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게 된 건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이라는 로맨틱한 부제에 이끌려 보게 된 영화는 꽤나 민감한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은 분명 사랑 이야기이다. 그러나 다른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처럼 킬링 타임용으로 웃어넘길 수 없다. 장애라는 제약 아닌 제약 앞에서 그 누구보다 사랑과 성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영화 <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은 장애인의 성생활, 섹스 테라피스트, 대리 파트너 등 암암리에 쉬쉬하고 있는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우리는 장애인의 인권을 생각하지만 그 안에 ‘성생활, 성욕’은 직접적으로 포함되지 않는다.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외치긴 하지만 성 문제에 있어서는 장애인을 마치 성과 연관이 없는 특수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꽤나 직접적으로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장애인의 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주인공인 마크 오브라이언(이하 마크)은 시인이자 잘나가는 저널리스트이지만 유지 장치가 없으면 숨도 쉬지 못하는 소아마비 환자이다. 마크는 남들과 똑같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키스하고 그 사람이 자신의 몸을 만져주었으면 한다. 하지만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 사랑하는 사람의 눈동자는 당황으로 물들고 부담스럽다는 시선과 함께 그를 떠나간다. 마크의 자유롭지 못한 몸 앞에서 마크가 쓰는 아름다운 글들과 그가 느끼는 사랑은 진정한 의미를 잃고 퇴색된다.

‘들어오지 마시오’라는 투명 팻말

‘장애와 섹스’라는 기사 의뢰를 받은 마크는 성생활을 하고 있는 장애인들을 인터뷰한다. 그러나 인터뷰 내용은 그에게 낯설기만 할 뿐이다. 성이 무엇인지 알고 성욕을 느끼지만 섹스라는 것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크는 섹스를 마치 금기처럼 느낀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그는 그 자신이 ‘야만족을 인터뷰하는 인류학자’가 된 것처럼 느낀다. 점차 섹스라는 것에 다가갈수록 그 문턱에 ‘들어오지 마시오’라는 투명 팻말이 걸린 것 같다고 생각한다.

섹스 앞에서 마크가 느끼는 일련의 감정이나 생각들은 장애인들의 느낌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시선까지 대변한다. 모든 인간이 느낀다는 보편적 욕구인 성욕이 장애인들에게는 금기가 되어 버린다. 우리 사회 또한 장애인의 성욕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려 하지 않는다. 물론 성에 대해 쉬쉬하려는 사회 전반의 인식 탓도 있겠지만 비장애인보다 장애인에게 성에 대한 장벽이 더 높은 것은 사실이다. 정말 ‘들어오지 마시오’라는 투명 팻말이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그 분께서 당신에겐 특별히 허락해 주실 것 같군요”

사랑하는 연인도 없고, 자유롭지 못한 몸 때문에 마땅한 해소 방안도 없는 마크는 섹스 대행인을 찾기로 결심한다. 마크에게는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선택이었다. 그는 유지 장치에 예수의 사진을 꽂아 놓을 정도로 종교에 의지하는 사람이었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원했다. 수많은 고민 속에서 마크는 자신의 말벗인 브랜든 신부를 찾아가 자신의 고민을 신부가 아닌 친구로서 들어달라고 요청한다.

마크는 자신도 성욕을 느낀다고 말한다. 간병인의 의미 없는 손길에 발기하고 사정해야 하는 자신의 비참한 상황을 직접적으로 설명한다. 섹스 대행인 자체가 비록 성경에서 금기시 되는 혼외 관계를 의미하지만 마크의 이야기를 듣던 브랜든 신부는 말한다. ‘그분께서 당신에겐 특별히 허락해 주실 것 같군요’라고. 브랜든 신부의 허락은 마크뿐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해방감을 선사해준다. 브랜든 신부의 대사는 단순하게 종교적 금기에서의 해방만이 아닌 장애인의 성 문제를 표면으로 드러내는 장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브랜든 신부와 마크의 대화는 해방감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다른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섹스 대행인에 대한 그들의 대화는 장애인의 성, 섹스 대행이라는 말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불편함을 예리하게 집어내기 때문이다. 본능과 섹스 대행인의 고용 사이에서 고민하는 마크에게 브랜든 신부는 ‘섹스 대행과 일반적 매춘이 무엇이 다르냐’라고 질문을 던진다.

상당히 현실적인 반응이다. 현실 속에서도 많은 사람이 장애인을 도와주는 섹스 대행인에게 갖는 불편함의 정체이다. 돈을 지불하고 성관계를 갖는 과정이 표면적으로는 매춘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 쟁점에 대해 답을 해주지는 않는다. ‘뭔가 다르겠죠’라는 마크의 대사, 섹스 대행인인 셰릴 코헨 그린(이하 셰릴)의 ‘난 매춘부가 아니에요’라는 말 그리고 세션 과정을 통해 보여줄 뿐이다. 뭔가 다르다고.

섹스 대행인인 셰릴의 고용이후 영화는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마크는 세션을 통해 타인과의 스킨십과 성관계에 대해 배운다. 마크는 셰릴을 사랑하게 되지만 셰릴은 대행인의 자리를 지키면서 세션이 끝난다. 그 후, 마크는 병원에서 새로운 간병인인 수잔을 만나 연인이 되고 영화는 마크의 죽음으로 끝난다.

 

<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은 장애인의 성과 사랑이라는 당연하지만 민감한 주제를 줄기로 전개된다. 그러나 자극적이거나 어둡지 않다. 오히려 유쾌하다. 마크의 대사를 통해 장애인이 성과 사랑에 대해 느끼는 감정들을 자조적인 유머로 전달한다. 영화는 장애인의 입장을 대변하지만 그에 대해 어떠한 답도 강요하지 않는다. 장애인에게도 사랑과 성은 당연하다는 아주 보편적인 메시지 속에서 다소 민감한 쟁점을 불편하지 않게 보여줄 뿐이다. 판단은 관객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