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12일 오후(현지 시간) 공식 사임했다. 1994년 총리에 취임하여 3선 총리를 하기까지 만 18년 만이다. 지난 8일 베를루스코니는 경제 개혁안이 의회의 지지를 얻으면 경제 위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우여곡절은 길었다. 이탈리아 중앙은행에 따르면 이탈리아 2010년 실업률은 11%에 육박했다. 이는 2001년 이래 최대치였다. 특히 청년 실업률은 29.5%였다. 청년 3~4명 중 1명이 실업자였다는 얘기다. 취업자 중 절반이 비정규직인 상황에서 이탈리아의 20대들은 결국 해외 취업으로 눈을 돌렸다. 기술을 가진 이탈리아 청년들은 인도, 중국 등으로 가서 돈을 벌었다. 유로존 전체 부채 중 23%를 차지하는 이탈리아의 부채 3000조는 너무 막대해 해결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2008년 이후 무려 51번의 재신임투표 끝에 베를루스코니는 물러났지만 그의 퇴장으로 이 모든 경제 위기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즈>는 "지도자가 바뀐다고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며 유로존 유지를 비관했다. 8일 베를루스코니가 사임 의사를 밝혔음에도 9일 이탈리아 국채 금리가 좀처럼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 그 증거 중 하나다.




이탈리아 경제는 여전히 위기에서 벗어날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탈리아 국민들의 표정은 너무나 밝다. 베를루스코니의 사임을 두고 '당신이 준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올 정도다. 베를루스코니는 단순히 이탈리아를 경제 위기에 빠지게 하는 정도의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직업이 없어 전전긍긍하는 젊은이들에게 일자리 대신 오락과 쾌락을 선물했다. 대부분의 언론기관은 베를루스코니 소유였고, 그가 어떤 정치적, 정책적 잘못을 저지르든 신문과 방송은 그를 감싸고돌았다. 화려하고 자극적인 쇼 프로그램과 선정적인 매체들에 혼이 팔린 이탈리아의 20대들은 그들의 일자리 뿐 아니라 정신과 줏대까지도 빼앗겼다. 베를루스코니가 성추행 파문 등 부도덕적인 스캔들을 일으킬 때마다 거리 시위가 일어났고, 재신임투표가 시행됐다. 하지만 여당이 장악한 의회는 베를루스코니를 옹호했고 거리 시위도 그 때 뿐이었다. 악순환은 반복됐다. 이렇게 이탈리아에 다시는 봄이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던 상황에서 베를루스코니는 기적처럼 사임했다. 이탈리아 국민들이 춤을 추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부분은, 아직도 이탈리아 의회가 베를루스코니의 편에 서 있다는 것이다. 지난 9월 20일 이탈리아의 신용 등급이 'A'로 한 단계 강등되고, 10월 5일 'A2'로 한 단계 더 강등됐음에도 의회는 10월 14일 신임투표에서 베를루스코니의 손을 들어주었다. 지난 5일 로마에서 일어난 시민 수만 명의 거리 시위는, 이탈리아의 경제 뿐 아니라 국민들의 사회 질서 및 문화 등 전체적인 삶 마저 망쳐놓은 베를루스코니 및 그의 뒤에 서있는 의회에 대한 분노를 반영한 것이었다. 새 총리에는 경제학자 마리오 몬티 밀라노 보코니대 총장이 지명됐다. 하지만 여전히 베를루스코니의 편에 서있는 의회의 신임 투표를 통과해야 한다. 베를루스코니는 총리직에서 사임하자마자 바로 다음 선거에 출마할 뜻을 내비쳤다. 이탈리아를 이렇게 만들어놓고도 선거에 출마한다는 것은 베를루스코니가 가진 위력을 새삼 실감케 한다. 
 



유럽에서 가장 번성한 나라 중 하나였던 이탈리아를 유럽 경제 위기의 중심지로 만들어버린 베를루스코니. 어찌됐든 그는 이탈리아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그가 시원하게 물러난 것은 아니다. 베를루스코니가 아직도 미디어기업과 의회, 축구단 등 많은 분야에 손을 뻗고 있으니 쉽지는 않을 것이다. 베를루스코니 집권기에 국민들은 고함칠 권리를 잃었다. 깨어있는 자들의 거리 시위는 언론과 의회의 외면으로 묻히기 일쑤였다. 이탈리아의 언론과 의회는 국민이 아닌 권력자를 위해 존재했다. 하지만 이탈리아가 정말로 새 총리와 함께 재기를 꿈꾸고 있다면, 더 이상은 국민들에게 등을 돌려서는 안 된다. 베를루스코니 사임은 이탈리아 변화의 미미한 시작일 뿐이다.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한다. 지금 이탈리아에는 경제 개혁 그 이상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