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힙합을 아느냐?”

1999년, 한국 힙합 씬(계)에 일대 소란이 일었다. 약관을 갓 넘은 듯 한 재미교포 청년 둘이 소위 ‘본토 힙합’이 뭔지 보여주겠다며 당차게 내놓은 <Year of the dragon>이란 앨범 때문이었다. 앨범은 발매와 동시에 즉각적인 반향을 일으켰고, 어느 새 그들은 매니아 층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힙합 씬의 스타로 자라났다. 이 그룹은 한 땐 ‘드렁큰 타이거’라고 불렸으며, 지금은 멤버 ‘DJ shine'의 탈퇴로 솔로로 활동 중인, 한국 힙합의 1세대 ‘타이거 JK'이다.


독특하고 공격적인 보이스 컬러와 가사만큼 매력적이었던 건, 그들이 바로 힙합의 본 고장인 ‘미국’에서 왔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장르의 표피적인 이식 탓에 ‘힙합’이라는 모양새만 간신히 갖추고 있던 국내 힙합 씬에, 거의 최초로 본토 힙합 문화를 이식하며 씬을 발전 시키는데 중요한 계기가 됐다. “‘말’만 빠르게 힙합이 아님”을 몸소 보여준 것이다.

1집 앨범 내내 그들이 외쳤던 일갈은 단순했다.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 힙합이란 장르조차 생소했던 당시로서 그들의 고함은 신선했지만, 다소간의 온도차가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아직 힙합이란 단어조차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데, 그런 힙합이 뭔지 아느냐는 말에선 당연히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후로 1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여전히 힙합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광풍처럼 불어쳤던 ‘디스(Disrespect)대란’. 그것은 지극히 그들다운, 그들만의 해결 방식

현재는 다소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지만, 며칠 간 온갖 포털 사이트의 연예뉴스란은 ‘디스전’ 과 관련된 기사 일색이었다. 지난 21일 발표된 ‘스윙스’의 ‘King swings'라는 곡으로 촉발된 작금의 디스 대란은, 후에 어글리 덕, 테이크 원 등의 언더 MC들의 역 디스곡과 더불어 E-sens, 개코의 디스전 까지 치닫는 숨 가쁜 양상으로 전개됐다. 여기서 디스란, 디스리스펙트(Disrespect)의 줄임말로, 다른 그룹이나 사람을 폄하하거나 공격하기 위한 행동 혹은 노래를 일컫는다(출처 - 위키백과).

디스전은 마치 핑퐁게임처럼 진행된다. 주고받고, 주고받고. 대화의 과정에선 담론이 생기고, 문제의식이 발현된다. 물론 이 과정이 철저히 이성적, 논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때론 지나치고, 극단적일 때도 있다. 2pac이라는 미국의 유명한 힙합 가수의 죽음이 바로 ‘디스’ 때문이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디스전은 가끔 생과 사를 가르는 역할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디스는, 힙합 세계에서 허용될 수 있는 하나의 미덕이자 규칙이기도 하다. 법치국가에서의 시민은, 범죄나 억울한 일이 발생했을 때 사법적 절차에 따라 정당한 소를 제기한다. 마찬가지로 힙합이라는 국가에서 녹을 먹고 있는 래퍼들에게 디스란, ‘라임’과 ‘플로우’와 ‘리스너’라는 재판관들에게 제기하는 하나의 소(訴)와 같다. 지극히 그들다운, 그들만의 합리적 작동 방식인 것이다.

난데없이 ‘켄드릭 라마’가 등장했던 이유

켄드릭 라마는 요새 가장 ‘핫’한 캘리포니아 출신의 힙합 가수다. 비록 정식 앨범은 아니었지만, 네 번째 믹스테잎(원곡이 있는 비트에 자신만의 랩을 얹은 곡들로 만든 테잎)이었던 «오버리 데디케이티드(Overly Dedicated)»를 발표한 후 유명세를 타기 시작해, 최근엔 같은 힙합 뮤지션인 ’빅션'의 ‘control'을 통해 일약 힙합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이 노래에서 켄드릭은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 에이셉 라키 등의 젊고 능력 있는 래퍼들을 디스 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나 ‘Control'은 B.o.B나 루페 피아스코 등의 유명한 가수들까지 디스전에 참전시키면서, 침체되어 있던 힙합씬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켄드릭이 가사를 통해 말했었던 ’경쟁을 통한 발전‘이라는 의도가 제대로 먹힌 것이다. 스윙스 역시 최근 인터뷰에서 “한국 힙합계에 좀 더 적극적인 활동과 분발을 촉구한다.”는 취지에서 ’King swings(디스 대란을 촉발 시킨 노래)‘를 발표했다고 밝혔다. 그가 따온 비트는 빅션의 'Control'이었다. 약간의 파장은 있었지만, 이번 디스 대란의 목적 역시 발전에 방점이 찍혀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자꾸만 가르치려 하는 ‘장외 권력’, 그들의 합리와 이 세계의 합리는 달라

하지만 요새 언론이라는 ‘장외권력’이 내놓고 있는 지극히 ‘당연하고, 도덕적이며, 올바른’ 말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가르치려 안달이 난 듯’한 인상을 지우기 쉽지가 않다. 오히려 다분히 관념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중’이라는 잣대를 인질로 잡은 채, 마치 힙합 씬을 겁박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이는 ‘Control'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과 스윙스가 비트를 따다 쓴 목적도, 또한 디스 대란의 본질도 파악하지 못한 채 훈수를 두고 있는 장님의 꼴과 같다.

그래서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는 질문은, 지금의 충분한 정황 증거만으로도 여전히 유효하다. 대중적, 도덕적 합리성과 힙합의 합리성이란 천양지차다. 때로는 지금과 같이 대중이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다. 하지만 대립에 대한 기계적인 반감이 있는 국민 정서에 그대로 조응하며 ‘무비판’적 태도로 비판을 일삼는 장외 권력의 태도는, 결국 힙합과 대중의 간극을 자꾸 멀어지게 할 뿐이다. 조금은 불편할지라도, 차분히 그들의 ‘정반합’ 과정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머지않아 한국 힙합의 한층 더 진보된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