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가는 아침 버스에서 라디오가 귀를 두드렸다. 감정노동,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그 단어는, 우리나라의 감정노동이 외국에 비해 더 심하다는 말은 아직 덜 깬 머리를 울렸다. 앨리 러셀 혹실드는 1983년 <감정노동>을 내며 ‘감정노동(emotional labor)’은 배우가 연기를 하듯 원래 감정을 숨긴 채 직업상 다른 얼굴 표정과 몸짓을 하는 것이라 정의했다. 그는 델타항공의 승무원들을 참여관찰하고 인터뷰하며 ‘노동이 우리의 감정을 어떻게 상품으로 만드는지’를 밝혔다. 그리고 30 여년이 지난 지금 감정노동은 어떻게 변했을까? 고함20은 매일 강제로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 말해야 하는 이들의 모습을 직접 마주하며 이 기획기사를 냈다.
 

“손님! 다른 손님들 기다리시는데 새치기 하지 마세요.”

대형마트 정육코너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김진석 군(25)은 “내가 평소에 믿고 의지했던 것들이 무너져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세일 기간 중 손님들이 줄을 서 있는데 새치기 하는 사람이 있더라. 새치기를 하지 말라고 했더니 고객센터에 신고를 당했다”고 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음에도 김 군은 손님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 손님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김 군은 그 손님에게 사과를 하며 “속에선 부글부글 끓고, 겉으론 공손히 하는데 괴리감이 들더라”고 했다.

많은 감정노동자들은 김 군처럼 평소의 ‘나’와 일하는 ‘나’ 사이에서 심리적 괴리감을 느끼곤 한다. 손님에게 보여야 하는 친절함과 공손함은 결코 자신의 본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친절해야 하며 얼굴에서는 미소를 잃지 말아야 하는 등 감정노동을 요구받는다. 언제든, 누가 잘못했든, 어떤 일이든 그들은 직원이라는 이유로 돈을 지불할 용의가 있는 이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것이다. 우울증은 불청객처럼 이들을 찾아오곤 한다.


감정노동이 뭐야?

물론 당사자들도 감정노동이 무엇인지,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는 일도 있다. 백화점 명품 매장에서 일하는 최 양(22)은 오늘 가족에게 성을 냈다고 했다. 그는 화를 낸 이유로 가족에게 자신이 오늘 어떤 일을 했는지 말하던 중에 ‘당연한 걸 물어봐서’라고 했다. “매장에 물건이 없어 창고에서 물건을 가져올 때 매번 뛰어서 힘들다”는 말에 대한 질문이었다. “왜 뛰어?”라는 질문에 최 양은 “고객 기다리시잖아”라고 답하면서 화가 났다고 했다. 

그러나 최 양도 ‘아무 문제없다’고 느끼는 건 아니었다. “원래 자신은 그러지 않았다”며 “요즘 짜증이 부쩍 늘었다”고 했다. 그는 감정노동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기분이 안 좋거나, 손님이 부당한 부탁을 해도 웃으며 대답하고 ‘대접’하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이 일이 적성이 맞는다면서도 퇴근 후에는 다른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푼다고 했다. 결국 일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얘기였다.

음식에 침 뱉어도 웃어야

많은 감정노동자들이 일에서 고통을 받는다고 호소한다. 그리고 이런 일은 더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 3차산업인 서비스업이 1, 2차 산업인 농공업을 넘어 영역을 확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서비스업비율은 2010년 기준으로 58.2%다. 하루를 멀다하고 새로 생기는 베이커리, 대형마트, 편의점 등은 모두 감정노동을 요구한다. 여기에 고용되는 직원이나 아르바이트들은 이를 감내한다는 각서를 쓴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고객과의 충돌은 이들에게 불이익이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고용인으로부터 핀잔을 듣거나 해고까지 당할 수 있다.


아르바이트가 아닌 직원의 경우, 상황은 더 심각하다.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아르바이트와 달리 직원은 그 일에 생계가 걸려있다. 그래서 감정노동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 대형서점에서 일하는 김 씨(28)는 남들은 피하려하는 2박3일 일정의 예비군 훈련을 오히려 반겼다. ‘고객응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그는 가끔 “손님과 싸우고 여길 그만 둔다”고 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일터가 “군대 같다”고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영화 <핸드폰>의 한 장면. 고객의 잘못에도 직원은 서로를 말려야 하는 입장이 된다.


김진석 군이 일했던 정육코너에서는 ‘고객’이 시식용 고기가 “맛이 없다”며 프라이팬 위 고기에 침을 뱉은 일도 있었다. 김 군은 “거기 있던 직원이 죄송하다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다시 구워줬다”고 하며 “자신은 같은 일을 겪었으면 그만 두었을 것”이라 했다. 하지만 “그것도 내가 아르바이트라서 가능한 일이지 않겠냐”고 말을 이었다. 그는 자신이 겪은 일이 아닌데도 목소리가 격양됐다.

돈과 사람의 이중주

감정노동자들이 감정노동에 해당하는 말과 행동을 하는 걸 당연히 여기는 것처럼 고객, 손님이란 이름을 가진 이들은 이를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한다. 자신들이 돈을 지불하면서 가질 수 있는 지위덕분이다. ‘손님이니까’, ‘돈을 내니까’ 웬만한 일은 요구 할 수 있고 상대방은 들어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여긴다. 이는 돈을 최우선 가치로 삼고 이를 권력으로 이용하는 자본주의 논리에 부합하는 사고방식이다.

‘객’들은 자신의 지위를 십분 이용하려 한다. 경기도 안산시에 위치한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일 하는 아르바이트들은 이 주장에 앞 다투어 동의했다. 최경남 씨(27)는 “손님들은 아르바이트를 아랫사람 대하듯 한다”며 그들의 태도가 문제라 했다. 그들을 힘들게 하는 건 몇몇의 소위 ‘진상’들뿐만 아니라 왕으로 군림하려 하는 다수의 손님들도 마찬가지였다.

뻔히 다른 일을 하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요구사안을 먼저 들어 달라 하는 게 아르바이트들이 가장 많이 겪는 일이다. 그들은 자신이 바라는 걸 먼저 처리해야 하며 그렇지 못하는 건 아르바이트들의 책임이라 여긴다.

이 가게에서 가끔 손님들은 서로 순서를 양보하는 등 훈훈한 모습을 보였지만 아르바이트에겐 예외였다. 점원이 자신보다 늦게 온 다른 이의 주문을 먼저 받고 서비스를 하는 건 용서하지 못하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줄을 제대로 서지 않은 자신들의 책임도 있는데 말이다. “제가 먼저 왔는데요”라며 새치기를 한 사람에게 할 말을 점원에게 하기도 했다. 반말도 간혹 들려왔다. 우리나라에서 반말과 존댓말은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가르는 상징이다.

감정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얼마 전 서울지하철 4호선이 고장이 나 잠시 운행을 중단한 적이 있었다. 당시 트위터에는 “지하철을 걷어차면 고쳐지지 않을까?”라는 내용의 글이 올라 왔다. 우리는 기계가 고장났을 때, 때리면 고쳐질 거라고 생각하곤 한다. 고장난 TV를 내려치면 화면이 정상적으로 나오는 장면도 간혹 보인다. “사람이나 기계나 맞아야 말을 듣는다”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기계가 말을 듣지 않아도 걷어 찰 때가 있다. 그건 우리 감정이 상했을 때다. 이는 다른 일 때문에 상한 감정을 기계를 걷어차면서 누르려 하는 행동이다.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을 때, 폭력을 통해 쾌감을 느끼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행동이 기계가 아닌 사람에게 가해지는 경우다. 특히 자신보다 경제적,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들에게 이런 모습들을 보이곤 한다. 특히 감정노동자는 그 대상이 되기 쉬운 신분이다.

감정노동자는 NPC(Non-Player Character)에 비유되기도 한다. 평소 게임을 자주 즐기는 김 군(23)은 “감정노동자들은 NPC와 같다. 플레이어들의 캐릭터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기계적인 말과 행동을 반복하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얘기한다. <바람의 나라>같은 게임에서는 NPC가 플레이어의 말에 대답하는 경우도 있지만 문답의 선후관계가 분명하다. 플레이어들이 말을 걸곤 하지만 이 행동에 특별한 목적은 없다. 심심해서 하는 장난일 뿐이다.

기계를 차거나, NPC에게 욕을 하는 행동들이 실제 사람이 대상이라면 어떨까. 감정노동자들은 정해진 매뉴얼에 있어 거기에 대한 개인적인 대응이 거의 불가능하다. 웃는 얼굴과 존댓말이 사라져선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뒤편에 있는 마음은 상처받고 갈기갈기 찢겨 진다. 사람에 따라 자존심이나 자존감이 무너지면서 자기비하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건, 기계나 NPC와 달리 사람은 존엄한 감정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감정노동자 우울증, 버스기사의 2배

한국에서 감정노동 종사자 중 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은 27%에 달한다. 모두 심리상담, 정신과치료가 필요한 중등·고등도 우울증이다. 이는 징계 해직자 중 우울증 환자 비율(28.5%)과 비슷하고 버스기사보다 2배나 많은 숫자다. 외국의 경우 대부분 한국보다 낮은 비율을 보인다. 그만큼 한국에서 감정노동을 더 많이, 격하게 요구받는다는 의미다. 

프랜차이즈 업체와 감정노동 종사자의 숫자는 정비례한다


외식 프랜차이즈, 베이커리, 식품, 유통업 등이 규모를 확대하면서 감정노동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감정노동에 대한 인식, 거기에 대한 보상은 아직 공론화조차 되지 않은 실정이다.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숫자 파악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미국과 일본의 서비스업 비율이 70%를 넘는 걸 감안하면 한국 또한 감정노동 종사자가 증가할 여지가 남아있다.

감정노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가피한 거라고 한다면, 거기에 대한 보상이나 대책도 불가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들이 감정노동에서 받은 심리적, 정신적 고통을 생각하면 이런 질문도 무의미한 일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