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아이는 나가주세요. 소리지르는 아이는 나가주세요. 뛰어다니는 아이는 나가주세요. 기저귀 절대 갈지 마세요. 실내에서 유모차를 끌지 마세요. 아이들이 우는 것을 포함해 카페 내에서 소란을 피워 고객들로부터 항의가 빗발칩니다. 이곳은 키즈카페가 아닙니다.]

 

 

위 문구는 구미에 위치한 한 카페의 입구에 있는 공지이다. 최근 일부 음식점과 카페, 찜질방 등이 영유아의 입장을 거부하고 있다. 이를 지칭하는 ‘노 키즈 존(No Kids Zone)’이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아이가 들어올 수 없는 상업시설이 전국적으로 늘어나면서 어린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 사이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애가 있으면 카페도 못 가냐며, 현실적으로 아이 키우느라 힘든 엄마들의 입장도 고려를 해달라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특정인의 사용을 규제하는 ‘노 키즈 존’이 엄연한 차별이라며 불매운동을 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한편, ‘노 키즈 존’을 적극 환영하는 이들도 있다. 그 동안 카페나 식당에서 개념 없는 아이나 부모의 행태에 분노한 네티즌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겪은 ‘무개념 부모'의 일화를 소개하며 ‘노 키즈 존’을 지지하고 나섰다. 카페에서 기저귀를 갈고 테이블 위에 두고 가는 것부터 아이들이 식당을 휘젓고 다니며 소란스럽게 하는 데도 전혀 주의를 주지 않고, 오히려 참다못해 아이에게 뭐라고 하는 다른 손님에게 “애 안 낳아봐서 그런다”고 핀잔을 주는 것까지. 그야말로 ‘진상’에 당한 일반 손님들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다.

 

아직 어린 아이이니 이해를 바라는 부모의 입장과 내 돈 주고 온 곳에서 피해 받고 싶지 않다는 다른 손님들의 입장 차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온라인상에서 ‘진상 부모’의 행태가 도마 위에 오를 때마다 사람들은 ‘도덕’의 잣대로 이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양쪽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는 상황에서 ‘입장 바꿔서 생각해라’, ‘내 상황을 생각해 네가 이해하고 넘어가라’는 말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합의할 수 없는 ‘이해’는 요구할 수도 강요당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권리’의 차원에서 다루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권리가 있다. 당연히 아이 엄마에게도 카페나 분위기 있는 식당에 가고 영화를 볼 권리가 있다. 올바른 공중도덕을 교육하여 아이를 통제할 수 있다면 엄마들도 마음껏 권리를 누릴 수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권리를 누리기 위해 지켜야 하는 무언가도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할 것, 이것은 권리와 함께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엄마에게도 권리가 있지만, 그녀가 자기 아이를 통제하지 못할 때 이야기는 달라진다. 모두 제 돈 내고 서비스를 누리러 온 곳에서 방해 받는 것을 참고 있을 필요는 없다. 통제하기 힘든 아이를 둔 엄마는 다른 손님들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하기 보단 그들이 받을 피해를 이성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카페에 데려온 아이가 다른 테이블 앞에서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닐 때, 조용한 분위기의 티타임을 즐기러 온 다른 소비자는 피해를 받는다.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버려진 남의 자식 기저귀를 보고 비위가 상한 다른 소비자도, 영화관에서 아이가 페트병에 소변을 보는 소리를 들은 다른 소비자도 마찬가지다.


 

금쪽같은 ‘내 새끼’가 다른 사람에게는 천방지축 ‘애새끼’가 될 수도 있다. 내 아이를 내가 제어할 수 없다면 키즈 카페나 엄마와 아이 전용 영화관을 갈 것을 추천한다. 키즈 존에서는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어린 아이를 키우는 입장을 배려 받으며 마음껏 권리를 누릴 수 있다. 권리에는 우선순위가 없지만, 하나의 권리가 다른 권리를 침해할 때 우리는 선택을 하게 된다. ‘노 키즈 존’의 등장은 두 입장 사이에서 고민하던 업소 주인이 내린 최후의 선택인 셈이다. 왜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을까. 누구도 남에게 피해를 줄 권리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