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잉여'를 사람에 붙여 쓰는 경우는 드물었다. 보통 '잉여'라는 단어는 사물과 함께 쓰여, '다 쓰고 난 나머지'를 뜻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이 개념이 사람에게도 적용되어, '잉여다,' '잉여롭다,' '잉여인간' 등의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요즘은 이러한 단어들은 일상생활에서도 별 거리낌없이 사용될 정도로 정착되었다. 

평소와 같이 잉여라는 단어를 습관적으로 사용하던 어느 날이었다. “방학인데, 요즘 뭐하고 지내?” “나 잉여야.... 하는 것도 없이 시간만 죽이고 있어ㅜㅜ” “나도 마찬가지야. 잉여 생활 중 ㅠㅠ” 친구와 함께 대화를 주고 받다가 순간 나는 잉여라는 단어가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왜 “나는 잉여야”라는 말 뒤에 눈물을 흘리는 이모티콘을 덧붙이고 있는가? 나는 잉여스러움에 왜 죄스러워야 하는가?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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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인 우리

과제와 시험으로 정신 없던 한 학기를 지나 우리에게 주어진 두 달이라는 시간, '방학'이라는 두 글자는 왠지 모를 설렘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굳은 다짐을 하게 한다. 대학생들은 방학을 맞이하기에 앞서 방학 동안 성취해야 할 목표를 가다듬곤 한다. 뚜렷한 목표를 세우지 않더라도, 방학 동안 무엇을 할지 리스트를 만들어 본다. 그런 대학생에게, 잉여만큼 꺼려지는 단어는 없다.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하고, 내세울만한 활동 없이 보내는 잉여로운 방학은 대학생에게 실패한 방학생활로 간주되기 일쑤다. 

어떠한 이유로 우리 의식 속에 '잉여 = 실패'라는 공식이 성립된 것일까?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여 있다. 방학은 특히나 더 그렇다. 방학은 어떠한 의무와 제약도 존재하지 않는 자유 시간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한 기회이다. 기회를 낭비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 자신에게 의무와 과제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60일이라는 시간을 이용하여, 토익을 공부하고, 공모전을 준비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잉여'는 모처럼 주어진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는 죄스럽고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무엇이 잉여를 죄스럽게 만드나?

잉여를 죄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다. 취업이라는 경쟁 시장에서 요구되는 조건을 충족시키기에 시간은 촉박하고 마음은 조급하다.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 다양한 대외활동을 하기 위해 한 학기를 다 쏟아 부었다. 방학도 예외가 아니다. 방학은 뒤쳐진 어학 점수를 만회하고, 비어버린 이력서를 채울 또 다른 의무의 시간이다. 온갖 의무와 제약에서 벗어나,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하고 한가롭게 여유를 즐기고자 하는 것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 투정으로 간주되곤 한다. 결국, 경쟁은 방학을 방학답지 않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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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와 '잉여가 아닌 것', 잔인한 이분법 사이에서

쉴 새 없는 경쟁은 대학생의 생활을 '잉여'와 '잉여가 아닌 것'으로 나누어 버린다. 이 둘을 나누는 기준은 ‘쓸모가 있는가 없는가,’ 혹은 ‘아웃풋을 창출해낼 수 있는가 없는가’이다. 자신의 앞날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잉여로 치부된다. 때문에, 휴식마저 잉여의 카테고리에 포함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제대로 놀 줄 모르게 되고 제대로 쉴 줄 모르게 되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낙오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에게 휴식을 허락하지 않는다. 잉여에 대한 두려움은 끝없는 달리기로 우리를 지치게 만든다. 

나아가, 이러한 이분법적 잣대는 사물을 넘어, 사람에게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인간’과 관련된 가치마저 실질적으로 유용한가, 아닌가에 따라 나뉘게 되는 것이다. “나 잉여야…ㅜㅜ”라는 문장은 이러한 맥락에서 생겨난다. 눈물을 흘리는 이모티콘은 아무런 아웃풋도 창출해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자책의 의미다. 그렇게 우리는 '잉여'라는 이름 아래 자신도 모르게 인간으로서의 가치마저 훼손하기도 한다.



'잉여'라는 단어 앞에서 당당해지는 두 가지 방법

그 누구도 강요하는 이 없지만 의무적으로 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고, 우리는 그것들을 충족시키느라 정신이 없다. 정해진 공정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흘러가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상품같다. 조금이라도 뒤쳐지거나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불량품으로 간주되어 가차없이 버려진다. 그걸 알고 있는 우리는 컨베이어 벨트 위를 애달프지만, 얌전히 타고 있는 수 밖에 없다. 행여나 그 공정에 충실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면, '잉여'라는 단어로 자책하면서.  

'잉여'라는 단어 앞에 당당해질 수는 없을까. 적어도 두 가지 방법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컨베이어 벨트를 얌전히 타고 가며 누군가에 의해 정해진 공정을 충실히 받는 것. 아니면, 그 벨트 위에서 뛰어내리는 것.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우리 손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