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교수님의 같은 수업을 재수강했는데, 수업내용, 커리큘럼은 물론이고 교수님이 어디서 어떤 개그를 사용하시는지도 다 같았고, 강의자료도 변한 게 없었다. 평가방식도 차이가 없었고, 심지어 시험문제마저도 지난 학기와 동일한 문제가 여러 개 나왔다.” 자신이 재수강한 교양 강좌에 대한 대학생 최지욱 씨의 의견이다. 재수강을 해 본 경험이 있는 대학생들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이야기다. 강의가 개선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주관식 문항을 빽빽이 채운 강의평가를 적어도 결국 강의는 ‘재탕’을 벗어나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강의평가에 대한 학생들의 책임감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어차피 변하는 게 없는데 제대로 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대학내일 20대연구소가 지난 6월 13일 발표한 강의평가의 실효성에 관한 보고서에 따르면, 대학생들은 강의평가의 다음 학기 수업 반영정도를 매우 낮게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61%의 학생들이 반영되지 않는 편이라고 답했으며, 잘 반영되는 편이라고 답한 대학생은 11%에 그쳤다. 강의평가에 참여한다 하더라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객관식 문항은 한 번호로 쭉 체크하고, 주관식 문항은 공란으로 두는 식으로 대충대충 강의평가를 하는 학생들도 많은 게 현실이다.


ⓒ 대학내일 20대연구소

정규직 교수에게 영향력 거의 없어

대학원생 한아람 씨는 자신의 강의평가 원칙에 대해 “정교수에게는 강의평가의 영향이 거의 없을 것 같아서 대충 응답하고, 시간강사에게는 한 사람 밥줄 끊어지는 불상사가 생길까봐 최악이 아니고서는 좋은 평가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정년이 보장된 정교수들의 경우에는 강의평가 점수가 낮다고 해서 커다란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 동국대, 서강대, 한양대 등 일부 대학에서 강의평가를 성과급 차등지급에 활용되는 교수평가의 항목으로 집어넣고 있기는 하지만, 반영 비율이 낮기 때문에 별다른 차이가 발생하지 않는다. 비정규직 강사의 경우에는 재임용이나 강의 배정에서 받는 불이익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크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시간강사의 강의가 전임교수의 강의보다 학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2010년 고대신문이 고려대 수강소감보고서를 분석한 결과가 이를 보여준다. 비전임강사,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 그룹 중 전임강사 그룹이 강의평가 공통문항 10개 모두에서 가장 높은 평점을 받았다. 반대로 교수 그룹은 가장 낮은 평점을 받았다.


평가에 도움 안 되는 모호한 문항도 문제

강의평가 문항이 모호한 점도 강의평가의 질을 떨어뜨리고 무용지물로 만드는 데 한 몫 하고 있다. 개별 강의의 특성이 고려되지 않은 천편일률적인 문항이 가장 문제다. 고려대의 강의평가 문항 중에는 ‘강의계획서에 따라 매 차시 수업이 체계적으로 연결되어 진행되었는가’, ‘담당교수가 해당과목에 필요한 관련 자료를 제시하였는가’와 같은 경우에 따라 답변하기 곤란한 항목들이 끼어 있다. 이화여대의 강의평가 문항에도 ‘강의는 전반적으로 좋았다’, ‘이 강의를 다른 학생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와 같은 모호한 문항들이 많아 학생들에게 지적을 받기도 했다.

강의평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 황당한 문항들도 문제다. 보강 여부, 사이버강의실 활용 여부, 과제 부과 횟수와 같은 항목들은 강의 평가 절차만을 길고 복잡하게 만드는 역효과를 낳고 있다. 대학생 김지영 씨는 “강의 평가 질문 항목 자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강의평가를 대충 하는 편이다. 사이버클래스를 어느 정도 활용했느냐, 조교를 어느 정도 활용했느냐 하는 질문들이 강의가 얼마나 좋은지 판단하는 데 전혀 쓸모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경북대신문

본래 의미를 살리는 강의평가가 필요해


강의평가가 무용지물이 된 상황이지만, 제도 그 자체가 정말로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강의평가는 강의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을 조사해, 추후 강의에 이를 반영하여 강의의 질적 향상을 이루고 수강생의 만족도를 높이려는 본 목적을 가지고 있다. 강사와 수강생 사이에 존재하는 유일한 제도적 소통 통로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제도다. 강의평가를 열심히 하는 편이라고 답한 대학생 이은정 씨는 “수업이 어떠냐고 안 물어봐주는 교수님한테는 ‘저는 이 수업 이렇게 생각해요’ 하고 말할 만한 방법이 강의평가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본래 의미를 살리는, 바람직한 강의평가를 만들기 위해선 어떤 개선안이 필요한 것일까. 대학생 손연우 씨는 “강사에게 점수를 매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진짜 학생들의 의견을 전달하고 반영될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한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 단순히 형식적인 강의평가에 그치기보다는 본 취지인 ‘강의의 질을 높이는 일’에 대해 평가자인 학생들과 평가 대상자인 강사들이 서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의견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간강사뿐 아니라 정규직 교수에게도 실질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제도적 전환과 모호한 문항을 구체적인 문항으로 바꾸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