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씨인사이드 메르스 갤러리가 '남성 혐오'로 가득 찼다. 갤러리를 가득 채운 혐오의 문장들은 낯설고도 익숙하며, 동시에 익숙하고도 낯설다.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은 가부장제 사회 내 여성과 남성의 위치가 뒤바뀌었다는 설정 아래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메르스 갤러리 속 넘쳐나는 혐오의 문장에서 객체였던 여성은 주체로, 주체였던 남성은 객체로 갈아 끼워지고 있다. 메르스 갤러리와 이갈리아의 딸들이 만나 '메갈리아의 딸들'이 탄생했다. 이곳은 메갈리아의 땅, 남성 혐오를 통해 여성 혐오를 비추는 장이다.



메르스 갤러리 게시글 캡쳐


메르스 갤러리가 원래부터 남성 혐오의 공간이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30일 홍콩에서 메르스 의심 환자 여성 2명이 격리 치료를 거부했다. 이들은 이내 여성 혐오의 먹잇감이 되어 메르스 갤러리 내에서 조롱과 멸시를 받았다. 다시 말해 조롱은 '격리 거부'가 아닌 '여성'을 향했다. 이후 그들의 격리 거부가 의사소통 과정에서 비롯된 오해였음이 밝혀지자, 순항하던 여성 혐오는 좌초하기 시작했다.


혐오의 대상으로만 남았던 여성들은 '주체적으로' 남성 혐오적인 게시물을 올리기 시작했다. 메르스 갤러리가 '메갈리아의 땅'이 된 순간이다. 브래지어 사이즈로 평가받던 여성들은 스스로 남성의 신체와 남성기를 적극적으로 성적 도구화하고 있다. 이곳에서 남성들은 페니스 크기를 기준으로 평가받으며 성적 도구로 묘사, 환유된다.


메갈리아의 딸들은 더치페이하는 ‘개념녀’를 부르짖던 남성의 모습을 본떠, 먹는 음식의 양까지도 더치해줄 수 있는 ‘개념남’을 찾겠다고 맞선다. 이쁜이 수술*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멋쟁이 수술을 통해 여성의 성감을 위한 신체를 갖출 것을 요구한다. 남성이 처녀막(질주름)이 있는 여성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총각막’을 쫓아다니며, ‘아몰랑**’은 ‘아됫어’로 패러디된다.


*이쁜이 수술질 내부를 축소하거나, 질 점막에 돌기를 만들어주는 등의 전반적인 질 성형을 가리킨다.

**아몰랑본래 제대로 아는 것은 없으나 아는 척하는 경우, 근거 없이 무책임하게 비판만 하는 경우를 뜻했다. 그러나 해당 문장을 처음 발화한 사람이 여성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주로 여성의 비논리성을 조롱하는 목적으로 쓰이고 있다.


한편 메갈리아의 딸들은 ‘여성’으로서의 삶과 맞닿은 구체적인 지표를 가져오기도 한다. 왜 남성은 맞벌이하는 아내를 원하면서 가사분담에는 적극적으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지, 왜 남성이 데이트 성/폭력과 아내 폭력, 가정 폭력 문제에 있어 가해자의 99%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가시화되지 않는지, 성구매(아동 성매매, 해외 원정 성매매) 남성은 왜 성판매 여성이 그러하듯 간단히 범죄자로 치부되지 않고 묻히고 마는지를 묻고 나서는 것이다.


메갈리아의 남성 혐오가 의미 있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여성이 어떤 이유도 논리도 없이 오직 혐오의 대상으로 전시되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둘째, 남성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낙인으로부터 자유로웠으며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비난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시 말해 젠더 구조 속에서 남성과 여성은 대칭적이지도 균형적이지도 않았으며, 이제껏 혐오의 화살은 여성으로만 향해왔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졌다.


지난 3일 디씨인사이드 갤러리는 ‘욕설 및 음란성 게시물 등록을 자제하라’는 공지를 실었다. 수년간 ‘김치년’ ‘보슬아치’ ‘보들보들’ ‘메가보지’가 통용되던 곳에 ‘김치남’ ‘자슬아치’ ‘자들자들’ ‘비트자지’가 등장하자, 양쪽 모두 3일 만에 차단된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혐오는 혐오를 통해서 모습을 감추게 됐다.


일반론이지만 어떤 성을 향한 혐오도 가능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안다. 그러나 혐오를 지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 ‘기존의 혐오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었다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메갈리아의 딸들의 전략 아닌 전략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토록 불쾌하고 무례한 문장들이 아무런 여과 없이 오랜 시간 통용되어 왔었던가를 돌아보게 한다.


메갈리아는 ‘남성 혐오’의 땅도, 단순한 혐오 놀이의 장도 아니다. 메갈리아의 딸들은 소란스럽게 가해자의 언어를 전유하며, 같은 틀 안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를 유쾌하게 뒤집는다. 이토록 불쾌하고 무례한 방식의 역습이 아니고서야 여성 혐오는 달라질 기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여성에게도 남성에게도 여성 혐오란 이미 너무나도 익숙한 일상이 아닌가. 혐오의 문장들을 다시 가해자에게로 돌려, 뜨끔하고 멈칫하는 순간을 제공해 혐오로 혐오를 지우는 수밖에는.


글. 이매진(temporis@nate.com)

메인 이미지 원본 사진 ⓒsouth china morning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