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열리는 크고 작은 영화제를 모두 합치면 100개가 훌쩍 넘는다는 사실을 아는가? 하지만 주목받는 영화제는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오늘, 매우 생경하게 느껴질 지도 모르는 영화제 하나를 소개하려 한다. 바로 여성인권영화제이다. 국내에 3개뿐인 여성 관련 영화제 중에서 인권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는 유일하다. 여성과 인권, 선명한 단어 두 개가 결합된 이 영화제는 어느덧 4살이 되었다. 한국여성의전화 정책국장 란희를 만나 여성인권영화제가 무엇인지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그녀는 영화제를 ‘피움’이라고 불렀다. 피움=FIWOM=FIlm festival for WOMen's rights. 왠지 무언가를 피워내는 두근두근한 느낌이 들었다. 예쁘고 다정한 이름과는 달리 피움은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보다 깊이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의견에서 시작된 ‘진지한 목적을 지닌’ 영화제였다. 여성폭력 방지 및 근절을 위해 애써 온 한국여성의전화가 그 연장선상에서 더 많은 이들과 접촉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 피움이었다. 피움의 기본 생각은 폭력은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치유하고 해결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사라져야 한다는 것. 2006년 처음 열린 피움은 올해로 4살이 되었다. 왜 5살이 아니라 4살일까?
“작년에 못했어요. 전반적으로 상황이 좋지 않았어요. 영화제는 아니었지만, 원래 정부와 협력해서 하려고 했던 관련 사업이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일이 생겨 행정소송도 했구요. 하지만 뭐래도 결정적인 건 재정난이었죠.”
그래도 올해는 다행히 잘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어차피 돈 없는 건 마찬가지지만 지금 0원일지라도 일단 시작해 보자는 마음이 앞섰단다. 피움은 고정섹션과 각 회에 새로 생기는 신규섹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성폭력의 현실과 구조를 드러낸 ‘여전히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능동적이고 용기 있는 피해자들의 이야기 ‘일상과 투쟁의 나날들’, 폭력에 노출된 모든 사람들이 생존 이후의 삶을 고민하는 ‘그대 마음과 만나 피움’ 이 3가지가 기본 틀이었다. 올해에 처음 생긴 다른 섹션이 궁금해졌다.
“새로 시작하는 건 FIWOM zoom in, FIWOM zoom out이라는 건데요. zoom in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라는 이름으로 몸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특히 올해는 낙태 문제 때문에 시끄러웠기도 했고요. zoom out에서는 연애를 다룰 거예요. 우리가 흔히 연애를 개인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솔직히 연애하는 게 다 비슷하거든요. 단순한 개인적 경험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학습된 면도 있다는 거죠. ‘연애의 이해와 실제’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연애라는 경험에 대한 남녀의 해석의 차이를 보여주는 작품들과 연애를 통한 자기 성찰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들을 가지고 같이 이야기해보려고 해요.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피움(FIWOM) 제공
1회부터 올해 4회까지 쉬지 않고 참여했으며 3회 때 총괄책임을 맡기도 한 그녀는 기본적인 업무를 하는 것은 물론, 피움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능을 한 가지 더 피워냈다. 직접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영화제에서 상영한 것. 원래 영상작업에 관심이 있었다고 하지만 스스로 감독이 되고 나서야 왜 사람들이 영화에 매달리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단다. 그 동안 두 작품을 선뵀다. 상담자-내담자 간의 관계를 주제로 한 <앞치마>와 쉼터 운영 20주년 기념영상이었던 <쉼터를 만나다>는 피움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상영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2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영화제에서 상영할 영화를 고르는 기준을 단단히 굳혔다. 불필요한 기교는 쓰지 않는다. 메시지는 정확하게 전달한다. 앞선 2가지 원칙은 꼭 지키려고 했다. 지나친 예술성을 강조하느라 대중과 소통할 접점을 찾지 못한 영화들은 피움에서는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제의 파급력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관객과의 소통이었기에 그녀는 꼼꼼히 작품을 고른다고 했다.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소통'이었다.
피움을 꾸리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호기심이 생겼다. 피움 스탭은 '피움족'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서로의 호칭은 ‘선생님’으로 통일해 부른단다. 어설프게 사람을 가름할 수 있는 학번, 학교, 나이, 지연 등의 외부요소를 철저히 배제한 채 뽑는다는 것 역시 매우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현재 3차까지 모집했고 4차 모집은 9월 18일부터 29일까지라고 한다. 프로그램팀, 홍보팀, 이벤트팀, 후원재정팀, 운영지원팀으로 나뉘어 신나게 활동하고 있단다. 지원방법은 논술형 지원서를 제출하는 것이 전부였다. 여성폭력에 대한 의견, 지원동기, 얻고자 하는 것을 자유롭게 기술하면 끝! 얼핏 보기에는 시간과 정력만 쏟고 스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 활동에 사람들은 왜 몰려드는 건지 조심스레 의견을 물었다.
“자원활동가들을 보면 꾸준히 하는 사람들이 꼭 있어요. 저랑 저희팀 중 1명은 4년 내내 했고, 같은 팀에 있는 2명은 2회 때부터 함께 했죠. 왜 또 이걸 하러 왔냐고 술자리에서 종종 묻긴 하는데 정확히 기억은 안 나네요. 그래도 대부분은 비슷한 마음일 거예요. 의미 있는 일에 동참한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만들어 가는 거니까 애정도 생기고요. 어떤 친구는 습관이라고 하기도 하더군요. 우리는 피움을 ‘우리 영화제’라고 해요.”
출처 : 피움(FIWOM) 공식 블로그
피움을 알게 된 지 고작 몇 시간밖에 되지 않았지만 꽤 매력 있는 영화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으리으리하고 호화로운 블록버스터급 영화제는 아닐 지라도, 확실한 주제의식과 컨셉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피움을 만들어 가는 이들의 열정과 애정도 으뜸이었다. ‘우리 영화제’라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1회 첫 걸음부터 함께 해 온 란희는 이 영화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혹시 그들만의 축제로 묻히지 않을까 조바심 내고 있진 않을까.
“그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아직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은 건 사실이니까요. 그렇지만 그렇게 된 데에는 참 다양한 이유가 있어요. 일단 영화 좋아하는 마니아들을 위한 영화제가 아니고, 주제도 특이하잖아요. 여성에, 인권까지. 그러다 보니 여성주의와 조금이라도 인연이 닿는 사람들이 와요. 알고 찾아오는 경우가 많죠. 아, 그리고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홍보가 시급한데 일단 재정이 딸려요. 큰 영화제처럼 서울 곳곳에 포스터 붙이고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싶지만 현재로선 역부족이네요.”
비록 많은 이들의 눈에 띄지는 않지만, 스스로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뒀다는 증거가 아닐까. 피움을 주제의식이 뚜렷한 특성화된 영화제로 키우고 싶다는 그녀는 앞으로도 단관 상영 방침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또한 한국여성의전화 내 한 가지 프로그램을 넘어 여성주의적 문화운동의 한 갈래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피움에서 올해부터 도입한 사전제작지원제도도 그러한 발걸음의 일환이다. 여성인권영화 탄생을 장려하고 나아가 판을 만들어 주자는 생각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이왕 시작한 것, 10년은 해서 피움을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고 싶다는 란희. 그녀는 오늘도 작업에 몰두하며 바삐 달려가고 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피움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게 되지 않을까 감히 상상해 본다.
* 피움(FIWOM)
- 일시 : 2010년 10월 6일 (수) ~ 10월 9일 (토)
- 장소 : 인사동 씨네코드 선재(구 아트 선재)
- 티켓 가격 : 영화 한 편당 5000원, 4일권 50000원.
- 4차 자원활동가 모집 중! 9.18 ~ 9.29
http://fiwo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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