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신세계'에서 신입 경찰 이자성은 우연히 강 과장의 눈에 띄어 범죄 조직에 잠입하는 ‘프락치’ 역할을 맡게 된다. 이후 이자성의 인생은 궤도를 이탈하여 자꾸만 의도하지 않았던 곳으로 향한다. 결국 그는 본래 자신의 정체성을 완벽히 포기하고 범죄 조직의 이자성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 '신세계' 스틸컷


누아르 영화가 주는 쾌감은 주인공의 윤리적 결단 갈등과, 구조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의 판타지에서 시작된다. 누아르는 새로운 공간을 생성해놓고 그 안에서 펼쳐져야 판타지가 완성되기 때문에 시대나 공간 배경이 뭉뚱그려진다. 애매한 시간과 공간 배경은 현실이 아니라는 안도감을 형성한다.


하지만 누아르와 역사가 만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차남들의 세계사'는 대한민국의 1980년대를 누아르와 연결 지으며 시작한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누아르의 핵심 서사란 무엇인가? 예상치 못한 사건에 우연히 휘말린 한 사람이, 그로 인해 자신의 신분과 정체성마저 모두 잃어버리는 것이 누아르의 기본 뼈대 아니던가? 전두환 장군은 독재자 살인 사건을 수사하다가 독재자가 되어버렸다."


누아르 인생을 산 것은 ‘시대의 장남’ 전두환만이 아니다. 시대의 차남인 주인공 나복만의 인생도 누아르 영화 주인공을 빼다 박았다.


 주인공이 알 수 없는 사건에 휘말린다

 사건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지만 좀처럼 되지 않는다

△ 주인공의 발버둥은 오히려 주인공의 정체성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 결국 주인공은 죽거나 정체성을 잃어버리며 끝난다



소설 '차남들의 세계사' ⓒ민음사


시대와 누아르의 만남


나복만이 살아간 80년대도 그렇다. 소심하고 무지한 택시운전사 나복만은 좌회전이 되지 않아 승객을 잘못 내려줬고 그 죄를 이실직고하러 경찰서에 갔다. 그리고 입력 누락, 정정 취소를 통해 미문화원 방화 사건에 연루되었고, 나복만 자신도 죄와 연관되어 있다고 믿게 되면서 완벽한 범죄자가 된다. 나복만은 운명이 되어버린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실패하면서 끝난다.


소설은 나복만이 연행되었음을 알려주며 시작한다. 이후 소설은 나복만이 연행되기까지의 과정을 되짚어 보듯 서술한다. 이러한 배치는 독자가 나복만의 생애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게 되는 효과를 얻게 된다. 나복만의 성격, 나복만이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을 하나하나 밝혀가면서 독자는 자신을 나복만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나라면 어땠을까.’


이 물음은 나와 나복만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주는 첫 번째 움직임이다. ‘나도 네가 될 수 있다’는 상대방과 자신의 위치 차이를 전제한 동정이 아니라 그 고통을 적극적으로 맞이하겠다는 포즈인 것이다. 이렇듯 작가는 더욱더 독자에게 소설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든다. 하지만 작가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끊임없는 폭로하는 해설자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해설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해설자는 끊임없이 독자를 호명하며 읽는 방향을 조율해주는 역할을 맡는다. 여기까지는 앞서 말한 소설 안으로의 몰입과 일치한다. 하지만 해설자는 결정적인 순간 독자들을 소설 밖으로 몰아낸다. "그래서...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그다음 일어난 일이 궁금한가? 그다음 스토리를 어서 빨리 듣고 싶은가? 그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정작 말하기 어렵고, 쓰기 힘든 것은 고통 그 자체이다. 스토리를 멈추게 하고, 플롯을 정지시키는, 그런 고통이 사라진 이야기란, 그런 고통을 감상하는 이야기란, 사파리 버스에서 내다보는 저녁놀 붉게 물든 초원과 아무런 차이가 없지 않은가!"


해설자는 긴장이 가장 고조되는 부분에서 독자들을 소설 밖으로 나가게 만들었다. 소설의 ‘이야기’라고 하는 가상공간의 절대성을 깨버리고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이 새롭지는 않다. 작가가 해설자를 통해 직접 말하는 방식은 독서를 방해할 요소가 있어 꺼려져 왔다. 그것을 알면서도 해설자의 탈을 쓰고 나타난다는 것은 사회의 '징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소설에서 해설자는 사회 참여를 위해 재탄생되었다.


경험해보지 못한 80년대를 우리는 어떻게 경험해왔는가. 화려한 휴가와 같은 영화를 통해 광주 대리체험을 해보기도 했고, 근현대사 수업으로 당시 혁명의 진행양상이나 역사적 전환점들에 대해 배워보기도 했다. 조금 더 적극적이었다면 직접 광주에 가서 묘역 참배를 했었을 수도 있겠다. 여기에 소설 <차남들의 세계사>를 추가해 주었으면 한다. 좋은 안내자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