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여름날 고함20 기자들이 두 발로 둘러본 나흘간의 생생한 민주주의 체험기. 기로기, 밤비, 불량한생각, 블루프린트 4명의 고함20 기자가 함께 전국의 민주주의 현장을 찾았습니다. 이제는 역사속의 한 페이지로 남겨진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부마항쟁 유적지부터 이 순간까지 현재진행형으로 남아있는 진주의료원과 밀양송전탑 문제까지.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문제가 교차하는 길 위에서 민주주의와 저항의 의미를 다시 생각합니다. 눈으로 민주주의 현장을 둘러보고 마음속에 민주주의 정신을 담아오는 [민주로드] 기획 시리즈. 


광주 망월동에는 1980년 광주항쟁 당시 희생자들과 부상 및 구속되었던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묘역이 있다. 항쟁 당시 대다수 광주시민의 주검이 처음부터 이곳에 묻힐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94년부터 시작된 묘지 성역화 사업 이후 1997년, 망월동 묘지 (구묘역) 및 각지에 묻혀 있던 시신들이 비로소 신묘역으로 이장될 수 있었다.

그 세월은 광주항쟁이 지난날 명예를 회복한 세월과 일치할 수밖에 없었다. 1980년 5월, 광주항쟁이 침묵 속으로 묻히고 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기까지 광주항쟁은 오해로 점철된 제삼자의 역사였다. 지금과 같이 광주항쟁을 이야기할 수 없던 시절 광주항쟁은 김대중 내란 음모, 폭동 등으로 불리었고 또 언론에서 보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다수 국민들은 그 사실을 소문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988년 ‘5공 청산을 위한 5공 비리 특위’와 함께 광주청문회가 개최되었다. 광주 항쟁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는 광주항쟁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논의가 이뤄지게끔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신묘역은 2002년 국립묘지로 지정되었으며 그 이후로 쭉 광주 망월동은 구묘역과 신묘역으로 나뉜 채 광주항쟁의 희생자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품고 있다.

ⓒ 고함20


관리가 잘 되어 있는 ‘신묘역’

지난 8월 26일, 고함20 기자 일행이 망월동 신묘역에 다녀왔다. 묘역에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조차 몰랐던 어린아이부터 광주항쟁에 직접 참여하진 않았지만 억압적인 정권에 의해 광주항쟁의 ‘배후자’로 지목되었던 리영희 선생까지 다양한 이들이 잠들어 있었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전재수씨의 묘역도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자신도 모르게 끼어들게 돼서 희생된 경우다. 각각의 묘비 뒤에 새겨진 글귀에는 고인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이 가득했다.

묘비 중엔 항쟁 과정에서 행방불명된 희생자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마련된 ‘행방불명자 묘역’도 있었다. 아직 찾지 못한 유해는 우리 역사가 어디쯤 와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척도가 되기도 했다. 묘역 곳곳에서 날아든 나비와 잠자리, 그리고 참새가 지저귀는 소리는 자연 친화적인 광주 신묘역의 모습을 부각시켰다.

묘역 옆에 아치형의 건물에는 광주 항쟁 희생자들의 사진과 위패를 모셔둔 유영봉안소가 있다. 봉안소 안에 들어서자 당시 항쟁의 얼굴들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곳곳에 빈 공간들은 아직 찾지 못한 유해의 흔적이었다. 이 외에도 광주 신묘역에는 희생자들의 유품과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는 518 추모관과 높이 40M의 석조물인 518민주항쟁 추모탑 등이 있다.

ⓒ 고함20


구묘역과 신묘역 사이의 ‘마음의 거리’

신묘역에서 위쪽으로 올라가 오솔길을 건너면 제 3 묘역인 ‘구묘역’이 나온다. 구묘역은 80년 광주항쟁 당시 계엄군에 의해 살해된 시민들의 시신이 청소차 등에 실려와 매장된 곳이다. ‘국립 518민주묘지’ 관계자에 따르면 신묘지는 국립묘지로 지정돼 국가에서 관리받고 있는 반면 구묘지는 광주시청에서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18 유공자로 등록된 시신만 신묘역에 이장되어있는 것이다. 구묘역엔 이한열, 강경대 열사 등이 신묘역으로 이장되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있다. 관리의 주체가 다른 탓에 각 묘역에 대한 지원도 따로 이뤄지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2008년 5월 18일에 있었던 이명박 대통령의 신묘역 방문은 이와 같은 신묘역과 구묘역의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기념식 참석으로 8,000여 명의 전투경찰이 망월동 주변을 둘러쌌고 구묘역을 참배한 후 신묘역으로 이동하던 열사 유족들의 묘지 참배 길을 막아섰다. 멀리서 온 유족들이 초청장을 보여주며 항의했지만 결국 울분을 터뜨린 채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한홍구 교수는 저서 ‘한홍구와 함께 걷다’에서 “구묘역과 신묘역의 거리는 특정한 죽음을 기린다는 일의 복잡함과 공허함을 동시에 보여준다”고 언급한 바 있다. 신묘역의 화려함과 깨끗한 시설을 보며 느낀 괴리감은 바로 이것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망월동 묘역을 빠져나오며 더 많은 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광주항쟁을 기억하게끔 하려면 이와 같은 ‘마음의 거리’를 줄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 이유는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