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오후 7시, 이화여자대학교 생활도서관에 작은 강의실이 마련됐다. 강의실은 소박했다. 칠판이 없어 종이 몇 장을 책장에 덧댔고, 준비한 유성매직은 잉크가 떨어져 수시로 바꿔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의에 참석한 30여 명은 강의가 진행되는 내내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강사는 김영곤 전국대학강사노동조합 대표. 사람들에게는 ‘고려대에서 해고된 시간강사’로 더 잘 알려진 김영곤 교수는 이날 ‘한국 노동사와 사회운동의 방향’이라는 주제로 1시간 30분가량 강의했다. 이날 강의는 대학생들이 직접 기획한 부당해고강사들의 릴레이 대중강연회 ‘빼앗긴 강의실에도 봄은 오는가?’의 첫 시간이었다.



김영곤 교수가 준비한 종이 위에 강의를 하고 있다. ⓒ고함20



김영곤 교수는 세계의 노동사를 네 가지 단계로 설명했다. 수렵과 채취, 농경과 축산, 공장제 자본주의, 공동체주의가 그것이다. 그는 현재 우리 사회가 공장제 자본주의에서 공동체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있다고 보았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투쟁이 “함께 살자”는 구호를 내세운 것이나 지난겨울의 ‘안녕들하십니까’ 열풍이 자신들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철도민영화 문제에도 목소리를 냈다는 사실 등에서 이러한 과도기적 흐름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 김 교수의 설명이다.


“세월호 특별법을 위해서 애쓰는 유가족들 역시 마찬가집니다. 제대로 된 세월호 특별법이 통과된다고 해도 그분들의 자식이 살아나는 건 아니죠. 그렇지만 계속 노력하시는 건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는 남의 자식을 살리겠다는 마음 때문이에요.”


김영곤 교수는 이어서 세계노동사와 한국노동사를 비교했다. “유럽에서 수백 년에 걸쳐서 일어난 노동 관련 변화가 한국에선 1970년대 이후 지금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에 이뤄졌어요.”


한국노동사의 특징은 노동조직의 변화 양상에서도 드러난다. 유럽을 포함한 많은 국가에서는 철도 등의 공공재를 국유화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과 달리, 한국에선 민영화가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협동조합이나 공기업에 대한 인식이 낮고 UN 등 세계정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지 않은 것 또한 한국의 특징이다. “하지만 공장제 자본주의에서 공동체주의로 나아간다는 커다란 흐름에 있어선 한국도 같습니다.”



강의를 듣고 있는 참석자들. ⓒ고함20



저녁 시간에 진행된 강의여서인지 일부 참석자는 잠깐 졸기도 했다. 김영곤 교수는 이들을 집중시키기 위해 질문 등을 통해 참여를 유도했다. 세계정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는 즉석으로 세계대통령 투표를 가정해 후보를 추천받아 대통령을 뽑기도 했다. 후보로는 간디, 호치민, 세종대왕, 넬슨 만델라가 추천됐고 거수투표를 통해 간디가 최종 세계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강연의 마지막은 한국 사회운동의 과제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졌다. 김영곤 교수는 이 대목에서 협동과 실천을 강조했다. “지금은 다들 ‘경쟁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을 ‘협동해야 살 수 있다’로 바꿔야 해요. 실천 역시 중요합니다. 한국사회는 민중의 의지가 강력한 대신 지도자와 지식인의 실천의지가 약한 단점이 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이론과 실천의 상호작용이 필요하겠죠.”


강연이 끝나고 30분 동안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참석자들은 민중과 통일 등 다양한 주제의 질문을 던졌다. 이 가운데 최종운 고려대 총학생회장은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대학사회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나 호응이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변화의 시발점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했다.


김영곤 교수는 변화를 위해선 현재의 대학 강의가 개선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가 개선의 주요 부분으로 꼽은 것은 비판의 허용, 교원 1인당 학생 수 감소, 절대평가 도입 등 3가지였다. “강의를 할 때 학생 수가 20명이 넘어가면 교수가 학생들에게 활발한 토론을 장려하기가 힘들어요. 교원 한 사람이 담당하는 학생 수가 줄고 절대평가가 도입된다면, 학생들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타인과 소통하는 것에 익숙해질 거예요. 자연스럽게 비판의식도 높아져서 궁극적으로 대학사회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겠죠.”


강연을 기획한 단위 중 하나인 고려대학교 생활도서관의 곽승찬(21, 고려대 건축학2)씨는 “학기 중에도 해고강사님들의 투쟁과 관련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이번 방학에는 그걸 좀 확장해서 해고강사 문제에 관심이 적은 일반 사람들에게도 문제를 알리고 싶었다”고 릴레이 강연회의 기획 이유를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