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 때 '칼레' 시는 끝까지 영국에 저항을 한다. 하지만 구원군이 오지 않아 1347년 끝내 항복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시장 비엔은 피해는 최소로 줄이되 존엄마저 지키려고 적장들과 담판을 벌였다. “우리는 프랑스 국왕의 명령에 따라 이곳을 명예롭게 지켰소. 온 힘을 다했으나, 먹을 것조차 떨어졌소. 당신들 국왕이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우리는 굶어 죽습니다. 도시 전체를 바치니 우리 모두 무사히 떠나도록 해주시오.”

늠름한 태도에 감동받은 영국의 장군들은 왕에게 그의 말을 호의적으로 전했다. 왕은 포위전을 하는 동안 큰 피해를 안긴 칼레시에 큰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는 가혹한 조건을 걸었다. 도시의 유지 여섯이 삭발을 하고 목은 밧줄로 묶은 채 거리의 모든 열쇠를 갖고 맨발로 영국 왕 앞에 출두하라는 것이었다. 칼레 시민들은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이때 칼레에서 제일부자인 '외스타슈드 생 피에르'가 선뜻 나섰다. 그 외에도 시장, 상인, 법률가 등 부유한 귀족들이 자발적으로 나선다. 그리고 6명이 된 그들이 영국 왕 앞으로 출두할 때 모든 시민이 울며 뒤따랐다. 영국군 진지 앞에 서자 왕과 장군들은 물론 임신 중인 왕비까지 도열해 그 광경을 봤다. 왕이 처형 명령을 내렸다. 장군들이 나서 그들을 처형하면 국왕의 명성에 누가 된다고 구원을 간원했다. 왕이 뜻을 굽히지 않자 왕비 필리파가 나섰다. “왕이시어,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부탁을 드린 적이 없습니다. 겸허히 청하오니, 성모 마리아와 당신이 제게 잉태시킨 사랑의 이름으로 저 여섯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잠시 침묵을 지키던 왕이 무릎 꿇고 눈물 흘리는 왕비에게 그대의 뜻대로 하라고 말했다. 흔히들 <칼레의 시민>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표현하는 대표적 작품이라고 말한다.


지난 6일 안철수 원장이 자신이 보유한 안철수 연구소 지분의 절반을 출연한 재단을 설립했다. 그는 “나눔은 많이 가진 사람이 적게 가진 사람에게 시혜 성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받은 몫을 다시 돌려주는 수평적인 개념이어야 한다.”며 일자리 창출, 교육 지원, 세대 간 재능 기부를 중점적으로 추진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다른 의견으로 이러한 기부활동은 안철수 원장이 대선준비를 위한 준비라고 정치적 움직임이라고 해석을 한다. 하지만 정치적 해석을 떠나서 그는 사회적 지위에 알맞은 도덕적 의무로 기부라는 방법을 사용했다. 사회적 지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가 안철수 원장처럼 기부에만 한정 돼 있는 것은 아니다. 기부는 단지 도덕적 의무의 한 방법일 뿐이다. 이처럼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사회 여러 분야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을까?

경제, 정치 분야를 살펴보면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이다. 물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봉사, 교육, 환경보호 등 다양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은 이미지 제고로 매출증가를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될 뿐이다.

그들이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현하려 한다면 프랜차이즈 공세로 골목상권으로 무차별 진출을 하거나,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을 늘리는 행태는 그만둬야 한다. 정치권에서도 국회의원들은 선거기간이 되면 공천을 받기 위해 뇌물공세를 하고, 당선되기 위해 보여주기 식 선거활동(양로원, 고아원 방문이나 독거노인 격려 등)과 공약만 무수히 등록만 하고 지키는 경우는 극소수이다.

대기업이나 정치인들은 권력, 돈, 명예가 우선인거 같다. 그리고 도덕적 의무는 앞의 세 가지를 얻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이러한 현실에서 기업과 정치인들에게 도덕적 의무를 바라는 것이 욕심일까? 도덕적 의무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화려한 것도 아니다. 기업들은 봉사활동이나, 환경보호만을 사회적 책임활동의 전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 축소, 중소기업과의 상생도 넓은 의미로 포함하면 된다. 국회의원들도 일회성 봉사활동으로 보여주기 식이 아닌, 진정한 봉사의 마음으로 꾸준히 하면 된다. 공천의 순위를 돈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후보의 능력과 도덕성을 기초로 공천대상을 정하면 된다.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칼레의 시민으로 대표되는 단어가 아닌 대한민국으로 대표되는 단어가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