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리 관음기] 2화 말끔한 E의 깔끔한 2주 천하


2화를 맞아 숫자 2에 어울리는 사람을 주변에서 찾았다. 멀리 갈 필요가 없었다. 내게 친한 친구가 두 명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중 한 명이 이미 1화에 등장했다.)


E는 학업에 대한 열의로 활활 불타는 대학생이다. 나는 종종 E를 ‘내추럴본 샌님’이라 놀리곤 했다. 어깨너머로 들여다본 E의 다이어리에는 샌님의 스테레오타입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글씨들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얼핏 보아도 다이어리에 대한 취향은 E를 똑 빼닮았고, 나름의 체계랄 것까지 있어 보였다.


이토록 좋은 인터뷰 소재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네 다이어리를 좀 관음해도 될까”하고 요청하자마자 E는 곤란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내 털어놓은 E의 한 마디는, “사실 2주밖에 안 썼어. 중간고사 때문에.”


어째서 샌님은 2주 만에 다이어리를 내팽개쳤을까. ‘내팽개침’을 삼시세끼 밥 먹듯 해왔던 나로서는 단박에 이것이야말로 더욱 좋은 소재임을 깨달았다. 이름하여 말끔한 E의 깔끔한 2주 천하 되겠다. 이 글이 다이어리를 내팽개치는 것에 있어서 빠지지 않는 이들의 공감을 사기를 바란다. (과연, 다이어리는 내팽개치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이어리가 얇고 가볍고 깔끔하다.

“다이어리를 고르는 데 엄청난 시간을 투자했다. 점원들이 이상하게 쳐다볼 정도로. 통학하는데 왕복 4시간이 걸린다. 거리가 멀기 때문에 크거나 두꺼운 것은 바로 선택지에서 제외했다.


또 예쁘게 꾸미는 것에도 관심이 많아서 한 번에 쫙 펴지는 것을 선택했다. 같은 이유로 종이 질도 꼼꼼하게 보는 편이지만, 그다지 많은 돈을 투자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딱히 비싼 것은 아니다. 디자인도 아주 내 취향인 것은 아니지만 차선책이었다. 뭔가 묻는 걸 방지할 수 있는 커버도 있고.”


그나저나 1, 2월이 없는데 3월부터 쓰기 시작한 것인가?

“다이어리는 일부러 개강 무렵, 즉 3월에 가서 산다. 할인을 많이 하거든. 그러니까 내게 1년의 시작은 3월이다. 1, 2월은 유예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연초 두 달은 언제쯤 다이어리를 사면 할인을 할까 궁리하며 보낸다.”


1년 10개월설이라니 흥미롭다. 개강이 중심이 된다니 샌님답기도 하고. 위클리 없이 오로지 먼슬리만 쓰는가?

“그렇다. 데일리나 위클리는 있어도 안 쓴다. 칸이 너무 넓어서 뭔가 다 채워야 할 것 같다는 부담감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데일리나 위클리가 있으면 필연적으로 두꺼워지니 휴대하기 좋지 않다. 나의 가방은 노트북 무게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힘겹다.”


먼슬리만으로 하루에 대한 충분한 표현이 가능한가?

“느낌을 간단히 써놓기도 하고 이모티콘을 활용하기도 한다. 즐거운 날엔 하트를 붙이거나 ‘^^’라고 해두거나. 사실 그 정도면 충분한 것 같다.


굳이 구구절절 감상을 쓰고 싶은 날에는 SNS 계정을 이용한다. 팔로워, 친구가 몇 명 되지 않는 비공개 계정으로 혼잣말에 가까운 말을 한다. 내 나름의 카테고리를 나눠서 내용의 은밀한 정도에 따라 여기저기 글을 쓴다. 예를 들어 동생 자랑은 페이스북 계정에서만 한다든지.”






다이어리에 여러 종류의 펜을 사용하는 모양이다.

“펜 색깔별로 의미가 있다. 기본적으로 5색을 사용한다. 일상적인 일은 검은색, 변동 사항은 초록색, 매우 중요한 시험이나 일정은 빨간색, 지인의 생일은 파란색, 그 외의 것은 주황색으로 표시한다. 제일 적게 쓰는 것은 놀랍게도 빨간색인데 정말로 중요한 것에만 쓰기 때문이다.


펜 색깔에 대한 집착은 중학생일 때부터였다. 반에 한 명씩 있는 필기구, 필기 오타쿠, 그게 바로 나였다. 그 덕력은 고등학생 때 절정에 이르렀다.”


흥분하지 말고 천천히 말해달라.

“이동 수업을 할 때 내 필통을 두는 것만으로 모든 이들이 내 자리가 거기라는 것을 알았다. 특정 브랜드의 펜을 사면 (색)깔맞춤이 되지 않는 것을 견디지 못해 며칠 후 그 브랜드의 색을 더 구비하곤 했다. 3색 이상의 스펙트럼을 갖추어야 평안이 찾아왔다.


펜 색깔을 분류하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생 때 스터디 플래너를 쓰면서부터였다. 다만 그때는 색 조합의 아름다움에 치중했다면, 성인이 된 지금은 실용성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것은 펜 색깔의 조합 외에도 다이어리를 꾸밀 수 있는 자본력, 즉 스티커를 살 수 있는 능력이 생겼기 때문인 것 같다.”


잘 알겠다. 이렇게 속사포 랩을 할 줄 몰랐다. 지인의 생일을 쓰는 펜이 따로 있다는 것이 놀랍다. 잘 챙기는 편인가?

“다이어리를 사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다. 지인의 생일을 물어 빠짐없이 적어 놓는다. 1년에 한 번 선톡을 날릴 명분이 있는 날이지 않나. 나의 느슨하고 편협한 인간관계를 도닥이기 위한 기회라고 생각한다.”


꾸미는 것에도 관심이 많다고 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꾸미나?

“스티커를 사용한다. 정말 예쁜 스티커를 마주치면 고민 끝에 구입하고, 사용할 때에도 심사숙고하여 가장 덜 아까운 것으로 하나 붙이고 만족해한다. 물론 막 붙이는 것은 아니고 중요한 날에만 붙인다. 보통은 조그마한 캐릭터를 직접 그린다. 고양이, 토끼, 호랑이를 특히 선호한다.”






본격적으로 ‘내팽개침’에 대해 질문하겠다. 왜 2주만 썼나.

“중간고사 기간이라 그랬다. 다이어리 꾸밀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집에 두고 다녔다. 그러나 들고 다녔어야 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늘 1학기 개강과 함께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해 시험 기간에 멈추고, 흐지부지됐다가 다시 2학기가 개강하면 쓴다. 흐지부지되는 것에 더는 자괴감을 느끼지 않는다. 고통은 반복될수록 둔감해지지 않나. 인간의 단점이자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보통들 시험 기간에 다이어리의 일정 관리 기능이 폭발하지 않나?

“정작 시험 계획표는 다이어리에 쓰지 않는다. 괜히 썼다가 안 지켰을 때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다. 그냥 머리로만 생각하고 유연하게 공부하려는 편이다.”


안 지킨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군. 생각보다 샌님은 아닌가 보다.

“너는 지켜본 적이 있는가?”


(말을 돌리며) 나머지 일정을 살펴보면 요가, 책, 학과 공부, 과외로 점철되어 있다.

“보통 나의 일상을 말해보자면 일찍 일어나서 등교한 후 수업 듣고 귀가한다. 평일 저녁은 과외 일정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경향이 크다. 과외를 3개나 하고 있어서 거의 시간이 안 난다. 충동적으로 어딜 가는 걸 좋아하는데 일탈하지 못해 아쉽다. 그리고 요가를 하거나 과외, 학과 공부를 하고 잠깐의 덕질 후 잠자리에 든다. 간단해 보이지만 결코 간단하지 않다. 잠도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자지 못한다.”


잠깐, 덕질이라고? 그건 왜 다이어리에 쓰지 않나.

“당신이 머글(주1)이라는 사실이 여기에서 들통 났다. 당신은 다이어리에 ‘숨쉬기’‘등교하기’ 이런 것도 쓰나? 지금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간 라포(주2)가 박살 났다. 주의해달라.”


아, 순간 깨달음이 왔다. 잘 알겠다. 학과 공부에 대한 언급이 많은데.

“써놓기만 하고 안 했다. 오해하지 말아달라. 샌님이 아니다. 수업을 듣는 것만으로 벅차고, 거기에 왕복 4시간의 통학, 3개의 과외를 하고 나면 집에서 무언가를 더 할 여력─체력과 정신력─이 없다.”


뒤편에는 깔끔하게 빈 모눈종이가 있다.

“원래는 운동이나 다이어트와 같은 단기 계획용으로 사용할 예정이었다. 2주 천하로 끝나는 바람에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아참, 최근 허리가 너무 안 좋아서 요가를 시작했는데 이틀 만에 효과를 봤다. 하지만 요가도 중간고사를 맞아 중단했다. 그랬더니 이틀 만에 다시 고통이 찾아왔다. 요통을 앓는 이들에게 요가를 추천한다.”


중간고사가 모든 것을 중단시키는군. 혹 지금까지 썼던 다이어리를 모두 보관하고 있나? 2주만 써도 보관하나?

“조롱하지 말아달라. 당연히 보관하고 있다. 종종 다시 들춰보곤 한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적어둔 것을 보면 뿌듯하다. 말 나온 김에 다시 써야겠다.


생각해보니 가장 아름답게 꾸몄던 건 전 애인이 준 다이어리였다. 물론 버려서 없다. 그러나 분명 내 곁을 스쳐 간 다이어리 중 가장 수작으로 칠만한 것이었다. 연애의 고양감이라는 것이 다 그렇지 뭐.”


수줍은 얼굴로 ‘사실 2주밖에 안 썼어. 중간고사 때문에’하고 털어놓던 샌님은 ‘연애의 고양감이라는 것이 다 그렇지 뭐’하며 스님 같은 말로 인터뷰를 끝맺었다.


*머글(Muggle) : J. K. 롤링의 소설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마법사나 마녀들 사이에 사용되는 단어로, 이른바 "보통 인간"을 가리킨다. 작품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이 말도 널리 알려지자, 영어에서는 "일반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다. 위키백과, '머글'

*라포(rapport) : 두 사람 이상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조화로운 일치감, 즉 공감적이며 상호 반응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용어 정신분석용어사전, 서울대상관계정신분석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