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여름날 고함20 기자들이 두 발로 둘러본 나흘간의 생생한 민주주의 체험기. 기로기, 밤비, 불량한생각, 블루프린트 4명의 고함20 기자가 함께 전국의 민주주의 현장을 찾았습니다. 이제는 역사속의 한 페이지로 남겨진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부마민주항쟁 유적지부터 이 순간까지 현재진행형으로 남아있는 진주의료원과 밀양송전탑 문제까지.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문제가 교차하는 길 위에서 민주주의와 저항의 의미를 다시 생각합니다. 눈으로 민주주의 현장을 둘러보고 마음속에 민주주의 정신을 담아오는 [민주로드] 기획 시리즈. 


밀양에서 송전탑 건설이 본격화된 건 8년 전부터다. 한국전력공사(이하 한전)는 신고리원자력발전소(3호기)에서 생산된 전력을 경남 창녕 북경남변전소까지 가져가기 위해 부산 고리-경남 양산-밀양-창녕 구간에 걸쳐 765kV 송전탑 161기를 건설하는 공사를 벌일 계획이었다. 이 중 밀양에만 69기의 송전탑이 들어설 예정이었다. 주민들의 반대가 거세지자 한전은 “거주지에서 조금 떨어져 있으니 인체에 해가 없다”며 주민들을 설득했다. 의견수렴부터 보상대책까지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시사in에 따르면 한전은 몇몇 주민들을 매수해 찬성 쪽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점점 밀양은 두 갈래의 갈등으로 잠식해갔다.

핵발전소 증설 중단을 촉구하는 팻말 뒤로 송전탑이 건설된다는 산 부지가 보인다. ⓒ 고함20


그럼에도 밀양의 송전탑 싸움은 언론과 시민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지난해 1월 ‘오늘 내가 죽어야 이 문제가 해결되겠다.’며 주민 이치우 씨가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른 후부터서야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밀양 각지에서 진행되던 공사가 멈췄고 고립된 싸움을 계속하던 밀양 주민들은 분노했다. 그 분노가 연대의 힘을 만들어 밀양에도 ‘희망버스’가 여러 차례 오갔다. 그 해 말 한 대선 후보가 밀양 송전탑 백지화 공약을 내걸기도 했다.

지난 8월 29일, 송전탑 문제로 앓고 있는 밀양 ‘동화전마을’로 가기 위해 고례행 버스에 탔다. 버스가 출발함과 동시에 창밖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밀양은 ‘송전탑’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일렁이는 강물의 물결과 녹색으로 뒤덮인 조금은 이른 엽월(葉月)의 풍경 뒤로 ‘8년간 갈등을 화합으로 바꿔내고 평화로운 밀양으로 돌아가자’, ‘사람이 먼저지 철탑이 먼저냐?’와 같은 현수막이 버스가 지나는 길목마다 나부끼고 있었다. 밀양 주민 간의 갈등의 골이 얼마나 깊어졌는지를 알려주는 증표였다.

반복되는 풍경을 본 지 25분쯤 지났을까, “동화마을입니다. 내리세요”라는 기사님의 외침이 들렸다. 버스에서 내리자 동화마을이라는 글자가 적힌 돌이 마을 입구에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돌과 함께 함께 마을 길은 시작됐다.

동화전 마을에 가는 길에는 송전탑과 관련된 현수막들이 즐비해 있다. ⓒ 고함20


8년간의 고립된 싸움, 밀양은 여전히 ‘송전탑전쟁’ 중

입구에서 한 길로 흐르는 계곡을 따라 500미터 쯤 걷자 마을의 시작을 알리는 벽화가 나타났다. ‘웰컴 투 동화’라고 쓰인 벽화였다. 아기자기한 벽화를 지나 왼쪽으로 돌자 동화마을회관이 나왔다. 회관 입구에 들어서기 전 마주 보이는 나무 사이로 ‘밀양 할매, 할배 힘내이소! 765kV 반대’, ‘공사 대신 삶을! 765kV NO!'라고 쓰인 현수막이 환영하듯 걸려있었다. 방충망이 처진 마을회관에선 어르신들이 한 데 모여 술상을 마주하고 있었다.

송전탑 건설 반대 현수막이 걸려 있는 동화전 마을회관 ⓒ 고함20


“어느 단체에서 왔어?”

마을회관에서 만난 어르신들의 첫 질문은 이것이었다. 일행 중 한 명은 사진을 찍던 중 집안에 계신 주민으로부터 ‘어느 단체에서 보내서 왔느냐’는 질문을 듣기도 했다. 그곳에서 첫 인사는 일반적인 인사가 아닌 ‘어디 단체에서 왔느냐’, ‘한전에서 보냈느냐’라는 물음으로 대신 됐다. 한전에 대한 주민들의 의심은 생각했던 것보다 팽배했다. 우리는 재빠르게 송전탑 반대 지지 응원을 하고자 왔다는 말을 인사와 함께 덧붙였다.

경찰이 한바탕 휩쓸고 간 후라 더했다. 동화전마을 송전탑 반대 대책위 김정회(42) 위원장이 어제 막 구속됐다 풀려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마을은 절망과 희망의 경계에 서 있었다. 어렵게 닿은 김정회 위원장과의 통화에서 김정회 위원장 또한 첫 인사로 우리 일행이 누군지에 대해 물었다. 인터뷰는 성사되지 못했다. 미리 연락하지 않고 온 탓이었다. 풀려난 지 24시간도 채 안 되었지만 그는 농사일에 여념이 없었다. 김정회 위원장이 평범한 농사꾼임을, 송전탑 반대 투쟁이 ‘일상’을 지키기 위한 평범한 주민들의 싸움임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것이었다.

어렵게 들어선 회관 거실의 마주 보이는 창문 밖으로 송전탑 건설이 이뤄질 거라는 산 마루 위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한 어르신이 손으로 송전탑 건설부지 몇 곳을 집어주었다. 손으로 집힌 곳곳은 고압선이 오가기엔 마을의 일상과 너무나 근접해있었다. 어르신 중 한 분은 비단 밀양만이 이 문제를 겪고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송전탑 건설 문제가 있지만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라고도 했다. 저항이 심한 밀양만이 드러났을 뿐이라는 것이다.


공기업이 망가뜨린 공동체, 송전탑과 함께 갈라선 마을 주민들

“돈을 을매나  받아묵었는지 모르지. 집에 틀어박혀서 안 나오는기라”

밀양 주민 간의 갈등의 골이 점점 깊어짐은 어르신들의 증언으로 현실화됐다. 송전탑이라는 전쟁은 몇십 년간 얼굴 맞대고 살아온 주민들을 아군과 적으로 나눴다. 한 마을 주민은 송전탑 건설 찬성 주민들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밀양 동화전 마을 풍경 ⓒ 고함20


어르신들과의 대화가 끝난 후 마을을 둘러보기 위해 회관을 나섰다. 찬성과 반대로 갈린 주민들의 냉기 탓일까 마을은 고요하기만 했다. 사람의 자취가 ‘숨겨진’ 마을은 평화로워 보이는 동시에 을씨년스러웠다. 간간이 지나가는 마을 주민의 트럭 사이로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가 오갔다. 더는 마을을 둘러보기 어렵다는 판단이 섰다.

마을을 떠나기 전 들른 마을회관은 이미 문이 굳건히 닫힌 채였다. 가을의 초입을 알리는 바람이 밀양 송전탑 지지자들이 내건 현수막을 끊은 흔적이 보였다. 길이가 닿지 않는 현수막 끈을 애써 이어 붙이려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현수막을 뒤로 한 채 마을을 나섰다.

최근 정홍원 국무총리가 밀양 송전탑 주민들 위한 ‘선물’을 들고 밀양을 방문해 화제가 되는 것을 보면서 2주 전 다녀왔던 동화전 마을이 떠올랐다. 그곳에서 만난 송전탑 반대 주민들은 어떤 ‘선물’도, 보상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일상이 파괴되는 것에 저항하고 몇십 년간 살아온 고향을 지키고자 할 뿐이다. 

단장면 동화마을, 마을은 이름에 걸맞게 오동나무 잎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사이로 마을의 아픔을 씻기려는 듯 계곡 물이 흘러내렸다. 도시에 찌들지 못한 순박한 마음들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여전히 지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