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시즌이 될 때마다 열광적인 응원이 펼쳐지는 장소가 있다. 국민적인 울분이 쌓였을 때 촛불로써 응징하는 곳이 되기도 한다. 정치인들의 유세장소가 될 때도 있고 때로는 음악 콘서트가 열리기도 한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시민들과 함께해왔으며, 그렇기에 시민들의 삶이 묻어나는 곳. 바로 서울광장이다. 




서울광장은 급박한 국제정세 속에서 자주독립을 외치던 1897년부터 그 역사가 시작된다. 바로 전해에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갔던 고종은 이듬해에 월산대군의 개인집(덕수궁)으로 돌아오게 된다.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니,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대한제국이다. 하지만 대한제국을 둘러싼 상황, 특히 국제정세는 그렇게 좋지 못했다. 당시 제국주의적 침탈이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는 러시아, 일본 등에 의해 국권이 흔들릴 위기에 처해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종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보다도 대한제국만의 정체성을 세워 자주독립의 기틀을 다지는 데 있었다. 따라서 고종은 덕수궁 대한문 앞을 중심으로 하는 방사선형 도로를 닦고 그 앞쪽에는 광장과 원구단(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을 설치했다. 이것이 오늘날 서울광장의 시초다. 따지고 보면 서울광장은 대한민국의 자주성을 상징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했던 셈이다.

이후부터 서울광장은 민주주의의 요람으로서 민의를 수렴하고 대중의 의견을 표출하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 구한말 일제가 실제적으로 대한제국에서의 우위권을 확보한 후에 고종의 퇴진을 압박하자 이에 반대하는 고종보호 시위가 일어난 것도 그 예 중 하나다. 자주국가로서의 위상을 지키고 싶어 했던 국민들이 대한문 앞 광장에서 자기 목소리를 낸 것이다. 또한 1919년에 벌어졌던 그 유명한 3.1 운동 역시 서울광장에서부터 촉발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해방 이후에 서울광장에서 자주독립 시위, 반독재 투쟁, 민주화 항쟁이 벌어지는 데까지 연결되었다.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부정선거에 항의한 4.19 혁명,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해 굴욕적이고 졸속으로 보상을 받아내려 했던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시위, 호헌철폐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낸 6월 민중항쟁까지 모두 서울광장이 주요 무대를 마련해준 것이다. 이쯤 되면 서울광장은 단순한 쉼터, 그 이상을 넘어서 역사적으로 의미 부여된 시민들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광장은 단순히 2660여억 원의 가치(2010년 5월 31일 공시지가 기준)를 지닌 크기만 한 땅덩어리가 아니다. 단순히 객관적 실체로 묘사하기엔 서울광장은 너무나도 많은 삶의 흔적을 담고 있다. 가장 가까이에는 국가대표팀을 응원하는 월드컵의 열기가 담겨 있고 멀리까지 내다보면 자국의 자주독립을 염원하는 마음까지 깃들여져 있다. 민중들이 기나긴 역사동안 울고 웃고 화내며 즐겨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서울광장도 그들과 같이 호흡하며 같은 감정을 공유해왔던 것이다. 서울광장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필요한 때이면 언제든지 기꺼이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표출할 수 있는 하나의 통로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