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00 씨*는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는지 아직도 실감이 안 난다고 몇 번이고 말했다. 서울 소재 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을 공부하는, 스물 셋의 그는 경기도 안양에 산다. 세월호 사건 당시엔 비슷한 지역 사람들과 대외활동을 하고 있었다. 안산 사람도 있었다. 한 다리 건너 전해 듣는 단원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이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 


완전 생생하게 기억난다. 


시험이 며칠 안 남은 날이었거나 시험기간이거나 그랬다. 공부하다가 배고파서 친구들한테 떡볶이 먹으러 나가자고 그랬다. 그런데 애들이 안 먹겠대서 나혼자 떡볶이집에 갔다. 종류별로 먹고 싶어서 여러개 시켜놓고 되게 천천히 먹고 있었다. 학교 앞에 허름한 떡볶이집이었고 주인 아주머니랑 나밖에 없었다. 엄청 조그만 옛날 tv가 달려있었다. 무슨 사고가 났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냥 솔직히 여러 사고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봤다. 그런데 떡볶이 파는 아주머니가 "와 어뜩하냐"하고 우시는 거다. 그래서 내가 "왜 저러지. 저렇게까지 해야되나"라고 생각했다. 그때가 점심이었나. 기울어진 배가 tv에 나오고 그런 상태였다. 그 떡볶이 어머니가 "저 새끼들 저때까지 뭐했냐"고 쌍욕을 하셨다. 너무 무서웠다. 


그날 저녁에 애들이랑 오면서 얘기했는데 그게 엄청 큰 사건인 거었다.


그때 이후로 떡볶이집에 간 적이 한 번 있다. 떡볶이 가게가 작으니까 비슷한 자리에 앉게 된다. 그때 기분이 그 자리에 있더라. 그래서 그 이후로 안 간다. 항상 거기를 지나가면 그게 생각난다.


2014년 4월 24일 안산합동분향소 ⓒ박종식 / 게재 : 페이스북 페이지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진'


세월호 사건 다음 날 학교를 갔는데 교수님들이 검정색 양복을 입고 오셨다. 추모하려고. 그때 문학 수업을 많이 들었는데 원래 문학하는 교수님들이 감성적이시고 시대 비판하는 분도 많다. 양복 입고 온 교수님은 남자 두 분이셨는데, 원래 항상 편안하게 입고다니시다가 검정 양복을 입고오신 거였다. 우리는 멋있어가지고 "오- 교수님" 이랬는데. 그 의미때문에 입고 오신 거더라. 그래서 애들이 숙연해졌다. 그중 한 교수님은 그 학기 내내 검은 양복을 입고 오셨다.


그 교수님이 세월호 사건 관련된 얘기를 진짜 많이 하셨다. 한 일주일 넘은 즈음, 단원고 아이들이 안 좋게 됐다고 잠정적으로 결론이 났을 때, 교수님이 들어와서 어른이라 미안하다고 하면서 우셨다. 지금 생각하면 주책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근엄하신 남자 분이 우시니까 애들도 많이 울고 그랬다.


애들이랑 장난 반 진담 반으로 "그 수업에서 남는 건 세월호 얘기 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교수님이 세월호 얘기 많이 했다. 수업 시간 마다 영상도 틀어주고. 5분 동안 묵념하자고, 잔잔한 음악 틀고 5분 동안 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그랬다. 자기도 기독교가 아닌데 종교에 상관없이 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그랬다. 그 교수님 때문에 그 사건이 맘에 남았던 거 같다.


교수님이 정말 학기가 끝.날.때까지 항상 그 애기하시고 검은 옷 입고 오시고 그랬다. 원래 사담으로 때우시는, 공부는 우리가 알아서 책 보고 해야 하는 그런 스타일의 수업이었는데 항상 세월호밖에 얘기 안 하셨다. 좋으신 분이다. 원래 교수님에게 애정을 느끼지 않는데. 인간됨이라는 게 느껴지는 게 되게 좋았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날에 내가 집에 갔는데 아빠가 현관 마중나와가지고 나랑 동생을 한번씩 안아줬다. 그때 완전 울었다. "우리 아들 딸들은 잘 살아 돌아왔네 밥 먹어" 이랬다. 우리 아빠는 표현을 잘 안하는 사람? 장난끼는 많은데 애정표현 잘 안하시는 분이다. 마음이 좀 안 좋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걔네들도 당연히 집에 돌아와야 하는데 걔네는 못 돌아와서 엄마 아빠가 그렇게 찿으러 나간 거니까.



2014년 7월 15일 서울광화문광장 ⓒ허란 / 게재 : 페이스북 페이지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진'


대외활동 팀이 지역별로 안양, 안산, 수원 이렇게 묶여 있었다. 안산 사람이 두 명 있었는데 그중에 한 명은 자기 친구 동생이 생존자 중 한명이었다. 친구가 사람들이랑 한동안 연락을 끊었고, 그 사람도 친구가 먼저 연락해주기까지는 자기가 먼저 연락을 못하겠다고 그랬다. 또 다른 안산 사람은 자기 가족이 안산에서 4명 그룹과외했는데 그 4명이 다.. 죽었다는 거다. 다 단원고 2학년 애들이었다. 한 순간에 그렇게 된 거다. 그래서 그 분이 엄청 힘들어 하다가 하는 일 다 그만두고 잠깐 쉰다 그랬다고 한다.


대외활동 팀장 오빠가 단원고 출신이었다. 졸업한 지 엄청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자기 후배들이고, 교복도 그 교복이니까 이것 저것 많이 했었다. 그 오빠가 세월호 유가족들이랑 한 다리 건너서 아니까 개인 사연을 많이 얘기해줬다. 예를 들어서 애가 미술이 꿈이었는데 가정형편이 안 되서 못 해준거다. 그래서 다음 생애에는 더 부유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라 그랬다고. 


안산이 솔직히 그렇게 잘 사는 동네가 아니다. 단원고 근처에서 대외활동 UCC촬영을 했다. 반지하 집을 하나 빌려서 했는데 집이 되게 좁고 "어떻게 이런 데서 살지"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거기가 단원고 애들이 살던 동네였다. 거기는 두 집 건너 한 집이... 완전 초상집 분위기라는 얘기를 들었다.


작년 여름에 대외활동 사람들이랑 마라톤을 나갔었는데 옷에 같이 노란 리본 달고 뛰었다. 그게 세월호 일어난 지 두 세 달 됐을 때다.


나는 약간... 아직도 정말 이 일이 일어났나 싶다. 안 일어나야 될 일이 일어난 거 같다. 아직도 실감이 안 난다고 그래야 되나. 정말 이렇게 큰 사건이 일어난 걸까?  


기독교랑 연관시켜서 얘기하자면, 나는 이때 신이 원망스러웠다. 한 사람 한 사람 다 사연이 있었다. 그걸 들으면서 "진짜 신이 세상에 있을까? 이 세상에 진짜 나쁜 사람도 많은데 왜 굳이 이렇게 미래가 다 창창한 애들을 이렇게 해야됐을까?"라고 원망을 많이 했다. 


친구 중에 엄청 믿음이 신실한 친구가 있어 걔한테 이야기를 했다. "야 근데 진짜 하나님이 계시긴 계시는 걸까? 만약 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되는 거 아니야? 왜냐면 그 분은 그 일을 충분히 막을 수 있잖아" 근데 걔가 "이걸로 보여주고 싶은 더 큰 뜻이 있으니까 그런 거"라고 그랬다. 나는 이게 핑계로만 들렸다. 좋은 일이 일어나면 다 그분의 뜻이라고 하고 안 좋은 일이 있으면 또 저렇게 말하고... 좀 모순 같았다.


시간이 가면갈수록 현수막도 많이 없어지고. 세월호 사건에 관련된 얘기도 없어질 때쯤 나도 아무렇지도 않아졌던 것 같다. 사건 이후 한 달정도 됐을 때였다. 일단 눈에 안 보이니까 잊게 되더라. 그러고 나서 2학기 때 축제도 있고 "아 이제 밀렸던 축제한다"고 하면서 엄청 잊게 된 것 같다. 그러다가 가끔씩 정치랑 그거랑 관련된 얘기가 나오면 "아 저런 일이 있었지" 이렇게 생각하긴 했다.


솔직히 유가족들 대부분이 자식을 잃은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에게 돈이 그렇게 중요할까 싶다. 근데 그게 점점 왜곡이 돼가지고 뉴스 기사에 '세월호 사람들 한 가구당 얼마씩 지원' 이렇게 딱 수치화되서만 나가니까 너무 자극적으로 나간다고 생각했다. 언제 티비에서 인터뷰를 봤는데, 자기네들은 이런 금전적인 거 필요 없다고, 그냥 아이 잃은 엄마로 봐달라고, 이렇게 정치랑 연관시키지 말라고 그러더라. 근데 그게 어느 순간 정치랑 연관되서 어떤 법도 만들어지고 심지어는 입시 특혜같은 것도 만들어지고 그랬다. 세월호 사건이랑 정치랑 묶여서 뉴스가 나오면 "또 시작이야?" 약간 이런 생각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이 자기 선거 전략으로 이용하기도 했었고.


원래 정말 계속 애도하고 슬퍼해야 될 일이 맞는데 언론에서도 나쁘게 비춰지고 그게 금전적인 거랑 연관이 되니까 "애도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한 가구당 얼마 지원' 이러니까 "얘네가 돈 받으려고 시위를 하는건가?" 이런 식으로도 보게 되더라. 그게 아닌 걸 알면서도 계속 한 사람당 얼마얼마 이렇게 나오니까 얘네가 그것때문에 하는 건가 점점...


거리에서 세월호 서명운동 했는데, 나는 당연히 그걸 했다. 근데 내 친구들 중에서 그걸 회의적으로 보는 애들이 되게 많더라. "저런 거 너무 정치적으로 얘기하는 거 아니냐" "저런 걸 왜하냐"고 그랬다. 국민이라면 당연히 다 하는 줄 알았다. 근데 의외로 그렇게 생각하는 애들이 있다는게 신기했다.


솔직히 나는 사고 없이 되게 평탄하게 살았다. 그나마 사고라고 하면 재수한 건데. 지금와서 생각하면 그건 배부른 소리다. 그래서 가끔씩 걱정되기도 한다. 살면서 인생에 한 번쯤 풍파가 온다니까. 내 인생의 풍파는 언젤까.. 이런 생각이 든다.


나한테 세월호 사건이란 믿기지 않는 일.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일이라서 나는 이게 아직도 실감이 안 간다. 왜 그런 거 있지않나. 조금 힘들면 "힘들다" 이러는데 너무 힘들면 힘들다는 기분조차 안 느껴진다고 할까. 한 감정이 너무 과하면 그 감정이 오히려 안 느껴진다고 그런다. 나는 이게 너무 안 좋은 일이니까 아직도 실감이 안 간다. 이게 정말 우리나라에 일어난 일인가? 나는 되게 충격적인 기사가 '한 반에서 한 명만 살았다'였다. 그 한 명 어떻게 살까? 실감이 안 난다. 만약 우리 고등학교 2학년 때 나 빼고 다 그렇게 됐으면 어떻게 사나. 자기랑 어제까지 얘기하고 그랬던 애가 없는데.


*인터뷰는 2015년 4월 19일에 진행됐다. 

*[뭍위에서] 기획에서 인터뷰이의 이름은 인터뷰이의 의향에 따라 실명 혹은 익명으로 기록했다.



인터뷰.글/ 릴리슈슈(kanjiw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