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방안 희미한 빛이 일렁이며 야릇한 소리가 공간을 채우고 있을 바로 그때 누군가 갑작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갑작스러운 방문과 함께 들어온 불청객에 놀란 남자가 얼른 컴퓨터의 모니터를 끈다. 여자는 잘 모르겠지만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법한 진부한 에피소드 일 것이다. 부끄러운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방문을 꼭꼭 잠궜다고 생각했지만 갑작스러운 기습에 놀란 사춘기의 추억 일 수 있다.
 


성적 욕망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당당히 밝히며 함께 즐길 만 한건 아니다. 물론 요즘은 상당히 개방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기에 함께 즐길 정도 까지는 모르겠지만 알게 모르게 점점 부끄럽고 수치심을 느낄 만큼 꽁꽁 봉인된 그 무엇은 아닌 듯 보인다. 오히려 성적 욕망은 인류를 추동해온 하나의 중요한 무엇이다. 간단히 생각해봐도 우리가 원하던 원치 않던 태어난 이유 즉 인류가 지속적으로 생명을 이어받아 지금의 여기 타자를 치고 있는 필자와 글을 보고 있는 독자가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가 성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에 더해 우리가 여태 감추려 했고 숨기려 한 성적 욕망이 과학기술 발전의 원동력이라면 어떨까?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는 바로 우리가 부끄러워하며 숨기려했던 이 삼위일체가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왔던 점을 흥미로운 사례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책의 저자는 자신이 이 책을 저술한 동기 역시 섹스였다는 점이다. 혹시 온갖 선정적인 문구와 함께 포털의 검색어에 오르내리는 유명인사 패리스 힐튼 비디오를 보았는지 모르겠다. 저자가 책을 집필한 이유가 그 비디오에서 보여주는 화면전체를 감싸고 있는 초록색 화면이다.  화면을 메운 초록색이 분명어디서 보았다고 생각한 저자는 바로 이 화면이 미국과 이라크가 전쟁할 당시의 CNN에서 보여준 바로 그 전쟁의 한 장면이었다.
 


불순하면서 엉뚱한 저자의 집필 동기는 우리가 그동안 과학기술에 대해 가지고 있던 환상들을 깨준다. 보통 대중들이 과학기술에 대해 갖고 있는 신화들이 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아인슈타인과 같은 영웅적이며 천재적인 사람들에 의해 발전이 이끌려 왔다는 환상이다. 일반 대중들이 갖고 있는 위와 같은 환상은 가끔 미디어에서 비춰주는 영웅적인 과학자들의 활약으로 더욱 현실과는 먼 이야기로 그려진다. 황우석교수의 논문조작 사건을 통해 비춰진 우리들의 자화상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보면 더욱 확실해질 것이다. 얼마나 우리가 과학에 대해 무지했으며 심지어 종교적이기 까지 했던 그 때를 말이다.

물론 뛰어난 과학자들 및 기술자들의 역할은 부인할 수 없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 발견을 통해 물리학을 기본부터 뒤흔든 사실이나 에디슨과 같은 발명가에 의해 밝게 빛나는 조명아래서 사는 인류에게 과학기술을 발전 시켜온 그들의 업적을 무시하는 것이 아님은 저자는 잊지 않는다. 다만 불순한 삼위일체가 과학기술의 발전에 가져온 역사를 여태까지 우리는 애써 보려고 아니 해왔던 점을 일깨워 준다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의 미덕은 그동안 우리가 믿고 있던 자본주의 시장경제 발전이 기업의 경쟁을 통한 혁신으로 이뤄진 역사가 아님을 보여준다. 사실 냉전시대가 종료된 이후 기술발전과 그로인한 세계경제의 성장을 보면 일반 대중은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로 산업계를 이끈 기업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다. 근래의 스티브잡스나 빌게이츠를 보면 그들의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자본주의 시스템을 이끌고 있다는 생각에 그 점은 더욱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가 여태 몰랐던 기술발전의 역사를 들여다 보여주면서 사실 중요한 발전의 한축은 국가가 담당해온 사실을 보여준다. 주류경제학자들이 국가는 시장시스템에 간섭을 말라고 했다. 그리고 정부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 이 시스템은 혁신적인 기업들의 경쟁에 의해 운영된다고 주장해왔다. 책에서 보여주듯 이 주장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대표적으로 인터넷의 발전을 살펴보자. 인터넷은 사실 미국의 국방부가 통신시스템을 구축하면서 시작된 하나의 거대한 국가 프로젝트였다. 기업들 각자가 대규모의 비용으로 인한 비효율과 낭비가 가득한 네트워크를 구성 하는 게 가능 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가능하지 않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비효율적이지만 분명 필요한 대규모의 통신망을 구축하며 인터넷의 발전을 촉진시켜온 것은 군이며 군에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 한 것은 미국 정부였다. 그 외에도 국가는 경제적으로 비효율이라고 여길 수 있는 여러 가지 기술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왔다. 막대한 군사비로 만든 인류를 절멸시킬 무기 속에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물건들을 만들도록 유도한 것이 정부인 점은 그동안 기술발전의 역사에 대한 사람들의 애매모호한 상식들을 벗겨낸다.

이에 더해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이 부끄러운 세 가지가 한데 맞물려 기술 발전을 가져다 준 점이다. 예를 들자면 로봇 기술의 발전역사이다. 로봇 하면 한국의 휴보나 일본의 혼다와 같은 로봇이 떠오를 것이다. 보통 일본의 로봇발전 방식과 다르게 미국은 군용 로봇에 대한 투자를 통해 발전해 오고 있다. 책에서 보여주는 여러 가지 사례는 일본과 같은 상업적 발전으로는 거대한 산업으로 발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 이유는 그동안의 기술발전 역사를 되짚어 보면 우선 군대의 비효율적일 정도의 투자가 이뤄진다. 그래서 거대한 시스템을 구축하면 그걸 민간부분에서 상업용으로 전환하는 민관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전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로봇도 미 국방부의 투자를 통해 발전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산업을 소비재 산업으로 재빠르게 이끄는 첨단 산업이 바로 포르노라는 점이다. 인터넷 결제와 우리가 현재 집에서 보는 스트리밍이나 고화질의 동영상은 바로 이 포르노 기업들의 재빠른 기술 수용으로 발전을 가져온 것이다. 로봇기술 또한 마찬가지로 포르노 산업은 정말 신속하게 기술을 받아들였다. 바로 섹스로봇이다. 바로 이런 사례를 통해 책은 과학기술 발전의 역사의 민낯 을 과감하게 드러낸다. 

책은 전체적으로 과학에 대한 복잡한 .논의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점은 흠결 없고 중립적인 과학을 발가벗게 만든 점이다. 물론 서양에선 이런 시도들이 20세기를 거슬러 올라가 전반적으로 살펴 볼 수 있다. 그 당시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 는 과학은 반증할 수 있는 것이라며 반증주의를 주장했다. 하지만 토마스 쿤(Thomas Kuhn) 은 패러다임 이론을 들고 와 과학자들은 과학자 사회의 패러다임 내에서 사실 연습문제를 풀고 있음을 지적한 유명한 과학 철학 논쟁을 통해 서구에선 과학에 대한 환상이 무너진 적이 있었다. 서구의 과학기술 발전과 함께 발전해온 과학 철학은 과학에 대한 합리적인 자세를 갖도록 하며 서구 사회를 건강한 상태를 갖도록 지탱해 왔다.
 


그러나 한국은 역사적으로 과학에 대해 제대로 성찰을 해본 적이 없다. 그 동안 한국사회에서 과학은 우리에게 물질적 부를 가져오는 물질적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고 여겨져 왔다. 1950년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인해 우리에게 부를 가져다준 과학과 기술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없음을 우리 모두 뼈아프게 고려해봐야 한다. 사실 책의 내용은 과학기술의 부끄러운 삼위일체가 과학기술의 발전을 추동해왔던 점을 지적해온 점이다. 기술은 가치중립적이며 그걸 사용하는 것은 인간이기에 과학 기술의 근거 없는 환상을 털어내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철학과 역사 없는 그리고 과학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 및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한 종교적 신앙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 모두 과학에 대한 성찰과 논의 없이 과학기술에 대한 맹목적인 환상은 지난 황우석 사건과 같은 일이 똑같이 이 공간에 반복 될 수밖에 없음을 다시 한 번 책은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