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4일부터 8월 18일까지 [고함20]은 아마추어 저널리즘에 관한 프로그램 <마이 리틀 저널리즘(마리저)>을 진행합니다. <마리저>는 강의와 세미나를 통해 아마추어 저널리즘의 경계선을 긋는 것부터, 아마추어 저널리즘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서 알아보려 합니다.


지난 8월 11일 진행되었던 마이리틀저널리즘 5주차 프로그램에서는 페르마타 기자의 세대 담론에 대한 강의가 있었습니다. 과연 청년 기자들이 쓴 기사들은 청년 세대에 대한 일반화와 대표성을 잘 갖추고 있을까요. 한 세대를 주제로 한 기사를 쓸 때 기자들이 주의해야 할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아래는 페르마타 기자가 ‘세대 담론에 매몰되지 않고 20대에 대해 말하는 20대를 상상해보겠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진행했던 세미나 정리본입니다.



당사자성에 기대어 청년에 대해 말하는 것?


당사자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사자성은 당사자가 해당 사안에 대해 주체적으로 발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당사자성을 통해 주변부로 밀려나 있던 객체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요. 인문학자나 사회과학자들이 민중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나,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남성 지식인이 할 때, 제 3세계 이야기를 미국인이 멋대로 할 때 “왜 너희들이 멋대로 우리들을 재단 하느냐”며 비판을 하는 식입니다. 이것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자신들 스스로 해야 한다는 내용이고 큰 틀에서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청년의 이야기를 청년이 한다는 것에서는 당사자성의 이야기가 좀 빈약해지는 측면이 있습니다. 대학생 청년은 고졸 청년을, 대기업 사원 청년은 생산직 청년과 같은 사례를 본다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청년이지만 각각의 당사자성이 매우 다릅니다. 청년 안에서도 스펙트럼이 매우 다양하죠. 


하지만 문제는 아마추어저널리스트들도 내 이야기가 아니라 청년 전체와 청년 담론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는 점입니다. 당사자성, 경험, 나의 인생의 사건 속에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사회구조와 함께 말하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당사자성이란 틀의 바깥으로 나가게 되는 느낌이 듭니다. 청년은 하나의 균일한 집단이 아니므로 내가 아닌 집단을 이야기할 때는 당사자성에 기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함20 또한 매체 운영을 하면서 당사자성과 관련한 고민이 항상 있어 왔습니다. 고함20이 20대 ‘대표성’을 주장하지만, 고함20의 구성원들은 대학생이고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을 많이 다니고 있으며 진보정당을 지지하고 있는 청년들이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의 학생이 아니거나, 진보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 청년들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당사자성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고함20에서 지방 지부를 운영했던 적이 있었는데요. 당시 지방에 있는 한 기자가 “우리도 너희(고함20 서울지부)와 같이 큰 얘기를 하고 싶은데 지방 청년으로의 당사자성만을 얘기하라는 것이냐”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당사자 얘기를 한다는 게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 있고 당사자 프레임은 오히려 함정이 되어 당사자 이야기 말고는 할 수 없게 되는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당사자성을 넘어서서 다음 단계를 생각해본다 했을 때 그런 문제가 생기겠죠.


청년이라는 집단 안에는 수많은 개인이 있는데 이들에 대해 모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마추어 저널리스트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문제에 대하여 논의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넘어서야 할 것이 생깁니다. 당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타인들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게 되면서 기성언론에서와 똑같이 아마추어저널리스트들에게도 '당사자성을 넘어섬'이 부과된다는 것이죠. 청년에 대한 규정들, 청년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수많은 기사를 깔 때 사용되는 논리는 “청년에 대해서 모르면서 왜 이야기하느냐”입니다. 아마추어저널리스트로서 청년에 대한 문제를 해석할 때 그들의 문제를 왜곡되게 보도하거나,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게 잘 들어야 하는데 ‘과연 우리가 잘 들을 수 있을까’라는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죠.


예전에 인상적으로 생각했던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소위 조중동과 같은 기성언론에서 20대나 30대 청년 혹은 청소년에 대한 기사를 쓸 때 인턴기자를 시키곤 했습니다. 주간 조선 편집장이 “청년에 대한 이야기를 당연히 전해드려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 늙어서 알 수가 없어요”라며, “인턴기자들의 활약을 기대해주십시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인턴기자들이 썼던 글들 대부분은 ‘요즘 청년들의 원나잇 실태’, ‘잘생기면 오늘 밤 오케이’ 이런 식의 기사였습니다. 청년의 나이인 사람이 청년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이야기가 낫다고 보증할 수는 없는 것이죠. 청년도 청년을 팔아먹는 기사를 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많이 느끼는 것은 청년들이 청년을 해석할 때 쓸 수 있는 관점이 어쩌면 기성세대가 청년세대에 대하여 만들어놓은 해석의 틀을 넘어서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청년에 대하여 청년 저널리스트들이 기사를 쓸 때 당사자의 우위가 깨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다소 막연하지만 아마추어 저널리스트들이 전문성을 가지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뻔한 이야기입니다. 청년에 대한 전문성이 청년이라는 이유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기성의 담론을 확실히 이길 수 있는 담론을 생산할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이 리틀 저널리즘 5강 중 모습


당사자성 넘어서기 : 평균편견을 뛰어넘자


그래서 청년에 대해서 이해할 때 최소한 갖추어야 할 전문성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평균편견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평균편견은 칼럼니스트 한윤형(관련 기사)씨가 사용한 말인데 사람들이 특정 영역에 대해 막연히 가지고 있는 인식과, 그 영역을 좀 더 알게 될 때 가지게 되는 인식 사이의 괴리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말이 조금 어렵지요. 예를 들면 ‘20대는 반값등록금을 원한다’, ‘보수화되고 있다’, ‘막장이다’, ‘책을 읽지 않는다’와 같은 것들은 반복되어오는 20대에 대한 평균편견들입니다. 아마추어 저널리스트지만 관점과 전문성을 갖추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세대를 논함에 있어 어떤 문장을 쓸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또한 중요한 평균편견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박근혜 정권에 대해 불만이 많다고 가정을 하고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그는 “어른들은 쓸데없는 것 같고 청년들이 무언가를 했으면 좋겠어. 청년은 변화의 주역이야. 청년은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잠재력이 있어!”라는 생각을 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는 △△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는 이야기들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갈수록 위에서 언급한 사람처럼 청년들에 대하여 쉽게 쉽게 이야기하려는 분위기가 있는 듯합니다. 청년들이 기성세대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이런 세대에 대한 인식들은 경계해야 할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있고 부모님이 있다고 했을 때, 나와 같은 세대인 사람보다 나와 부모님 사이의 거리가 더 멀 것이다, 세대 밖은 다른 사람일 것이다라는 생각들은 글로 옮겨지면 청년이라는 말로 다른 세대와 분리된 것으로 이야기하려는 게 될 것입니다. 이런 글은 많은 문제들을 세대 문제로 환원하고, 특히 계급 문제를 가리는 용도으로 쓰이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평균편견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평소 생각해왔던 것들을 한번 의심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녹취. 농구선수(lovedarktem@nate.com)

정리. 상습범(biswang@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