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그로] : Aggravation(도발)의 속어로 게임에서 주로 쓰이는 말이다. 게임 내에서의 도발을 통해 상대방이 자신에게 적의를 갖게 하는 것을 뜻한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자극적이거나 논란이 되는 이야기를 하면서 관심을 끄는 것을 "어그로 끈다"고 지칭한다.

고함20은 어그로 20 연재를 통해, 논란이 될 만한 주제들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여론에 정면으로 반하는 목소리도 주저없이 내겠다. 누구도 쉽사리 말 못할 민감한 문제도 과감하게 다루겠다. 악플을 기대한다.


ⓒ 큐브엔터테인먼트

현아는 늘 논란의 중심에 있다. ‘귀엽다’, ‘섹시하다’부터 ‘노골적이다’, ‘야하다’까지 현아에 대한 대중들의 평가는 다양하다. 어떻게 보면 대중들의 평가는 당연하다. 현아는 순수함이나 소녀다움을 노래하지 않는다. 버블처럼 톡톡 터지고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한 자신의 매력을 어필해왔다. 이번에는 잘빠진 몸매를 과시하며 자신을 빨갛다고 표현한다. 애초부터 섹시가 중심 컨셉이었던 현아의 신보가 나올 때면 논쟁이 발생한다. 논쟁의 요지는 현아가 어필하는 매력이 과연 ‘섹시’이냐 ‘천박’이냐 이다. 최근 현아의 신보 ‘빨개요’가 공개된 이후로도 고리타분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심지어 대놓고 현아를 ‘천박하다’라고 언급하는 평론도 등장했다.

주간경향의 문화내시경 <관능적인 ‘빨개요’의 천박함>은 대중음악 성 상품화의 중심에서 현아를 저격하고 있다. 해당 평론이 비판하는 성과 신체의 상품화에 대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대중들은 대중음악을 비롯한 미디어가 주는 섹슈얼한 자극에 익숙해졌다. 내성이 생긴 대중과 그런 대중을 만족시키기 위해 더 큰 자극을 제공하려는 미디어의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 평론을 읽으며 불편했던 점은 과포화된 성과 몸의 상품화에 대한 우려가 아닌 현아를 향한 표현들이다.

해당 평론은 현아의 퍼포먼스를 몸을 파는 행위라고 말하면서 '매춘을 위한 호객 행위'로 연결시킨다. 천박하다는 프레임 안에서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매춘을 언급한다. 현아의 뮤직비디오를 해부하고 각각의 소품들의 메타포를 집어낸다. 평론에 따르면 현아의 작은 손짓에서부터 거대한 소품까지 어느 것 하나도 섹스어필과 맞닿아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이 뿐 아니라 현아와 댄서들의 안무 동작을 ‘발정기에 접어든 짐승의 구애’를 보는듯하다고 말한다.

주간경향의 평론에 나타난 모든 분석이 맞다고 치자. 아니, 맞다. 현아는 분명히 '현아는 맛있어'를 추측하게 하는 노래를 부르고 자신의 몸을 과시하고 있다. 성적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섹스어필을 하고 있다. 하지만 현아가 섹스어필을 한다고 해서 천박하다는 말을 들어야 할 당위성이라도 있는 걸까?

현아를 향한 폭언들이 불편하게 여겨지는 것은 마치 현아가 섹스어필을 했으니, 그들의 언어대로 ‘천박한’ 섹시를 보여줬으니 폭언과 성희롱을 능가하는 발언을 듣는 것도 당연하다는 자세 때문이다. 더불어 똑같이 성애를 묘사하고 섹스어필을 해도 유독 현아에게만 날이 서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비슷한 시기 신곡을 발표한 시스타의 ‘Touch my body’는 여름의 시원함, 시스타의 건강함이 잘 나타난다며 호응을 얻고 있다. 똑같이 엉덩이를 흔들고 자신의 신체를 과시함에도 불구하고 시스타에 대한 평가는 천박함이 아닌 ‘건강한 섹시’이다.

같은 여 아이돌 가수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성별을 뛰어넘어 살펴보면 현아에 대한 폭언이 더 가혹하게 느껴진다. 남성성과 섹시한 근육을 강조하며 짐승돌의 대표 주자였던 투피엠이 무대에서 옷을 찢고 복근을 드러내는 것은 성 상품화라 언급되지 않았다. 남자 힙합 가수들이 노골적으로 성애를 묘사하고 섹스에 있어서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은 쿨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쯤 되면 묻고 싶다. 도대체 ‘건강한 섹시’와 ‘천박한 섹시’는 무엇이 다른 거냐고. 똑같이 섹스어필을 하고 자신을 ‘끝내준다’라고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왜 여자인 현아에게만 비난을 일삼는 거냐고. 아마도 현아의 섹시와 섹스어필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노골적이다’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노골적이다’라는 기준으로 섹시에 급을 나누고 똑같이 노골적으로 성을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인 현아에게 가혹한 표현을 일삼는 것은 이중 잣대이다. 이러한 이중 잣대를 가하며 현아에게 성희롱이라 할 만한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는 문화내시경의 평론가와 대중들의 마음속에는 ‘여성은 노골적으로 섹스어필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시각이 깔려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여성의 노골적인 섹스어필에 극한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며 당연하다는 듯이 인격 모독성의 폭언을 일삼는 사람들에게 여성의 색깔은 ‘하얀색’ 뿐이다. 아이유처럼 눈 깜빡하면 어른이 될 거라며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을 지어야 하고 에이핑크처럼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소녀여야 한다. ‘빨간색’ 립스틱과 같은 도발적인 섹시함은 밖으로 보일 수 없는 금기가 되어 버린다.

대중문화의 성 상품화와 일상화된 섹스어필을 비판하고 싶었다면 굳이 현아를 저격하고 원색적인 표현으로 점철된 평론을 쓸 필요가 없었다. 현아를 예시로 들 수는 있지만 악플과 다를 바 없는 표현은 정도가 심했다는 말이다. 섹시가 컨셉인 여가수의 섹스어필의 표면만을 비난한 것은 지나치게 보수적인 시각이다. 더불어 여성의 신체와 성이 타자화 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아무런 이해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남성과 여성을 막론하고 누군가는 순수성(性)을 어필하고 누군가는 관능성(性)을 어필하는 대중 음악계에서 도대체 어디까지의 성 상품화가 허용될 수 있는지, 허용될 수 없다면 그를 완전히 배제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졌어야 한다. 이러한 성 상품화의 현실을 집어내고 현상 너머의 근본을 지적했다면 문화 ‘내시경’에 걸맞은 꽤 근사한 평론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