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쌀 사나? 돈으로 쌀 사지인기리에 방영됐던 어떤 드라마의 대사 일부이다. 그렇다. 사랑만으론 삶을 지탱해 나갈 수 없다. 삶에도 사랑에도 돈이 필요하다.

우리는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이인 남녀에게 연인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들이 연애 한다고 말한다. 이 연애의 시작에도 중간에도 끝에도 쌀은 필수적이다. 자연스럽게 돈도 불가결한 존재가 되었다. 쌀을 사는 건 사랑이 아닌 돈이기 때문이다.
 



푸코는 전근대에는 광인이 지역사회에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으며 고유의 사회적 역할을 담당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 광인은 사회와 격리된다. 인간의 표준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을 감금하게 된 것이다. 병리적으로 표준을 판단하는 역할은 의사가 맡게 된다. 이는 감옥이나 추방 같은 가시적 수단을 이용하는 게 아니다. 표준 외의 인간을 치료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치료는 무료 서비스가 될 수 없다. 의사, 약사, 심리치료사와 환자의 관계 사이에 돈이라는 매개체가 존재하는 것이다. 연애를 하고자 하는, 하고 있는, 끝내고자 하는 이들 모두 환자가 되 치료비를 지불한다. 보균자로 낙인찍힌 이들은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낙인을 지운 이들은 돌아가지 않기 위해, 감정적으로 새겨진 낙인을 지우기 위해서.

 


오늘날
, 대표적 병리적 문제아인 솔로들부터 자본의 힘을 빌리는 게 아무렇지 않은 일이 돼버렸다. 동시에 자본은 연애를 시장으로 삼았다. 여기가 소비자본주의의 영역이다. 대표적인 예가 결혼정보업체다. 주요 결혼정보업체 10여 곳의 회원은 6~8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적어도 6만 명의 남녀들이 결혼을 위해 비용을 지불한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온라인 소개팅 사이트인 이음도 인기를 끌고 있다. 올해 2월까지 이음의 회원 수는 7만 명으로 주요 결혼정보업체와 비슷했다. 출판 시장에서도 연애를 하지 않는 이는 소비자가 되었다. ‘연애와 관련된 심리학 저서나 이른바 실전서라고 불리는 책들은 지속적으로 출간되고 있다. 서울 종로에 있는 유명서점은 연애와 관련된 서적들이 모인 파트를 따로 마련해놨을 정도다. 소개팅, 미팅도 같은 맥락 안에 있다. 연애를 시작하길 원하는 이들은 결혼에서도, 온라인에서도, 지식에 관련해서도 자본에 영향력 하에 있게 되는 것이다.

자본의 힘을 빌려 연애를 시작한다고 해서 자본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느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에 가깝다. 현재 한 살 연하의 여성과 연애를 하고 있는 K(25)연애를 하는데 돈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돈 없는 연애는 상상하기 힘들죠. 만나서 대화하는 데에도 자리세가 필요하니까요. 공원 같은 곳에서 만나는 것도 가능하지만 치졸해 보이는 것 같아요. 보통 데이트를 하면 점심 값에 3만 원, 식사 후에 카페를 가면 1만 원 정도를 씁니다. 영화를 보게 되면 거의 2만 원은 쓰고 교통비로도 1만 원 정도 나가니까 대략 7만 원정도 쓰게 되네요. 남자인 제가 보통 많이 내니까 4만 원을 쓰게 되는 셈이죠. 친구들이랑 술을 먹을 때는 2만 원정도 쓰니까 중복해서 들어가는 비용을 감안해도 평소보다 더 많은 돈을 쓰는 건 확실할 거예요.”라고 답했다.

K군의 경우에서 유추한다면. 연애를 시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연애 도중에도 자본의 영향력이 계속 미친다는 가정 또한 가능할 것이다. 경험적인 증거들을 고려했을 때 연애가 소비를 증진시킨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많지 않은 명제이다. 그렇다면 소비자본주의가 연애하지 않는 이를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일까? 연애하지 않는 이를 연애하고 싶은 이로 만들기 위해 사회적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을까? 적지 않은 이들이 연애를 위해 자본의 힘을 빌리고 있다. 이런 점이 위 질문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을 하게 만들어 준다. 결국 연애를 시작하는 것도 연애를 하는 것도 (감정적으로)연애를 끝내는 것도 소비와 연결돼있으니 말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레지 드브레는
68혁명을 소비자본주의에 대한 거부라기 보단 확산 요구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많은 이들에게 68혁명은 소비사회에서 오는 소외와 물질주의의 타파를 주창했던 운동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레지 드브레처럼 기존 68혁명 평가에 일침을 가하는 학자들이 늘고 있다. 이들은 프로테스탄트윤리에저항하며 육체의 쾌락과 성의 자유를 요구했던 68혁명이 소비자본주의 도래의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욕구를 제한했던 마지막 잠금장치가 풀려버렸다는 이야기다. ‘자유연애를 주장하는 것으로부터 촉발된 68혁명이 개인 자유의 보장으로 소비자본주의의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남녀 기숙사간() 이동의 자유를 주장했던 게 소비의 자유또한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68혁명은 파리 낭테르대 학생들이 '여자 기숙사를 개방하라'라는 슬로건을 갖고 학내 집회를 가짐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애를 위한 소비가 아닌 소비를 위한 연애를 하고 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미팅도, 소개팅도 하지 말고 운명적인 사랑을 기다리라는 건가? 로맨틱한 이벤트나 선물이 없는 연애를 하라는 건가? 그러나 이런 반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만은 없는 현실이 눈앞에 있다. 연애를 비추는 화려한 불빛은 이브를 유혹하는 뱀의 혀처럼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 멋지고 쿨한,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연애를 위해 돈을 쓰지 않겠냐고 우리에게 묻고 있다. 많은 이들이 포섭되고만 이런 현실에서 우리의 힘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 내가 그렇더라도 같은 생각을 가진 상대방을 '운명'처럼 만나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다만 자신에게 있어서 깨닫고 고민하는 것과 그렇지 않음은 큰 차이인 게 분명하다. 결국 목적과 대상이 문제일 것이다. 연애라는 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자각해야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분명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