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 혁명의 주동자는 청년들이다. 이 청년들은 언론이 통제된 리비아의 상황을 주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와 같은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중계하며 목숨을 걸고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갑자기 리비아의 청년들이 보이지 않는다. 시위 주동자가 혁명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이다. 이집트와 튀니지에서는 청년들이 혁명을 시작하고 마지막 승리까지 얻어냈는데, 리비아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리비아의 시위대는 군사력(국제사회의 도움)은 물론이고 아직 시위대를 이끌 청년들의 힘이 필요한 상태이다. ‘카다피 이후를 논의함에 있어 민주화의 담론을 가진 리비아의 청년 시위 주도층이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시위는 어떻게 시작되는가
 

시위는 보통 문제의식을 가진 소수의 지식인과 이런 담론을 지지하는 다수 민중의 연대로 시작된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들어 설명하자면, 운동 담론의 행위자는 도시의 교육받은 중산층(대학생과 지식인)이었고, 민중은 권위주의 체제 하 정치권력, 생산체제, 성장 배분으로부터 배제된 사회집단인 노동자, 농민, 서민 대중이었다. 중산층의 대학생과 지식인 그리고 민중의 힘을 합쳐 군부 독재에 대항하는 등 민주화에 목표를 둔 투쟁적 민중운동이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이다.(민중운동이 1980년대에 최초로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민주화에 목표를 둔 투쟁적 민중운동은 1980년대의 운동이 최초다.) 리비아의 경우도 시위가 시작된 메커니즘은 크게 다르지 않다. 시위가 촉발된 이유는 카다피의 독재와 장기집권을 막고 카다피가 구속한 정치범들의 석방을 요구하려는 것이었다. 즉 카다피에게 민주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즉 카다피에게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청년층의 소수가 민주화의 불을 짚였고, 역시 평소 불만을 가진 대중과 연대하여 시위는 확산된 것이다


대중에서 민중으로



막강한 군부에 대항해 승리로 이어질 수 있는 시위가 되기 위해서는 민주화 담론의 주창자인 지식인의 힘도 필요하지만 그를 지지하는 민중의 규모가 중요하다
.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에 민주화 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박정희의 경제 개발 계획으로 소위 말하는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중산층이 두터워졌기 때문이다. 경제 문제에 허덕일 경우 대중들은 정치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겨우 겨우 먹고 살만해져서 보니 노동문제가 심각하다는 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정당성 없는 군부의 독재와 장기집권에도 불만이 가득했다. 그래서 중산층의 대학생들이 먼저 들고 일어났고 이에 다수의 민중이 가담하면서 민주화 운동이 시작했고 민주화를 성취할 수 있었다

리비아는 우리나라의 경우와 상이한 양상을 보인다. 경제 발전으로 민중이 다수가 된 것은 아니다. 리비아의 석유 매장량은 적지만 질이 좋아 경제성이 높다. 석유로 부를 축적했을지라도 이는 배분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경제적인 이유에서 민중의 규모가 커졌다고 보기는 어렵고, 인터넷의 발달을 주요 이유라고 본다. 부족 간 내전으로 변질되긴 했지만, 언론이 통제되는 상황에서도 민주화의 불씨가 커지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리비아 내 청년층은 인터넷에 현장 상황을 올렸다. 인터넷을 통해 국제 사회의 관심과 지지가 높아졌고 시위대는 이에 힘을 받아 운동을 지속할 수 있게 된 것이다.(물론 지금 군사력의 측면에서는 정부군에 밀려 국제 사회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긴 하지만) 청년층의 문제제기가 통신의 발달로 대중의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민주화 담론은 성공적 민주화를 위해 필수적이다




운동권의 민주화 담론이 구체적이지 않다면 이는 금세 기존의 질서 내로 통합되어 새로운 엘리트층을 형성하는 패턴을 번복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 그런데 정국의 향방을 논의하는 과정에 민주화를 외친 주동자가 심지어 참여조차 하지 않는다면, ‘민주화 이후가 운동권이 가졌던 비전과 이념에 따라 변화할 수 없다. 다시 우리나라의 경우를 살펴보면, 절차적인 부분에 있어서 민주화는 성공했다. 언제부터 민주주의 국가인지를 가리는 척도인 쉐보르스키의 조작적 정의에 '형식적'으로는 들어 맞기 때문이다, 1) 선거에 의한 최고 통수권자 선출 2) 선거에 의한 의회 구성 3) 복수정당제 4) 동일한 법 체제 하에서의 권력 교체가 조작적 정의의 내용이다. 위의 4가지 요건에 모두 부합하는 한국 민주주의의 시점은 1997년 정권교체이다.(1992년 문민정부 출범으로 보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위의 시점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공고화 시기이고, 우리나라가 '실질적 민주주의'를 이뤘다고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민주화는 됐지만 정치 참여의 폭이 넓어졌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엘리트에 의한 민주 정치에 머물러있다. 80년대의 운동권 세대는 민주정부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으면서 권력을 갖고 조건도 갖추었으나 비전과 현실적인 대안을 만들지 못해서 기득권력들을 끌어들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민주정부는 무엇을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방향성과 문제의식을 상실했다. 민주주의의 가치에 상응하는 새로운 대안 발전모델의 모색을 통해 재벌 중심의 권위주의 성장모델을 대체하는 것.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생산구조 개혁이나 노동.사회 정책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 고민이 적었던 것이다. 민주화 주창자가 자취를 감춘 리비아도 이와 같은 길을 걸을지 모른다민주화 그 이후를 논의하는 데 있어, 민주화 운동 담론의 행위자가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위기나 다름없다. 앞서 우리나라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운동권 자체가 가진 담론은 한시적이고 구체적이지 않기 때문에 이들이 논의에 참여한다 해도 완전한 발전 모델이 나오기 힘들다.



더 중요한 것은 민주화 이후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모델을 계획하기 위해 리비아의 청년층은 다시 모습을 보여야 한다. 부족국가라는 리비아의 특성 상 통일된 국가 구조를 갖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그것이 군사 정부의 형태여서는 안 된다. 민주화 운동에서 부족 간 내전으로 시위의 본질이 변색되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카다피 퇴진, 군사 정부에게서 정권을 빼앗는 것이다. 절차적 민주주의 이후 실질적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룰 것인지에 대한 숙고가 요구된다. 이 운동에 불을 붙인 인터넷 상의 청년층과 운동 담론의 행위자는 수면 위로 떠올라 카다피 이후의 체제를 깊이 생각하고 실천적 모습을 보여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