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익숙한 침대에서 눈을 뜨고, 창 밖에서 항상 같은 풍경을 마주한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시간 속 일상은 평소와 다름없다.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우리가 놓치고 있는 건 무엇일까. [설익은 르포]는 당신이 미처 경험하지 못한, 혹은 잊고 지낸 세계를 당신의 눈앞에 끄집어낸다. 낯설거나 익숙하거나, 그것들과 함께 일상 속의 작은 일탈을 시작해보자.  



명동예술극장 앞. 평일 낮인데도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이 오간다. 지금은 극장 앞 사거리를 중심으로 옷가게와 화장품 가게가 넘쳐나지만, 명동예술극장이 국립극장이던 시절에 명동거리를 빛낸 건 수많은 다방이었다.


 

지금은 프렌차이즈 가게가 늘어선 명동예술극장 앞. 이곳에는 다방이 있었다


광복 이후부터 7-80년대까지 다방은 가난한 예술가들의 근거지였으며, 우리나라의 역사적 순간을 함께했다. 해방기 한국 문학예술의 살롱시대는 명동의 청동다방, 동방싸롱 등에서 시작했고, 민주화를 갈망하던 대학생들은 대학로(옛 서울대학교 문리대 맞은편)의 학림다방에서 혁명을 논했으며, 전태일은 동화시장의 은하수다방에서 여공들의 노동 문제를 고민했다. 그뿐만 아니라 종로의 양지다방, 신촌의 독수리다방, 무교동의 약속다방 등 서울 시내 곳곳에 자리했던 다방에는 그 시절을 보낸 수많은 이들의 삶이 녹아있다. 달걀노른자를 띄운 모닝커피는 주머니가 가벼운 청년들의 아침 식사였고, 청년들의 만남의 장이었던 만큼 젊은 남녀의 미팅이 쉼 없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수많은 추억을 뒤로한 채 다방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제 명동에선 어느 골목에 들어서도 카페를 발견할 순 있지만, 다방을 찾기란 쉽지 않다. 종로, 동대문, 대학로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간혹 다방이란 이름을 내걸고 장사를 하는 곳이 있지만, 이름만 다방이고 현대식 카페의 느낌이 물씬 나는 경우가 대다수다. 추억을 컨셉으로 잡은 카페가 아니라 진짜 추억이 묻어있는 다방에 가고 싶어졌다.

 

여기는 진짜다. 종로의 을지다방 체험기



수십 년 전에는 다방이 젊은이들의 공간이었다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다방은 어르신들의 공간이다. 가본 적이 없어 낯설고, 미지의 세계처럼 느껴진다. ‘다방’이라는 말을 들으면 세 단어가 떠올랐다. 베레모를 쓴 할아버지, 빨간 립스틱의 다방레지, 그리고 쌍화차. 서울 시내에 있는 진짜 다방을 찾다가 발견한 종로의 을지다방에는 그중 하나가 없었다. 그럼에도 곳곳에서 묻어나는 세월의 흔적은 그곳이 ‘진짜’ 다방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60년이 넘은 건물 2층에 있는 을지다방의 외관은 서울 시내가 아니라 어느 읍내에 있을 것만 같은 모습이다.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왼쪽에 다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나온다. 손님이 거의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8개의 테이블이 있는데, 절반 이상의 자리가 차 있었다. 4~50대로 보이는 남성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70대 이상으로 보이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아버지 손님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자 사장님이 나타나 따뜻한 물을 가져다주며 주문을 받았다. 붉은 립스틱을 바른 레지 언니는 없었고, 인자한 미소를 띤 할머니가 있었다. 메뉴판을 찾자 사장님은 벽 한쪽을 가리켰다. 가격은 적혀 있지 않고 차와 커피를 비롯한 메뉴들이 쭉 나열되어 있다. 다방에 왔으니 다방 커피를 한 잔 시켰다. 커피를 기다리며 다방 내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세련된 느낌은 없었으나 단정하고 따뜻했다. 테이블마다 푹신한 1인용 소파가 5~6개씩은 있는 것이 넉넉하게 느껴졌다. 구석에 틀어진 TV에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고, 다방 전체에서 은은한 쌍화차 향이 풍겼다. 사장님이 가져다준 따뜻한 물에서도 쌍화차 향이 났다.


커피가 나왔다. 을지다방에 커피 메뉴는 단 두 개뿐이다. 커피와 냉커피. 커피가 3천 원으로 가장 저렴하고, 제일 비싼 메뉴는 5천 원짜리 한방 쌍화차다. 꽃무늬 커피잔에 가득 담겨 나온 커피는 우리가 집에서 아빠한테 타 주는 커피와 똑같은 색이다. 맛도 같았다. 테이블에 설탕이 비치되어 있어서 취향에 따라 타 먹을 수 있다. 설탕 세 스푼을 넣으니, 달달한 게 먹을 만했다.

 

 

프림 셋 설탕 셋, 그때 그 시절 손님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다방 커피의 황금비율이다

 

60년의 세월을 버틴 다방, 그곳을 지키는 사람들

 

현재 을지다방을 운영하는 사장님은 15년째 장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을지다방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오래됐다. 63년 전, 건물이 생겼을 때부터 자리를 지켜왔다고 한다. 다방이 인기를 끌던 시절을 지나 사양산업으로 접어들면서 2-3년에 한 번씩 주인이 바뀌었다. 사장님이 2000년에 처음 다방을 인수했을 때에는 정말 50년대 다방 같은 느낌이었다. 벽이며 소파며 다 낡아서 인테리어를 다시 하고 가게를 정비한 후에 장사를 시작했다.

 

“요즘 우리 같은 다방은 서울에서 찾기 힘들지.” 사장님의 말처럼 이제 남아있는 다방은 대개 술장사를 함께하거나, 다방이라는 이름만 걸어놓은 테마카페이다.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을지다방에도 한 때는 커피 타주는 레지 아가씨가 있었지만, 인건비가 감당이 안 돼 몇 년 전부터 사장님 혼자 운영을 하고 있다. 한 달에 월세며 재료비며 이것저것 빼고 나면 약간의 수입이 나는 수준이다. 적자는 아니지만 많은 돈을 버는 것도 아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고 말을 시작한 사장님은 올해 들어 다방을 운영하는 게 더 힘들어졌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을지다방은 차만 팔기 때문에 저녁 여섯 시가 되면 손님이 없어 문을 닫는다. 그래서 점심때에 어느 정도 손님이 있어야 하는데, 요즘에는 점심을 먹은 후 다방에 들러 커피 한 잔 마시고 가던 4-50대 직장인 남성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정부의 정책에 따라 다방을 비롯한 음식점이 금연구역으로 설정됐기 때문이다. “사장님, 여기서 이제 담배 못 피우죠?”라고 묻던 손님들의 발길이 끊기면서 지난달의 매출은 작년보다 30%가량 줄었다.

 

“다방에는 얘깃거리가 정말 많아. 우리나라의 한 시대의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있으니까. 그래서 오래도록 유지되어야 하는데... 내가 다방에 머물던 3-40분 동안 손님 몇이 나가고 새로 들어왔다. 홀로 신문을 읽는 할아버지도 있었고, 가족 이야기나 일 얘기를 나누는 이들도 있었다. 을지다방의 주 고객은 80대 노인층이고, 대부분이 단골손님이다. 오래전 대학을 다닐 때 을지다방을 오던 이들이 나이를 먹고도 잊지 않고 계속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수원이나 일산, 인천 등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간 할아버지들도 젊은 시절의 추억을 그리며 많이 온다고 한다. 오랜 세월을 버틴 만큼 다방에는 수없이 많은 추억이 서려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계속 존재했으면 하는 것들이 있다. 사장님에겐 다방이 그랬다. 전통적인 다방이 좋아서 계속 장사를 했지만, 적자가 나면 일을 접을 수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면 ‘진짜’ 다방을 찾는 일이 더 힘들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세월이 가도 잊히지 말고 기억되기 위해 누군가의 노력은 계속된다. 을지다방은 아직 을지로3가역 10번 출구에서 세월을 버티고 있고, 여전히 그곳을 찾는 손님들을 위해 온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