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떠도는 로봇연기 짤을 시작으로 SNL, 무한도전을 거처 미생패러디 미생물의 장그래 역까지 꿰차면서 그의 로봇연기인생의 입지를 굳혔다. 보다보다 미운 정든 장수원의 발연기, 올해의 혜자 연기자로 선정한다.   


창렬 부문 : 에네스 카야 

jtbc <비정상회담>


jtbc <비정상회담>으로 인기를 얻어 승승장구하던 에네스 카야는 불륜설에 휩싸이게 된다. 총각행세를 하며 여성들과 연락한 증거들이 인터넷을 통해 유포된 것이다. 보수적인 이미지였던 그이기에 시청자들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특히 한 연애정보 프로그램에서 피해자들과 직접 인터뷰한 내용과 증거자료를 제시하면서 불륜설의 신빙성을 높였다. 그러나 에네스 카야는 모두 사실이 아니며, 법적으로 조치하겠다고 입장을 밝히고 비정상회담에서 하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터키로 돌아간 에네스 카야. 대중과 가족들에게 완벽하게 '선비' 연기를 하려 했지만, 거짓말쟁이라는 낙인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올해의 미안한 포즈 (by. 농구선수)

혜자 부문 : 민국이의 “조금만 비키세요. 다들 미안”

KBS2 <슈퍼맨이 돌아왔다>


지난 11월 9일 KBS2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세쌍둥이들이 운전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그중 민국이가 요리조리 장애물을 피하며 "조금만 비키세요, 다들 미안"을 외치는 장면은 클립 영상으로 편집되어 SNS와 유튜브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6초 정도의 짧은 분량의 영상이었지만 사람들에게 민국이의 귀여움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누군가는 사과하는 모습만으로도 심장을 저격할 수 있다는 좋은 본보기가 되어 올해의 미안한 포즈 혜자 부문으로 선정하였다.



창렬 부문 : 고승덕의 “못난 아버지를 둔 딸에게 미안하다!”

ⓒ뉴스1


2014년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 출마한 고승덕은 딸‘캔디 고’가 등장하기 전까지 가장 당선이 유력해 보이는 후보였다. 인지도를 통해 높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던 고승덕은 캔디 고의 가정사 폭로로 갑작스런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이에 조바심을 느꼈는지 고승덕은 6월 3일 강남역 유세 현장에서 연설하던 중 딸에게 사과의 메시지를 전한다. 여기서 그는 다소 기이한 목소리와 역동적인 사과 포즈를 취하게 되는데 여기서 찍힌 사진이 유명세를 탔다. 역동적인 사과 포즈는 패러디되기 좋은 조건을 갖추어, 메신저에서도 미안할 때마다 꺼내놓는 사진이 되기에 이른다. 결국, 고승덕은 사진만을 남기고 선거에서 낙마하게 되어 올해의 미안한 포즈 창렬 부문으로 선정하였다. 



올해의 패션 (by. 릴리슈슈) 

혜자 부문이였으나 창렬 부문으로 : 모나미 패션


올해의 패션으로 전 국민을 MC로 만들어 준 스냅백을 꼽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스냅백이 몇 년 전부터 꾸준한 인기템이었던 걸 고려하면 올해의 패션은 모나미 패션이다. 국민볼펜 모나미가 모에화되어 거리 곳곳에 출몰했다. 모나미 패션은 간단하다. 화이트 셔츠에 블랙 슬랙스. 여기에 발목까지 살짝 드러내어 섹시섹시 파우더를 뿌려주면 모나미의 모에화는 완성된다. 간단하기에 망할 가능성이 적고 깔끔하기에 호감을 준다. 적은 돈으로 꽤 차려입은 분위기를 낼 수도 있어 가성비도 좋다. 그러나 이 혜자 패션이 창렬 패션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사무실 이곳저곳에 굴러다니는 모나미처럼 디테일마저 똑같은 사람들을 본 순간. 난 이곳이 거리가 아니라 모나미 공장인 줄 알았다. 


올해의 영화 (by. 뻘)

혜자 부문 :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아무도 이 영화의 약진을 예상하지 못했다. 11월에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가 버티고 있는 이상 이보다 화제가 될 수 있는 영화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11월 27일, 조용히 개봉한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입소문을 타고 역주행을 시작했다!

 

<님아~> 에 유명한 배우와 화려한 연출은 없었다. 단지 카메라는 주인공 할머니와 할아버지 부부를 따라다니며 그들의 사랑, 삶, 죽음을 담는다. 담담하게 그려지는 모습들과 그 안의 진심은 다른 무엇보다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잠든 할머니를 한참 동안 쓰다듬어주는 할아버지, 할아버지와 장난을 치며 수줍게 웃는 할머니의 모습을 봤을 때의 '심쿵'은 올해의 그 어떤 영화보다 강렬했다.

 

혼자 봐도 좋고, 함께 보려고 하는 사람이 누구든지 좋다. 아름다운 시골을 배경으로 그 어떤 멜로 영화보다 더욱 아름다운 사랑을 하는 로맨틱한 커플을 볼 수 있다. 울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올해의 ‘혜자로운’ 영화라고 할 만하다.

 

창렬 부문 : <명량>

 

ⓒ <명량>


본격적인 개봉을 앞두었을 때‘명량’은 질소가 빠지기 전 빵빵한 모습의 감자칩 봉지를 닮았었다. <최종병기 활>이라는 나쁘지 않은 영화를 만들었던 김한민 감독에, 최민수와 류승룡이라는 유명한 배우들은 분명히 이 영화가 엄청난 화제가 될 것임을 짐작하게 했다. 게다가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순위권에서 빠지지 않는 이순신이라니, 엄청난 여름 대작이 탄생할 것처럼 보였으나...

감자칩 봉지를 뜯어보면 질소가 빠져나가 내용물이 얼마 남지 않은 과자가 허무한 것처럼 <명량>도 그랬다. 분명히 연기도 나쁘지 않았고, 해상 전투 장면들이 허접했던 것도 아닌데 지울 수 없는 ‘창렬함’이 있었다. 결국은 다 위인전에서 읽어봤던 내용이기 때문에 극적 재미가 부족했고, 후손들에게 애국을 강요하는 노 젓는 백성1의 ‘창렬함’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대형 배급사의 횡포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었던 비정상적인 상영관 수와 상영 시간표로 쥐어짜듯이 얻어낸 천만 관객 꼬리표까지, 올해의 창렬 영화는 <명량>이다.

 


올해의 웹툰 (by. 블루프린트)

창렬 부문 : 윤서인 <朝이라이드>


ⓒ 윤서인 <朝이라이드> 


조선일보가 일찌감치 점찍어놓은 개념웹툰 <朝이라이드>. 윤서인은 모든 종류의 이슈를 소화해낼 수 있는 작가다. 그의 세계에서는 수많은 사건의 원인이 하나로 압축되기 때문이다. 2014년 10월부터 윤 작가는 <프리미엄 조선>에서 거의 모든(이라고 작가가 생각할 듯한) 사회/정치/역사 논쟁의 종결자 노릇을 해왔다. 이 웹툰을 평안하게 읽으려면 자기세뇌가 필요하다. 한국에는 밥 굶는 어린이가 한 명도 없고, 현재, 지금 이 시대는 늘 좋은 상태를 유지한다. 노동자도 슈퍼에 갈 때는 '갑'이기 때문에 '을'인척 하는것은 용납할 수 없다. 이 폭주하는 의식의 흐름에 탑승하자. 다 읽고 나면 작가한테 물어보고 싶어진다. 어떤 연유로 이곳이 '절대절대절대' 지옥이 아니라고 믿게 됐냐고. 나도 좀 알려달라고. 이 웹툰에서 건질것은 글씨체뿐이다.


혜자 부문 : 최규석 <송곳>

ⓒ 최규석 <송곳>


"네이버 같은 대형포털에서 보게 해줘서 감사하다"는 독자의 리플은, 시대를 설명할 수 있는 문구로도 적절해 보인다. <송곳>은 그런 존재였다. 지금 막 '진짜' 송곳이 되어 찔러대기 바쁜 이수인과 그걸 다 겪어본 구고신이 있다. 휴재를 통한 완급조절은 열성 독자를 증식했다. 의도했든 아니든 2014년을 장식한 밀당이라고 할 만하다. 오래전(?) 자정이 넘어가자마자 얼른 스크롤을 내리고 다음 날 '마음의소리' 봤냐고 인사했던 것처럼, '이말년시리즈'가 수많은 짤방의 성지가 된 것처럼, 사람들은 송곳을 이야기한다. '노동'은 그렇게 어느 곳에서나, 마침내 사람들의 화젯거리가 될 것이다. 가장자리로 새나가기만 하던 노동이 제자리를 찾는 길에 최규석의 <송곳>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