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리뷰에는 영화 ‘아티스트’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골든글로브에서 아카데미 시상식까지, 올해 정말 많은 상들을 휩쓸며 가히 최고의 영화임을 입증받은 영화 ‘아티스트’는 아이러니하게도 21세기 유일한 흑백 무성영화다. 3D, 나아가 4D까지 조금씩 대중화되고 있는 와중에, 이미 지나왔다 싶은 길을 돌아와도 한참 돌아온 이 영화의 성공은 어디에 있을까.

‘아티스트’는 많은 것을 되돌아 간다

영화의 배경이 된 1920년대는 무성영화의 황금기이자 할리우드의 전성기였다. 당시 쏟아지듯 나왔던 수 많은 영화들은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었고, 이와 함께 출연한 배우들도 시대를 풍미하며 명성을 날렸다. 그들의 모습과 닮은, 영화 속 남자 주인공 조지 발렌타인은 어떤 영화에 나오든 특유의 미소와 표정으로 여성 관객들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배우였다. 그리고 그를 흠모하는 관객들 중에는 무명의 여배우인 페피 밀러도 있었다.

사진 한 장으로 그들의 운명은 바뀌게 된다



그들은 조지의 영화가 개봉하는 날 ‘우연처럼’ 만난다. 그런데 그 우연의 방식이 조금 익숙했다. 조지의 뒤에 서 있던 페피가 정말 우연히도, 떨어뜨린 펜을 줍다가 인파에 밀려 조지의 옆자리로 튀어 나오게 된 것이다. 갑자기 등장한 낯선 여인에 모두 어리둥절해하자 페피는 영리하게도 이 순간을 기회로 삼아 조지와 함께 다정한 포즈를 취한다. 그리고 그 사진은 ‘유명 배우와 함께한 그녀는 누구인가?’라는 제목과 함께 다음 날 발행된 신문에 여지 없이 실린다. 그것도 대문짝만하게. 무명의 배우가 하루 아침에 스타가 된 것이다.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신데렐라 스토리’의 수순이 아닌가? 싶은 생각과 함께 할리우드의 옛 영화들이 머릿속에 떠오를 즈음, 관객은 ‘아티스트’가 옛 할리우드 시대의 이야기를, 그 시대 방식으로 영리하게 풀어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후 줄거리는 1920년대에서 30년대에 걸친 영화의 구체적인 배경과 함께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하다. 본격적인 유성 영화의 시대가 온 것이다! 이때부터 이미 무성영화의 스타로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던 조지와 새롭게 영화에 등장하기 시작한 페피의 운명은 엇갈리기 시작한다. 운영진이 유성영화 출연을 설득하자 "영화에 소리는 필요하지 않다"며 영화사를 박차고 나온 조지는 필생의 역작을 만들겠다며 자비를 들여 야심차게 영화를 찍는다. 그와 동시에 사랑스러운 매력으로 승승장구하던 페피도 자신의 애교점을 소재로 한 영화를 찍는다. (그러나 사실 그 애교점은 그녀가 조지의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할 때 생긴 것이었다. 분장실에 몰래 들어온 페피를 본 조지는 그녀를 혼내는 대신 ‘성공하기 위해서는 남들과 다른 게 필요할 것’이라며 마릴린먼로처럼 입가에 점을 찍어주었다.) 그러한 우여곡절이 있는 두 영화는 같은 날 개봉하게 되고, 사람들은 주저없이 페피의 영화를 선택한다. 자신의 처참한 현실을 실감하게 된 조지는 점점 나락에 빠지고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조지는 끝까지 자신과, 자신의 운명과도 같았던 무성영화의 쇠락을 인정하고 싶지않아한다.



조지의 영화와 페피의 영화는 달랐다. 영화 속에서 조지가 누렸던 과거의 영광은 그저 빛 바랜 옛날 이야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반면 새로운 스타인 페피와 함께 등장한 유성 영화는 그녀가 모든 것을 누리고, 마침내 그녀가 가장 원하던 것(?)까지 얻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또한 영화 외적으로도, 유성영화는 돌이켜보면 영화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업적을 이루었다.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보는 '영화'는 정말 눈부시게 발전하였고, 흑백, 무성, 필름방식의 영화를 모두 극복했다. 안경만 쓰면 영화 속 인물들이 당장 스크린을 뛰쳐나올 것처럼 눈 앞에 나타나기도 하고, 최근에 도입된 4D는 오감을 넘어 영화 자체의 분위기까지 함께 느낄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이를 달리 생각해보면 조지의 영화는 물론이고 페피의 영화마저, 이제는 '촌스럽고 보기 불편한 영화'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이제는 흑백 영화를 경험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아 '향수'의 대상으로서 향유되지도 못한다. 어느 평론가에 의하면 '영화관에 머무는 것을 일종의 파티처럼 생각하는' 오늘날의 사람들 덕분에, 과거의 영화들은 고전(古典) 아닌 고전(故典)으로 침전해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렇다면 왜 아티스트는 왜 굳이 이런 '불편하고 촌스러운'영화로 돌아간 것인가. 할리우드의 화려한 시절에 대비되는 쓸쓸한 자화상을 그려 보고 싶기라도 했던걸까. 영화 ‘아티스트’의 마지막 즈음에서는 이러한 질문을 정면으로 맞서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지만 모든 것이 전달되는 시간



아쉽게도 영화 '아티스트'는 결말에 엄청난 반전이 존재하지 않는다. 앞서 '본 리뷰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고 밝혔지만, 그 결말은 영화를 보다 보면, 심지어는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결말이기 때문에 사실 별 의미가 없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에 빠진다. 재미없게도. 이야기만 두고 보면 그렇다. 그러나 그 뻔한 결말을 영화관에서 직접 볼 때의 느낌은 조금 다르다. 

그 전에 우리 모두를 복잡하게 한 모든 이야기들이 풀리고, 페피와 조지가 마침내 서로에 대한 진심을 알게 되면서 그들은 복잡한 마음을 안고 다가간다. 그리고 힘껏 서로를 힘껏 껴안는다. 위의 사진 속 모습처럼. 옛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이미지를 어설프게 갖고 있었기에, 100분간 이를 닮아가기에 무엇보다 충실했던 '아티스트'에서도 두 사람이 재회하는 결정적인 순간 그 동안 쉴 새 없이 재기발랄하게 이어져 온 오케스트라 음악이 장엄하게 울려퍼지리라 기대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정적만이 스크린 속 두 사람을,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이 가득한 영화관을 감싸안고 있었다. 무성영화 속 진정한 무성의 순간이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당황했는지 객석 여기저기서 말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순간 깨달았다. 이 영화가 왜 무성, 흑백의 고난을 자청했는지. 아무것도 들리지 않자 오히려 너무나도 잘 보이던, 그들이 느끼는 수 많은 감정. 그리고 둘의 감정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수 많은 이야기.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선 더 이상의 어떤 것도 필요 없었다. 그 순간은 100분의 러닝타임 중 가장 이질적인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순수하게 몰입할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이후 그들은 함께 '사랑의 빛'이라는 영화를 찍게 된다. 함께 신나게 탭댄스를 추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가벼워질 즈음 춤을 추는 것을 마친 두 사람이 가쁘게 내쉬는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원하게 이어지는 "컷!". 100여분간 힘차게 무성으로 달려온 영화에서 비로소 소리가 나기 시작할 때 느껴지는 통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오히려 당황스럽기도 하다. 심지어 누군가는 외친다. '이 사람들이 원래 말을 하는 사람들이었어?'  


영화 아티스트의 포스터



영화 '아티스트'는 국내 개봉 이후 초반에는 이렇다 할 성적을 보이지 못했다. 그러나 아카데미 시상식 이후 '5관왕 수상'의 영광과 관객의 요청으로 최근에는 상영관이 100관으로 늘어났고 예매율도 'top 10'급으로 뛰어올랐다. 불과 한 달전인데, 너무나도 열악한 환경에서 힘들게 보러갔던 기억이 있다. 얼마 전 영화관을 다시 찾아서 아티스트에 대해 물으니'상 받은 영화' 아니나며 예매 가능하시단다. 새로 나온 포스터에는 수상을 알리는 화려한 수식어가 새롭게 덧붙여졌다. 그러나 그런 상들을 휩쓸어야지만 중요한 영화일까. 첨단 기술을 자랑하는 영화계에서 ''당당하게 촌스러운' 이 영화는 그러한 수식 없이도 이미 충분히 빛나는 영화였다. 적어도 아티스트라는 제목이 아깝지 않도록. 

(제작사에서 '아티스트'의 아카데미 수상 기념으로 공개한 특별 영상을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