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카드는 스펙을 보지 않고 인재를 뽑겠다며 ‘스페셜 트랙’ 전형을 만들었다. 전형을 통과한 합격자의 면면은 어떨까. 주요 학술지에 논문을 기고한 물리학도가 있다. 유능한 과학도임이 분명하다. 그는 단지 금융 관련 스펙을 갖추지 못했을 뿐이다. 권위 있는 공모전에 10번이나 입상한 청년도 있다. 스카이 출신은 아니지만 그녀는 이화여대를 나왔다. 스펙을 안 본다는 전형에서도 화려한 경력을 가진 이들이 취업에 성공한다.
스펙을 차치하고 뽑았는데, 뽑고 나니 스펙이 좋았다. 스펙은 취업 성공에서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 정도는 된다. 이는 ‘적은 채용 인원’이라는 구조적 함정 때문이다. 현대카드가 채용한 인턴사원의 정원은 70명이었다. 그중 10%를 ‘스페셜 트랙’으로 뽑는다. 70명 중 7명. 전국에 있는 대학 수만 300개가 넘는다. 대학생 수와 비교하면 턱 없이 적은 채용 인원이 그 자체로 ‘좁은 문’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기업이 스펙을 보지 않는다고 다짐은 유효하지 않다. 지금처럼 고용이 위축된 환경에서 청년들은 스스로 무한 경쟁의 판에 뛰어들게 된다.
청년들의 스펙대란은 개인의 차원을 떠난사회적 문제다. ⓒ협동조합뉴스
적은 채용은 비단 사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공기업도 마찬가지다. 지금처럼 얼어붙은 고용시장이 변하지 않는다면 스펙대란은 지속될 터다. 취업하기 위한 청년들은 고통스러운 스펙대란을 감내해야 한다. 정부 역시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국가직무능력표준(NCS)를 도입했다. NCS는 전 산업을 금융·경영 등 모두 24개로 나눈다. 이를 다시 세부 직무에 따라 857개로 분류한다. 해당 지원자의 직무 이해도를 8등급으로 평가한다는 것이다. 공공기관은 이 점수를 반영해서 지원자들을 채용한다. 정부가 기대하는 바는 스펙경쟁 완화다.
정부는 NCS로 인해 스펙대란이 해결될 것이라고 장담한다. 과연 그럴까? ⓒ한국직업능력개발원.
2017년까지 모든 공공기관이 이에 동참해야 한다. 정부는 사기업들도 점차 스펙타파 채용을 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2년 후 청년들의 스펙대란이 사라질 것 같지가 않다. 거듭 말하지만, 채용 인원 자체가 지나치게 적기 때문이다. 바늘구멍 같은 공채시장을 뚫기 위해서 청년들은 이제 토익 고득점뿐만 아니라 NCS 고득점도 목표로 할 터다. 벌써 NCS 고득점을 강의하는 학원이 생겼다고 한다. NCS를 주관하는 한국산업인력공단의 박영범 이사장은 “NCS는 닫힌 노동시장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촉매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NCS 역시 또 하나의 스펙이 될 텐데, 노동시장의 변화까지 바라는 것은 너무 나간 것이 아닐까.
그동안 기성 언론들은 스펙대란의 원인 중 하나로 청년들의 눈높이를 이야기해왔다. 이는 300만 명이 넘는 청년 실업자들을 은폐하는 기만이다. 좁은 채용 시장을 뚫기 위해서, 어쩔 수없이 경쟁에 뛰어드는 청년세대의 고통을 모르는척하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고용시장의 위축이라는 근본적 원인은 가려진다. 차라리 솔직하게 인정하자. 그러나 인정하되 막 던지지는 말자. 한국에 일자리가 없으니 “중동에 가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이 시각에도 청년들의 인내심은 임계점을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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