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집회에 대한 혐오가 세월호 1주기를 기점으로 극에 달했었다. 정부를 비판하며 경찰과 대치하는 세월호 집회 참가자에 대한 비판과 그에 대한 반박이 SNS를 달궜다. 비판자들이 세월호 집회 참가자를 비판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 중 하나는 "참가자들이 선동 당했다"라는 이유였다.


세월호 집회 참가자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선동 당했나?


집회 참가자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집회 참가자들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SNS 공간에서 자극적인 정치 기사와 관련 글에 선동 당했다고 말한다. 세월호 사건과 집회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SNS에 링크된 기사와 글을 보고 관련 정보를 얻는다. 이때 SNS에 링크된 기사는 제대로 된 정보를 담기보다 조회 수를 늘리기 위한 자극적인 기사가 주를 이룬다. 자극적인 기사에 노출된 사람들은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감정적인 판단을 하게 되고, 이런 감정적인 판단 때문에 폭력적이고 비이성적인 불법 시위를 하게 된다는 논리다.


TV, 라디오 등 매스 미디어에 대한 회의 속에서 민주주의 공론장으로 주목받던 SNS가 더 이상 공론장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SNS가 여론을 형성하는 공론장에서 감정적인 사적 관계의 장 혹은 클릭 수를 위한 자극적인 상업의 장으로 전락했다고 생각한다. 


공론장이 없는 사회에서 여론을 형성하고 주도하는 ‘공중(Public)’의 성립은 불가능하다. 다만 감정적인 덩어리로서 ‘군중(Crowd)’이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비판자들에게 SNS에서 ‘좋아요’를 누르고 세월호 1주기 집회에 참여하는 참가자들은 이성적인 ‘공중’이 아니라 비이성적인 ‘군중’일 뿐이다. 


집회 참가자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군중’은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더 복잡하게 만드는 문제적 존재들이다. 비판자들이 집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좀비’라고 부르거나, 세월호 사건은 안타깝지만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꾸짖는 말의 저변에는 ‘군중’에 대한 혐오가 존재한다. 이로써 그들을 비판하는 자신은 사회 질서를 지키는 합리적 ‘시민’의 위치에 선다.


2015년 4월 16일 세월호 1주기 추모제 ⓒ한국경제



감정 vs. 이성, 군중 vs. 공중 이분법의 한계


SNS는 정말 공론장의 기능을 잃어버렸을까? 클릭 수 유도를 위해 일부 언론사들이 단편적이고 자극적인 기사를 생산하는 것은 맞다. SNS도 감정적 교류가 이루어지는 사적인 공간이 존재한다. 그리고 자극적인 기사가 사적인 공간을 자극해 대중의 분노를 일으키는 화학반응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분노를 선동한다는 이유로 SNS가 공론장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군중’을 생산한다고 단정 짓는 것은 섣부른 결론이다.


공론장은 제도적이고 이성적인 의견만을 주고받는 곳이 아니다. 크게 제도적인 공론장과 사적인 공론장이 존재하지만, 공론장의 종류는 매우 다양해서 여론이 형성되는 어느 곳이든 공론장이라고 부를 수 있다. 종류가 다양한 만큼 다양한 형태의 여론이 형성되는데, 감정적인 호소도 하나의 여론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경우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일 중에는 감정적인 충동이 그 시작이었던 일이 많다. 이한열과 박종철 열사의 죽음에 대한 분노는 6월 항쟁을 격화 시켰다. 정부는 그들의 죽음이 사고라고 말했지만, 시민은 분노에 선동됐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비이성적인 군중이라 부르지 않는다.


군중에 대한 혐오는 이성은 합리적이고 감정은 비합리적이라는 이분법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감정과 이성은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보완하는 관계다. 사적인 공론장에서 감정적인 자극을 받은 사람들은 새로운 문제를 지각하고 제도적인 공론장에 의견을 제시한다. 이 과정에서 비이성적인 ‘군중’은 특별한 여론을 공유하는 ‘공중’으로 변화한다. 이성과 감정, 군중과 공중은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이런 점에서 분노를 선동하는 SNS는 공론장의 기능을 잃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적인 공론장의 기능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SNS에 올라온 글을 보고 안타까워하며 분노한다. SNS에 특화된 카드 뉴스는 우리의 감정을 더욱 자극한다. 자극된 우리는 문제를 제기 한다. 그 과정에서 토론하며 합의에 이른다. 합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분노한다. 이들은 분노한 ‘공중’이다.


SNS에서 공론 형성을 방해하는 진짜 문제는 비이성적인 ‘군중’이 아니다. 상대방의 의견을 ‘선동 당했다’며 무시하는 태도다. 비판자들은 집회 참가자들을 감정적이라고 비난하면서, 그들이 무엇 때문에 감정적이 되었는가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분노의 실체를 규명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게 한다. 이때 SNS는 합의에 이르는 공론장이 아니라 서로가 자신이 옳다고 우기는 아수라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