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필자인 나는 청년이 아니다."



스물일곱이라는 대단히 '청년'스러운 나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청년으로 형상화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문자 그대로 보면, 이는 불가능한 선언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20대가 만드는 20대 언론'을 표방한 [고함20]에서 지난 6년간 일하면서, 또 '청년세대' 담론에 대한 논문을 쓰고, 실제 수많은 '청년층'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이 불가능한 선언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특히 청년담론을 스스로 생산하려는 목표를 가진 청년 당사자들이라면 더더욱, 스스로를 ‘청년’으로 형상화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 글은 '나는 청년이 아니'라는 선언이 왜 정당화될 수 있고 왜 필요한 것인지를 이야기하기 위해 쓰였다.



우선, '청년'이라는 기표는 모호하다. 


흔히들 20대, 넓게는 30대까지의 연령대를 청년으로 분류한다. 자그마치 14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나이를 기준으로 청년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개인들을 '청년'이라는 단어 하나로 퉁 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2030 연령대 안에도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좌파와 우파가 공존하고 있으며,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람들과 빈곤 계층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같은 연령대이지만 서로의 정체성과 사회경제적 지위를 결코 같다고 이야기할 수 없도록 만드는 다양한 차이의 조건들이 2030 청년들을 이렇게 또 저렇게 가로지른다.


하지만 청년들 내부의 다양성이나 이질성은 간과되고, 청년의 동질성이 과장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청년과 그 윗세대, 아랫세대가 연속성 상에 있다는 사실도 함께 무시받고 있다. 연령 혹은 세대가 다양한 사회문제들을 둘러싼 중요한 차이의 기반으로 인식되면서 나타난 일이다. (한국사회에서 세대담론이 유행한 것은 기껏해야 90년대 초반의 ‘신세대론’ 이후의 일이다.) 청년 당사자들이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던 다수의 청년세대담론은 청년의 단일한 정체성을 강조하는 식의 사고방식이 낳은 산물이다. 


최근 논란이 되었던 [조선일보]의 '달관세대'도 그렇다. 일본의 '사토리 세대'를 번역해 만들어진 이 말은, "1980년대 중후반~90년대에 태어난 젊은이 중 미래는 절망적이지만 지금은 행복하다고 말하는, 중저가 옷을 입고 햄버거를 먹으면서도 행복을 느끼는 세대"를 일컫는다고 한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에 만족의 기준을 둘 것인지 아닌지는 개인의 가치관에 따른 라이프스타일 선택의 문제인데, 여기에 '세대'라는 말을 붙임으로써, 청년들의 가치관이 기성세대와는 다르게, 특정한 일반적 경향을 띠게 된 것과 같은 뉘앙스가 만들어졌다. '달관세대'의 설명과는 다르게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행함을 느끼는 많은 청년들은 자신들을 그렇게 규정하는 <조선일보>의 담론이 불쾌할 수밖에 없다.



"달관한 개"



'88만원세대, 삼포세대, G세대, 촛불세대' 등의 청년을 일컫는 세대 명칭들, 그리고 청년들의 가치관과 문화에 대해 세대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담론들(보수화된 청년, 탈정치화된 청년, 개인주의적인 청년, 이기적인 청년, 부모의존적인 청년, 스펙 쌓기에 혈안이 된 청년 등 끝이 없다)은 모두 청년 혹은 세대라는 개념을 경유하면서 '젊은 세대의 동질성'을 부각시킨다. 이러한 담론은 대부분 실제 그러한 청년들이 있다는 사실을 논리적인 근거로 삼는다. 어떤 말을 접붙이든 그러한 청년은 '있을 수밖에' 없다. 앞서 말했듯 청년은 1400만명이 넘게 있기 때문에. 그러나 같은 이유로 그러하지 않은 청년들도 '있을 수밖에' 없다. 청년담론과 세대담론이 필연적으로 공허한 논쟁으로 이어지게 되는 이유다. - 요즘 청년들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다. 내가 청년인데 난 아닌데? 내가 청년인데 난 맞는데? - 요즘 청년들은 국가관과 안보관이 앞선 세대에 비해 투철하다. 난 아닌데? 맞던데? - 끝없는 반복... 


집합체로서 청년, 세대의 특성을 논의하고자 하면, 자연스럽게 전체의 청년들 중 다른 청년들을 탈락시키고 일부만을 ‘청년의 기준’으로 설정하게 된다. 이는 20대나 30대, 즉 ‘연령상의 청년’이 당사자로서 청년 이야기를 하겠다고 선언할 때도 마찬가지다. 청년이 청년을 가장 잘 알 수 있다는 말은 그럴 듯하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어떤 개인이 알 수 있는 청년이란 결국 1400만이 넘는 청년들 중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 일부는 어떠한 식으로든 편향된 표본일 가능성이 높다. 대학생 청년은 고졸 청년을, 대기업 사원 청년은 생산직 청년을, 부자 부모의 아들인 청년은 가난한 부모의 딸인 청년을, 진보정당 당원 청년은 일베 청년을 당사자로서 경험하고 알 수는 없다. 고졸/생산직/저소득층/여성/보수 청년을 대표할 수 없는 대졸/대기업사무직/고소득층/남성/진보 청년이 ‘청년’에 대해 당사자로서 말하겠다고 나설 때 생겨나는 효과는 분명하다. 무언가를 과장하고, 무언가를 삭제하는 식으로 ‘청년 전체’에 대한 논의를 창조하는 것이다.


반복적으로 강조한 청년 내부의 차이 탓에, 이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사용하는 청년이라는 말은 그 어떤 것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청년으로서 청년에 대해 말하는 일’은 화자와 발화의 대상이 도대체 어떤 종류의 청년인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남긴다.



그래서, 청년으로 ‘퉁 치는’ 논의들은 문제의 핵심을 빗겨가거나 심지어 적극적으로 은폐하기도 한다.


88만원세대를 필두로 한 청년층이 경제적 약자가 되었다는 주장은 전반적인 사회 시스템이 노동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빈부 격차를 심화시키며, 삶의 책임을 개인에게 지우는 식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다수의 청년들이 겪고 있는 또 겪어야 할 삶의 문제들이 놓인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만든다. 되레 이러한 담론은 청년의 삶이 힘든 까닭을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세대 간의 경쟁 구도와 ‘기득권 기성세대’의 탓으로 돌리는 식의 상상을 퍼지게 만든다. 사회구조의 개혁과 개선 대신 ‘내 세대가 더 힘들다 배틀’로 사회적 담론을 유도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청년세대에 대한 담론들은 서울 4년제 대학, 특히 소위 ‘명문대’에 재학 중이거나 여기를 졸업한 소수의 청년들에 의해서 그들을 기준으로 만들어진다. 주요언론이 생산하는 세대간 대담회 기사에서 청년층을 대변하는 대표로 명문대 재학생을 섭외하는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명문대로 대표되는 청년세대 내의 기득권에 들지 못하는 다른 청년들의 관점과 이야기는 이렇게 체계적으로 논의에서 제외된다. 요즘 청년들이 스펙 쌓기에 혈안이 되어 있어서 문제라는, 혹은 스펙 쌓기를 유도하는 사회 분위기가 문제라는 담론에서 스펙 경쟁 대열에서 이미 탈락한 청년들은 배제된다. 2012년 대선 이후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청년정책들도 ‘담론이 되지 못한 청년들’, 예컨대 고졸이나 전문대생들, 지방 거주 청년들과는 별다른 관련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개인주의, 학벌주의, 가벼운 연애, 국가관 등 가치관을 둘러싼 ‘요즘 청년들’에 대한 논의는 사회의 문제를 청년들 개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요즘 젊은 것들이 이래서 문제라는 식의 담론들에서 지적하는 ‘이래서’는 사실 청년들에게만 귀속되는 배타적인 특성이 아닌 경우가 많다. 예컨대, 대학생들이 너무 경쟁 지상적이며, 학벌주의에 물들어있으며, 부모에게 의존적이라는 이야기가 팽배하지만 청년들의 몸에 이러한 특성이 생물학적으로 새겨져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 혹은 가족 단위로 벌어지는 무한 경쟁이나 학벌주의를 체화하고 있는 것은 한국사회 전체이지 청년 집단이 아니다. 그러나 자꾸만 청년들에게서만 사회문제를 보려하는 습관은 이 문제의 해결책을 청년들을 꾸짖고 계몽하는 데서 찾는 수준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왈왈!"



게다가, '청년'이라는 기표에는 이미 권력관계가 포함되어 있다.


한국사회는 청년이라는 단어, 혹은 그 구체적인 연령집단에게 다양한 욕망들을 투사한다. 사회진보를 성취해 줄 변화의 동력, 미래의 한국경제를 책임질 인적자원과 같은 식으로 기성 담론은 저마다가 원하는 미래를 열어줄 열쇠를 청년에게서 찾는다. 너도나도 한마디씩 청년을 규정하기 위한 경쟁을 하는 것은 사실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청년 담론이 많아진 사실을 사회적으로 청년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좋아할 수만은 없다. 동시에 이것이 청년과 청년을 규정하고자 하는 사람들(기성세대)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 관계를 증명하는 탓이다. 기성세대와는 다른 ‘청년 정체성’을 부여받음으로써 청년은 (법적으로는 기성세대와 같은 성인이지만) 사회적으로 ‘특별히’ 보호받아야 할 ‘대상’, 그래서 알아내고 규명해야 할, 또 관리해야 할 대상이 된다. 청년에게 일반적으로 달라붙는 정체성이란 ‘미완성, 미성숙, 정제되지 않음, 패기, 열정’과 같은 나이를 기준으로 한 편견들에 가깝다. 


청년이 스스로 ‘청년으로서’ 발화하는 방식이 문제적인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청년의 발언은 사회적으로 ‘패기는 있지만 아직 뭘 잘 모르는’, ‘참신하지만 정제되지 않은’, 미성숙하고 미완성인 발언으로 일정 정도 평가절하 된다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화제가 되었던 ‘최씨 아저씨에게 보내는 협박편지’ 대자보의 예를 들 수 있다. ‘정규직 과보호’에 대한 최경환 경제부총리를 비판한 이 대자보는 20대 청년이 명문대에 붙였다는 이유로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최씨 아저씨’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자보에 대한 사회적 주목도와는 반대로 이 자보 이후 만들어진 사회담론의 결은 아쉬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불쌍한 청년’과 ‘최씨 아저씨’를 둘러싼 가십으로 자보가 소비되어 버린 것이다. 대자보에 공감하는 사람들과 언론들도 ‘청년들의 아픔’이나 ‘대자보를 쓴 청년의 용기’와 같은 방식으로 청년의 이미지를 소비하기 급급했고, 대자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뭘 모르고 하는 짓’이라고 깎아내리기에 분주했다. 어디에도 고용 안정성과 정규직/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논리적 토론이 들어갈 자리는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청년으로 소비되어 버림으로써 실제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와 동떨어지게 되는 이러한 상황을 청년 당사자 프레임의 중요한 한계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최씨 아저씨 대자보' ⓒ 인사이트



물론, 그렇다고 해서 2030세대가 청년이 아닌 것도 아니고, 청년이라는 단어가 언제나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의심 받지 않고 있는 청년이나 청년세대라는 집합명사, 청년세대 내부의 단일성에 대한 신화, 그리고 청년세대와 ‘불쌍함, 미성숙, 무지, 비독립’ 등의 단어들 사이에 만들어져 있는 연결 관계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한 작업을 경유함으로써만이, 청년들이 실제 ‘청년 문제’라고 불리고 있는 사회 현상들을 해결하고, 기성세대와 실질적으로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 인정받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임을, 나는 믿는다.



글. 페르마타(fermata@goham20.com)


* 이 글은 함께일하는재단에서 발간하는 <함께일하는사회> 22호에 기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