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OO 씨*는 자신을 ‘무위도식 중인 휴학생’이라고 소개했다. 경남에서 10대를 보냈고, 대학 입학과 동시에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다. 세월호 사건 이후, 그는 넘쳐나는 뉴스와 해내야만 하는 스케쥴 사이에서의 스스로를 사건에 ‘무뎌졌다’고 표현했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하는 그에게 세월호와 관련된 정보를 얻는 일은 습관이었지만,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를 아직 기억한다. 전공수업을 듣고 있었다. 일간지 어플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속보알림이 떴다. 오전 열한시 전 쯤이었나.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했고, 몇 명이 구조됐다’는 식이었다. 원래 속보가 뜨면 확인 안하고 취소를 누른다. 한 줄만 봐도 내용을 다 아니까. 근데 그건 확인을 눌러서 읽었다. 우연이었다.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그리고 친구랑 점심 먹으러 가고 그랬다. 


당시 하숙을 할 때라 TV를 잘 안 봤다. 신문도 안 읽고 주간지만 읽고. 속보 이후로 소식을 늦게 접하긴 했다. 기성언론 기사는, 받아보긴 하는데 어차피 계속 속보가 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정보를 접했다. 오보가 났고 등등. 그때까지만 해도 ‘정부가 국민을 구조하지 못했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언론사가 오보를 했다는 사실에 좀 더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전공이기도 하고, 저널리즘 학회도 하고 있었다. 오보를 주제로 세미나를 했었기 때문에 기억이 난다. 페이스북에 영양가 없는 소식이 많았다. 허위사실이 떠돌아다니지 않았나. 친구들이 ‘좋아요’를 누르더라. 아무리 봐도 거짓말 같은 소식에. ‘그거 아닌거 같지 않냐’고 하니까, 아닌걸 알면서도 누르게 되더라고 하던데, 거기엔 공감했다. 이 소식이 진짜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페북의 ‘베플’같은 경우에 선동한다는 이야기가 있는걸 보면서 화났었다. 타임라인의 전체가 그 얘기였고.

 

합리적이라고 느낄 정보? 원래 그런 스타일이긴 한데, 언론을 통해 얻는 정보 중에 태생적으로 의견일 수 밖에 없는 게 있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인 지식만 수용하는 편이다. 16일-23일 사이에 정보가 많이 공유되는걸 보면서 큰 일이라는걸 깨달았다.

 

그 학기가 좀 한가했다. 저녁에 밥을 먹고 방에 와서 뉴스를 보고. 온통 그 뉴스였으니까, 그걸 보다 울고, 다음기사를 누르고 좀 이따가 다시 시도하다가 끄고 또 시도하다가 끄고 그랬다. 한 사람에 초점이 맞춰진, 누가 효녀였고, 용돈이 그대로 발견됐다는, 그런 기사를 보면서 많이 울었다. 예를 들어 기사 하나를 읽으면 그게 한 사람의 이야기다. 학생이나, 구조하다 돌아가신 분이나. ‘다음 사람‘이 또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니까 계속 읽었다. 사람에 초점을 맞춘 인터뷰 같은 글을 원래 좋아한다. 지역은 다르지만 늘 연락하는 친구와 카톡으로 기사를 서로 보내주면서,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 

 

다른 얘기긴 한데, 기억이 별로 없었던 이유가 생각났다. 시험기간이었다. 4월 18일마다 하는 학교 행사가 있는데, 늘 그때가 시험기간이어서 참여인원은 점점 감소추세다. 나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때 총학에서 ‘실종자들이 구조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행사를 진행하자’는 이야기를 했었다. 아시겠지만, 시험기간에 더 딴짓을 많이 한다. 소식이 SNS에서 더 많이 퍼져 나간게 시험기간이라서 그랬단 생각도 들었다. 진도로 구호물품 등을 보내는 계좌에 돈을 보내기도 했다. 시험기간에 열람실 쪽 ATM에서 입금했던 기억이 난다.



2014년 5월 10일 안산문화광장 ⓒ 정택용 / 게재 : 페이스북 페이지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진' 



5~6월에 그런 이야기가 들렸다. 구조를 할 수 있었는데 못했다는. 사실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이때 좀 접했다. 관심 있게 읽었던 기사가, 당시 탈출한 이들을 구조한 어민들 인터뷰였다. 사람들이 뛰어내렸고, 우리는 배가 가득하도록 그 사람들을 실었다는 것. 왜 이것에 대한 비판의 화살이 국가로 가진 않았는지 아직 모르겠다. 


여름방학때 연구소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직원분과 함께 ‘어제 이 기사를 봤는데 눈물이 나더라’ 이런 이야기를 아침에 10분~20분정도 하는 게 일상이었다. 원래 인터넷-스마트폰으로 기사를 많이 봤는데, 종이매체와의 균형이 비슷해졌다. 여기에서 참사 100일도 겪었다. 그날 추모행사에 다녀온 연구소 친구 이야기를 들었다. ‘저거 다 선동이야’라고 말하고, 감정적으로 휘말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거기서 울었다고 하더라. 나에겐 인상적이었다. 공연을 하고, 단원고 학생들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고 눈물이 났다고 했다. 


9월엔 학교를 정신없이 다녔고, 10월에 '눈먼 자들의 국가'를 접한게 나에겐 분기점이었다. 책을 읽으면서는 울지 않았다. 이전에는 어떻게든 세월호 사건과 내가 연결됐었는데, 개강하고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고 해야하나. 그런데 다 읽고나서 가만히 있다가 울컥해서 많이 울었다. 예전보다 기사를 더 많이 찾아 읽었다. 이 책은 완독을 총 두 번 했다. '416세월호 민변의 기록'도 읽었고. 이 책을 읽으면서 좀 화났다. 이 즈음 사물함 비밀번호를 0416으로 바꿨던 기억이 난다. 11월엔, 다시 조금 무뎌졌던 것 같다. 이때 매우 바빴다. 다만 무뎌졌긴 했는데 사이사이에 경험한 것들이 쌓여서 좀 달랐다.

 

살면서 큰 사고를 당했거나 위험에 처한 경험은 없다. 어릴 때 천식이 있었는데 나았고. 대체로 건강했다. 사고하니까 생각 난건데, 어떤 사고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좀 의연한 편이다. 판단이 느려서 그렇다. 제대로 판단이 되지 않아서 유보한다.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다. 중학교 1학년 방학 개학날이었는데, 숙제를 안 가져왔다. 그 때 엄마한테 전화해서 가져다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안 오는거다. 그러다 옆 반 친구가 와서 엄마 사고소식을 알려줬는데,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반응했다. 엄마는 한 달 간 입원했다. 이 외의 돌발상황에도 혼자 마음속으로 괜찮다는 결론을 내고, 드러내지 않는다. 친구 집에 가서 뭔가를 깼다고 치자. 부모님한테 말을 안하고 스스로 해결할 방법을 찾는다. 불안한 상태를 겪는다. 이 참사 소식도 그랬던 것 같다. 4월은 ‘잠복기’ 같았다. 안 좋은 상황인걸 아는데,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면 그게 ‘진짜’가 되 버리는 느낌이 드는 게 싫은것 같다.

 

앞으로 사고가 나게 된다면? 난 상상을 잘한다. 이 사건 이후 내 동생이 사고를 당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했었다. 청와대에 폭탄을 던지거나, 그에 준하는 것을 준비해놓고 간이 쫄아서 결국 못하고, 글을 써서 투고할거라는 생각을 했다. 나에게 이런 일이 터졌다면 기자를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다. 


지하철을 별로 안 좋아한다. 초등학교 때 대구 지하철 참사 소식을 접했고, 이후 좀 벌벌 떨면서 지하철을 탔었다. 대학에 온 이후엔 혼자 타다보니까 그게 좀 무서웠다. 서울에 오고 늘 하는 상상이 있다. 서울의 이미지는 나에게 한강철교로 완성되는데, 그게 무너질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재난영화도 싫어한다. 진짜 그렇게 될까봐.

 

대부분의 희생자가 어린 나이에 죽었다. 내가 딛고 있는 땅이 갑자기 무너져서 죽는다는게...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가족 옆에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이 사건 이후 구체적으로, 길게 하게됐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되도 해결할 수 없는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무해진 느낌이다.

 

그런 상황이 나에게 온다는 거? 스스로 강한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게 보이니까 좀 더 비관적인 사람이 되었다. 주변 사람들도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다고 말하더라. 그리고 이런 생각을 되게 많이 했다. 강남의 잘 사는 고등학교 재학생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구조가 그랬을까. 이건 17일 정도부터 생각했던 것 같다. 이 때 국가장학금 소득분위 관련해서 휴학-재학을 정할 시기였기 때문에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세월호 이후 ‘무조건 놀 수 없는’ 학년이자 학기를 보내고 있다. 전에는, 이제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 교육이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될 수 있다는 신화를 믿었다. 나부터는 그런 계층이동이나 생활방식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게 이번기회로 무너졌다.

 

안전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안전했다는 것과 동의어일 것이다. 물론 그 전에도, 돈이 없는 사람이 아프면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걸 모른 건 아니지만 그게 나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거지. 누가 가장 안전한지는, 돈에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권력이 있어서 돈이 오는 게 아니다. 돈에 권력, 학력, 주거환경과 그 모든게 다 갖춰진다. 그건 안전으로 직결되고.

 

그리고 안전을 사건 전보다 훨씬 많이 생각하게 됐지만, 안전을 생각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니까, 사람들이 허무주의에 빠질 것 같다. 상황은 똑같은데 대응할 수 있는 무언가는 안 좋게 바뀌니까. 인식은 나빠지고 삶은 더 비극적으로 변하고. 지인이 배를 타고 여행 간다고 하는데 마음이 철렁했다. 서울역 지반이 내려간다는 소식을 본 선배에게서 서울로 올 때 기차를 타지 말라는 연락도 받았다.

 

사람들이 공권력을 잘 안 믿는다. 사적인 무언에 의존할 것 같다. 보험에 더 많이 가입한다든지. 최소한의, 기본적인 무언가가 가격이 뛰고 ‘경쟁’이 되어버릴 거다. 그게 반복되고 커지면 ‘아래’의 사람들은 무너질 것이다. 그럼 또 다른 하위계층이 생기고, 그렇게 사회가 무너질 것 같다.

 

긍정은, 자기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면 믿을 수 없다. 개인이 무너졌을 때 국가가 받쳐준 적 있나? 우린 그런 경험이 있나 물어볼 필요가 있다. 대학 등록금부터 우리 선에서 해결할 수 있나? 그런 경험만 쌓이는데 우리가 어떻게 낙관적일 수 있나 싶다. 기억할 수는 있는데,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일은 또 반복될 것이다.

 

차례를 기다리는 사형수 같다. 지금 당장 서로 손을 내미는 것도 어렵다. 우리가 정신이 건강해서 서로 손을 잡으면, 그럼 ‘이길’ 수 있나? 그것도 확신이 없다. ‘철문’ 뒤에서 시스템을 만들고 공고히 유지하는 사람들로부터 말이다. 우리가 확신이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잡았을 때 조금 이라도 같이 일으킬 수 있다면 내밀 자신이 있을텐데, 다 같이 끌려내려 갈 것 같다. 손을 내밀지 못하게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뭍위에서] 기획에서 인터뷰이의 이름은 인터뷰이의 의향에 따라 실명 혹은 익명으로 기록했다.

인터뷰.글/ 블루프린트(41halftim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