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M&S의 첫 만남은 개트윅에서였다. 나는 전날 저가항공의 이른 비행기를 타기 위해 나는 오슬로의 버스터미널에서 밤을 꼬박 새야만 했다. 노르웨이의 공항 음식은 당연히 사치였고, 라이언에어의 기내 음식을 사 먹는 노르웨이 손님을 부러워하며 잠이 들었다. 개트윅공항에서 입국심사를 마쳤지만 버스요금을 절약하기 위해 미리 예매해놓은 공항버스는 2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영국 입국심사가 노르웨이 거주허가증 때문에 싱겁게 끝나버린 탓이기도 했다.
배고프고 지친 내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MARKS&SPENCER SIMPLY FOOD. 그곳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형형색색의 제품들이 쌓여있었고, 다양한 종류의 파스타, 또띠아, 치킨이나 스테이크 등이 포장을 뜯기만 하면 먹을 수 있는 상태로 준비되어 있었다. 심지어 가격도 저렴해 보였다. 나는 세계에서 물가가 제일 비싼 그리고 재화의 종류가 적은 나라 노르웨이에서 곧 왔고 수많은 종류의 물건과 3£ for 2같은 묶음상품은 나를 현혹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한 달 후에 영국의 대형마트들은 자본주의의 종착지를 보여준다는 것을, 그리고 그 자본주의의 완성은 너무나 매력적이고 동시에 너무나 잔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본주의의 치명적 매력
사실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나는 ‘First Price’를 주로 이용했지만 다른 제품들도 자주 구매했다. 처음 사보는 다른 제품들도 언제나 만족스러웠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이 두렵지도 않았다. 품질은 보증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노르웨이에서의 쇼핑은 언제나 무언가 부족했다. 한 마디로 재미가 없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마트에서 제공해 주는 제품을 살 뿐, 선택이라는 나의 주체적인 단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여러 제품 사이에서 고민하다 하나를 장바구니에 집어넣는 것도, 저번엔 이걸 먹어봤으니 다음에는 다른 브랜드를 먹어보는 것도 없었다. 나는 먹기 위한 구매가 아니라, 구매를 위해 구매하는 자본주의적 마인드를 잘 학습한 자본주의의 수제자였으니 지루한 것은 당연했다. 소박한 북방식 목조 건물, 4월에도 아직 풀이 나지 않은 황량한 길. 언제나 같은 내용물의 비닐백을 들고 걸어가는 나는 문득 배급을 받고 집에 돌아가는 소비에트 국가의 한 개인을 떠올리곤 했다. 그런 내가 시저 드레싱 종류만 20개에 달하는 영국의 슈퍼마켓에서 황홀감을 느낀 건 당연했다.
그런데 이 마트에도 ‘급’이 있다. 같은 종류의 제품, 예를 들어 ‘오렌지 주스’를 산다고 하면 고급 마켓인 M&S의 것은 비싼 대신 매우 맛있고, 대중 마켓인 테스코(Tesco)의 것은 저렴한 대신 그저 그런 맛이다. 각 마트들이 보유한 재화가 다르기 때문에 각기 내세우는 대표제품이나 프로모션이 있어 이곳 저곳 가는 재미가 있다. 친구들을 만나면 세인즈버리에서는 뭐가 맛있고, M&S에서는 이게 좋고 하는 류의 정보를 교환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조리식품 아니라 재화별로 큰 차이가 나기 어려운 파스타면도 20개 내외의 브랜드가 진열되어 있다. 푸실리만 해도 15가지. 어떤 제품이 좋은지 오늘 선택의 결과도 잘은 알 수 없지만 그곳에서의 쇼핑은 언제나 행복했다. 난 슈퍼마켓에 가는 것이 진짜로 좋았다. 그곳은 언제나 천국이 현실 속에 자리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구경만으로도 좋았고, 다 사 먹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하나의 제품을 사더라도 이 수많은 제품 속에서 하나를 고른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청크가 씹히는 갓 짜낸 것 보다 맛있는 오렌지주스와 1000원 짜리 닝닝한 오렌지 주스를 한 곳에서 살 수 있는 자본주의를 찬양한다. Long live M&S.
자본주의의 잔인함
최대한 나눌 수 있을 만큼 소비자의 욕구를 나누어 그에 대응하는 재화를 제공해 주는 영국 대형마트를 보며 나는 자본주의의 완성이란 이런 형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이 너무나 짜릿한 만큼 잔인하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다. 별 생각 없이 구매한 ‘시저 샐러드 드레싱 네 병.’이 자본주의를 설명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일단 네 병을 저렴한 순서대로 시식했다. £0.59, 대략 우리나라 돈으로 800원 정도 하는 저렴한 드레싱은 도저히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것 같은 맛이었다. 다음 것은 먹을 만 했지만 여전히 맛이 없었고 평범한 시저샐러드, 그리고 식당에서 먹는 것 같은 맛있는 시저샐러드를 차례로 경험했다. 각 병의 가격과 맛은 너무나 절묘했다. 20펜스 차이의 상품은 20펜스 수준의 맛의 차이가 났다. 맛은 돈이었다. 혹은 그 역이거나.
드레싱에 많은 돈을 지불할 용의가 있는 사람도, 혹은 돈이 얼마 없어서 고민을 하는 사람들도 가격대마다 촘촘하게 박혀있는 수많은 재화들이 상품을 장바구니로 이끈다. 판매자와 소비자가 타협을 이룰 수 있는 모든 가격에 각기 다른 샐러드 드레싱이 스크럼을 짜고 사람들이 구매를 포기하지 않게 만든다. 판매자와 소비자의 효익 모두를 만족시켜 효율의 극대화를 달성하는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독점따위 없고 돈 낸 만큼의 맛(효익)을 보장하는 효율이 끝장나는 교과서같이 바람직한 자본주의.
그런데도 난 영국에 도착한 뒤 처음으로 대형마트에 혐오를 느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싼 게 좋은 것이라는 건 너무나 당연하게 습득하고 있었다. 새삼 충격을 받을 이유는 없었지만 먹는 문제여서였을까. 나는 이 맛없는 샐러드를 먹는 한 가족의 저녁 풍경을 생각했다. 계층이 샐러드에까지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회. 제품의 수만큼 촘촘한 계급. 노르웨이에선 모두 비슷한 맛의 샐러드를 먹었다. 적어도 집에선 같은 수준의 것을 먹었다. 그런데 이 화려한 도시에서 누군가는 정말 먹을 수 없는 맛의 샐러드를 매일 먹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영국의 대형마트를 그리워한다. 유럽에서 살고 싶은 도시를 고르라고 한다면 여전히 런던을 고를 것이고 그 이유 중에 M&S가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나는 싫증을 쉽게 내는 실증주의자라 노르웨이의 단조로움을 견디지 못할 때가 있다. 그리고 서울의 나는 영국 테스코(Tesco)가 운영하는 홈플러스를 가장 좋아하고, 다국적기업의 새로운 제품들이 매대를 더 다채롭게 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대형마트와 자본주의의 잔인함을 알고 있지만, 좋은 걸 아니 길들여 진 것을 어쩌겠는가. 소시민인 나는 돈 잘 버는 사람이 되어 모든 선택지가 내 지갑 안에 있는 사람이 되길 노력할 뿐이다. 맛없는 샐러드를 먹는 가족의 저녁식사를 최대한 마음 속에서 지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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