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의 군부독재에 대항하기 위해 광주시민들이 봉기한 5.18 민주화 운동이 35주기를 맞았다. 사망, 부상, 실종 등으로 피해를 본 사람만 5,000명이 넘는다. 명백한 군부독재의 탄압이었다. 5.18 민주화 운동 피해자들은 지금도 매년 5월 18일이면 눈물의 추모식을 올린다. 그러나 그들의 눈물은 아랑곳하지 않고 “광주는, 폭동이야!” 라는 선동과 선전을 일삼는 집단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선동과 선전에 휘둘리지 않으며 팩트로 다져진 보수우파’라고 소개한다. 다들 예상했겠지만, 그들은 일간베스트(이하 일베) 사용자들이다.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 그러니까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
-반도의 흔한 일베 사용자-
팩트를 중요시하면서 언팩트적 발언을 일삼는 일베의 '광주 폭동설'은 지만원 박사(이후 박사 생략)의 ‘북한 개입설’에 근거한다. 지만원 씨는 북한군이 연세대·고려대 학생으로 위장하여 광주로 진입하였고 그들이 정부와 계엄군에 맞서 폭동을 지휘했다고 주장한다. 북한이 개입하다니 무시무시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슬아슬하기도 하다. 왜 아슬아슬하냐고? 지금부터 내가 ‘광주 폭동설’의 근거가 된 ‘북한 개입설’을 논파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베야, 잘 들어봐 ⓒMnet
#북한군 600명설
ⓒ오마이뉴스. 원래는 '지만원의 시스템클럽' 게시글을 캡쳐한 사진이었습니다만,
시스템클럽 측의 항의로 2015년 5월 18일 12시 53분에 사진을 대체, 수정했습니다
'북한군 600명설',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말도 안 된다. 지만원 씨가 북한군 600명이 개입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제시한 세 가지 근거 중 첫 번째 근거는 다음과 같다.
근거1 600명의 광주시민이 톨게이트에서 20사단 지휘부의 군용 차량 14대를 무력으로 탈취한 뒤 군인 행세를 하며 광주 아시아자동차에서 장갑차 4대와 버스와 트럭을 대량 탈취하였다. 평범한 광주시민 600명이 군용 차량을 습격하고 광주 아시아자동차에서 탈취한 장갑차를 운전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북한군이 틀림없다.
[월간지 관련기사] 20사단 충정 작전보고 국방부 원자료 전문(신동아 1988.12) ⓒ5.18연구소
우선 근거1에 관해 이야기해보자면 광주시민이 군용차량을 탈취한 것은 맞다. 그러나 '600명'이라는 인원과 '톨게이트'라는 장소는 명백히 거짓이다. '20사단 충정 작전보고 국방부 원자료 전문'에 의하면 군용차량 14대를 탈취한 광주시민은 600명이 아닌 2,000명이었으며 톨게이트에서 탈취한 것이 아니고 광주 공단에서 탈취하였다. 광주시민 2,000명을 1/3 수준인 600명으로 왜곡한 것은 자신이 주장한 ‘북한군 600명설’에 해당 사건을 끼워 맞추기 위한 왜곡된 수사로 추정된다.
ⓒ경향신문 (1995.7.20)
지만원 씨는 광주 시민에 의한 차량 탈취 당시 마치 '지휘부'의 차량이 탈취당한 것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실제로 탈취당한 건 지휘차량 '인솔대'의 차량이다. 지휘부 차량이 탈취당한 것과 인솔대 차량이 탈취당한 것의 차이는 대통령 차가 탈취당한 것과 대통령의 인솔대 차량이 탈취당한 것만큼이나 다른 이야기다. 그러나 지만원 씨는 북한군이 아니면 탈취할 수 없을 것이라는 무게감을 연출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모종의 이유에서인지 ‘지휘부’라는 용어를 고집한다.
KM900 장갑차의 원형인 피아트 6614 내부. 운전면허 1종을 갖고 있으면 꽤 익숙해 보일 것이다 ⓒPietro de' Castigilioni
지만원 씨는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들에 의해 사용된 장갑차 역시 '북한군 600명설'과 연관 짓는다. 평범한 광주시민이 어떻게 장갑차를 몰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어불성설이다.
광주 공단에 있던 2,000명의 시민이 인솔대 차량을 탈취한 이후 그들 중 600명만이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향한다. 600의 인원이 아시아자동차를 목적지로 선정한 시점부터 그들은 이미 장갑차와 버스 등을 탈취할 의지를 갖췄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굳이 아시아자동차로 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장갑차를 탈취할 의지가 있는 600명이다. 장갑차 탈취를 계획한 시민 중 장갑차를 몰아본 군필자가 몇 명쯤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혹시나 장갑차를 몰 줄 아는 군필자가 전혀 없었더라도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사용된 KM900 장갑차는 상대적으로 운전이 간단한 차륜형 장갑차다. 차륜형 장갑차의 운전 방법은 화물차와 비슷하다. 광주시민 중 화물차를 몰 줄 아는 시민이 있었다면 미숙하게나마 운전할 수 있었다.
근거2아시아자동차와 예비군 무기고에서 장갑차와 무기를 탈취할 때 가담한 시민 수가 600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광주에서 민주화 운동이 진행되던 중 서울에서 연·고대생 600명이 내려올 것이라고 하는 방송을 자주 했다. 군용 차량, 장갑차 탈취 등의 현장에서도 600명이란 인원이 자주 등장한다. 이들 600명은 사실상 연·고대생을 가장한 뒤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동으로 이끈 북한군이다.
600이란 인원이 자주 등장한다는 근거2 역시 ‘북한군 600명설’에 끼워 맞추기 위한 지만원의 수사다. 지만원 씨가 되뇌는 '600'이란 숫자는 지만원 씨의 주장대로라면 ▲공주 공단에서 인솔대 차량 탈취 ▲아시아자동차와 무기고에서 장갑차와 무기 탈취 ▲연·고대생의 광주 민주화 운동 지원 이렇게 세 사건뿐이다. 그러나 이 세 사건 중 검찰과 안기부 기록상 600명이 명시된 곳은 한 군데뿐이다. 군용차량 탈취 사건의 참여자는 위의 근거1의 반박에서 보았듯 600명이 아닌 2,000명의 광주 시민이었으며 연·고대생 지원은 증인마다 30~40명, 300명, 600명 등 그 수치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 사건 중 진짜 600명이 등장한 건 장갑차와 무기를 탈취한 사건 하나뿐임에도 지만원 씨는 '북한군 600명설'을 관철한다.
근거3 북한군이 국군과 계엄령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던 비결은 600명이 한 번에 남파한 것이 아니고 미리 광주에 진입해 있거나 적은 인원이 꾸준히 남파한 뒤 광주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지만원 씨의 근거3을 보면 600명의 북한군이 남한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한 번에 남파된 게 아니라 광주에 소수가 먼저 잠입해 있거나 소수가 꾸준히 남파한 뒤 광주로 잠입했다는 주장도 한다. 그러면서도 연·고대생은 마치 600명이 한 번에 들어온 것처럼 이야기한다. 지만원 씨의 주장부터가 소수의 북한군이 꾸준히 광주로 잠입한 것인지 아니면 연·고대생으로 위장한 북한군 600명이 한 번에 들어온 것인지 불분명하다. 600명이란 인원을 '북한 개입설'에 작위적으로 끼워 넣다 보니 자가당착의 오류를 범한 것이다.
게다가 당시 광주는 2만 명이 넘는 계엄군에 의해 광주 시내가 봉쇄된 상황이었다. 의경이 차벽만 설치해도 사람 하나 지나기 힘든 데 장갑차와 차벽, 그리고 계엄군으로 봉쇄된 광주 시내로 600명의 연·고대생이 진입했다는 그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원래는 '지만원의 시스템클럽' 게시글을 캡쳐한 사진이었습니다만,
시스템클럽 측의 항의로 2015년 5월 18일 12시 53분에 사진을 대체, 수정했습니다
그 외에도 지만원 씨의 사진 자료에서는 북한 특수군이 몽둥이 전문가이고 몽둥이 규격이 일정하므로 사진 속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북한군이라는 신박한 주장을 한다. 또한 아시아자동차에서 ‘군용트락 374대’를 탈취했다는 거짓 주장을 하기도 한다. ‘몽둥이 북한군설’은 우선 몽둥이 규격부터가 일정하지 않고 너무나 신박한만큼 굳이 반박하지 않겠다.
5.18 관련 사건 수사결과 ⓒ검찰청
반박을 해볼 만한 객관적 수치인 ‘군용트락 374대’를 주시해 보겠다. 검찰이 1995년에 발표한 ‘5.18 관련 사건 수사결과’에 따르면 탈취된 버스와 차량은 ‘군용트락 374대’가 아닌 56대라고 명시되어 있다. 지만원 씨보다는 검찰기록이 좀 더 공신력 있어 보이니 374대보다는 56대를 믿어보기로 하겠다.
ⓒ연합뉴스. 원래는 '지만원의 시스템클럽' 게시글을 캡쳐한 사진이었습니다만,
시스템클럽 측의 항의로 2015년 5월 18일 12시 53분에 사진을 대체, 수정했습니다
지만원 씨는 북한군이 아니면 연출 불가능하다고 하며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의 모습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첨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연합뉴스가 보도한 기사를 통해 사진의 주인공이 5.18 민주화 운동에 참가했던 임성택 씨(52)와 구모 씨(51)였음이 밝혀졌다. 광주시와 5·18 역사왜곡대책위원회에서는 "이들을 북한군으로 매도했던 왜곡세력에 대해 민·형사상 대응을 본격적으로 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의 5.18 기념일, 영화, 민중가요
지만원 씨는 북한의 5.18 기념일과 5.18을 주제로 한 '임을 위한 교향시'라는 영화를 통해 북한과 광주 민주화 운동을 결부시킨다. 그러나 이 주장도 너무나 간단히 논파 가능하다.
DailyNK의 평양출신 기자가 쓴 기사에 의하면 북한은 5.18뿐만 아니라 4.19 혁명도 남한의 반미투쟁, 반정부 시위라고 선전하며 기념일로 기리고 있다. 영화 역시 5.18을 주제로 한 영화뿐 아니라 4.19를 주제로 한 영화도 무려 3부작으로 만들어졌다. 4.19도 북한이 개입되었다는 주장을 할 것이 아니라면 5.18 민주화 운동에 북한이 개입되었다는 주장은 적절치 못하다.
지만원 씨가 '북한 개입설'을 주장하는 또 다른 근거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민중가요에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 민주화 운동을 기리는 노래인데 이 노래가 북한에서 5.18을 기리기 위해 만든 영화인 '임을 위한 교향시'에 삽입됐다는 것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 민주화 운동 중 사망한 윤상원과 1979년에 노동운동 중 사망한 박기순을 기리기 위해 1982년에 만들어진 민중가요다. 이때 노래의 가사를 작사한 게 소설가 황석영 씨인데 황석영 씨는 1989년에 방북한 뒤 1991년에 논란이 된 영화인 ‘임을 위한 교향시’를 북한에서 제작한다. 황석영은 영화 제작 과정에서 자신이 작사한 '임을 위한 교향시'를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삽입한다.
그러나 이 역시 북한과 연결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북한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왔다면 북한과의 연관성을 조금이나마 떠올릴 수 있겠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위의 문단에서 알 수 있듯, 황석영이 우리나라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든 지 10년 가까이 지난 뒤에야 북한에 노래가 전파됐다. 또한 영화 '임을 위한 교향시'의 제작자가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작사가인 황석영이라는 특수성 역시 무시할 수 없다. 그러한 특수성을 배제하더라도 북한에 1991년에 퍼진 노래를 1980년대 초에 있었던 5.18 민주화 운동과 인과관계로 결부하려는 시도는 옳지 않다.
이쯤만 해도 지만원의 '북한 개입설'은 거의 반박이 끝난 것 같지만 아직 남아있다. 지만원의 정보 수집 능력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2부를 기대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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