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유령, 고졸 채용이라는 유령이 한국에 떠돌고 있다. 산업은행, 기업은행 등 금융권을 중심으로 촉발된 유령은 공기업과 대기업에게까지 스며들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7월 20일 기업은행을 방문해 “최고의 애국자는 고용 창출을 많이 하는 사람이며 고졸 채용은 매우 좋은 정책”이라며 이 유령을 환영했다. 물론 “나도 야간 상고 출신” 이라는 ‘해봐서 안다.’ 드립도 빼놓지 않으셨다. 대통령부터가 고졸 채용을 옹호하고 나서니, 기업들은 앞을 다퉈 고졸 채용 인원을 확대하겠다고 달려든다. 여당도 고졸 고용할당제 도입을 검토하겠단다. 고졸 채용이 유령을 넘어 하나의 정책이 될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이쯤되면 대통령이 시장의 자율권을 훼손했다고 한 마디 할 만한데, 친시장적이라는 보수언론들 역시 고졸 채용 정책을 ‘홍보’하는 수준에서 그친다. 진보진영이 수십년간 역설했음에도 공론화되지 못했던 ‘학력 차별 철폐’ 라는 가치가, 유령에 힘입어 단 몇 주만에 국민적 합의를 얻은 것만 같다.
 
이 바보야, 문제는 ‘청년 실업’ 이야, ‘고졸 실업’ 이 아닌.

@서울신문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학력 차별 철폐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고졸 채용자에게 취업의 문턱을 낮춰주는 것은 학력 차별을 줄이는 방안이 될 수 있다. 현재 대졸 채용자들이 하고 있는 업무의 대부분은 고졸 인원들이 충분히, 혹은 훨씬 더 잘해낼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고, 사회에 학력 인플레 현상이 심해졌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문제의 핵심은 ‘청년 실업’이지, ‘고졸 실업’ 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남 광주 소재의 한 대학에 재학 중인 Y모씨(23)는 “이러면 안 된다는 거 알면서도, 고졸 채용 증가가 마냥 좋게 보이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지방대나 전문대의 취업 문제도 심각한데도 고졸 취업 문제만이 조명 받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한 것이다. 실제로 고졸 채용 확대 의사를 밝힌 기업들은 예년과 비슷한 인원을 채용하되, 그 중 고졸 인원을 늘리겠다는 방침이다. 애초에 채용 인원 자체가 증가되지 않으니, 결국 고졸 인원 채용이 늘어나는 만큼 대졸 인원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일자리 증가가 동반되지 않은 고졸 채용 증가는, 결국 고졸과 대졸 사이의 ‘의자 뺏기’ 경쟁이 된다. 대학생들이 고졸 채용 확대를 무턱대고 환영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고졸 채용' 이 문제일까, '청년 채용' 이 문제일까. @동아일보

대책 없는 고졸채용, 비정규직만 양산된다.

문제는 또 있다. OECD에 따르면 한국은 고졸자에 비해 대졸자의 임금이 무려 160% 높은 나라다. 이는 OECD 국가 중 미국에 이은 두 번째 순위다. 초임을 보더라도, 고졸은 137만원, 대졸은 203만원이다.(2009년 자료) 이렇게 대졸자와 고졸자의 임금 격차가 존재하는 이상, 고졸 채용 확대는 일회성 선심에 그칠 수밖에 없다. 취업을 할 수 있다 해도 막상 기업에 들어간 후 차별이 존재한다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하느니, 대학을 졸업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고졸 채용 정책은 ‘말짱 도루묵’이 될 것이다.

또 고졸자 채용 이후 역시 문제다. 현재 고졸 채용 확대에 가장 적극적인 금융계, 특히 은행에서 고졸자는 2년 계약직으로 고용하는 것이 관례였다. 대졸자는 정규직으로, 고졸자는 비정규직으로 고용하는 기형적인 행태가 이어져온 것이다. 이런 악습이 근절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행되는 고졸 채용 확대는 결국 비정규직 대량 양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

고졸 채용은 비판 없는 성역인가

고졸 채용 확대의 가장 큰 문제점은 찬성만 있고 비판은 없다는 점이다. 진보 진영에서 내세우는 학력 차별 철폐의 일환에서 시행되는 정책이라 그런지, 견제와 비판을 해야 할 야당과 진보언론들도 조용하다. 그러다 보니 이와 관련된 보도들은 온통 홍보 일색이다. <동아일보>는 ‘전문계高 어깨 펴주자’ 라는 기획기사로 이명박 정부의 정책인 ‘마이스터고’를 홍보했고, TV의 뉴스는 연일 ‘어떤 기업도 고졸 채용에 동참했다더라.’ 식의 홍보성 기사를 보도한다. 진보언론들은 조심스레 ‘선거를 앞두고 선심성 정책은 아닌지’ 등으로 변죽만 울릴 뿐 제대로 된 비판은 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민주당의 정세균 의원은 고졸자 출신을 대거 채용한 강만수 산업은행장을 “살다보니 별 일이 다 있다.” 며 칭찬했다.

물론 야당이라 해서 언제나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좋은 정책에는 박수를 쳐주는 것이 옳다. 그러나 정책은 언제나 야누스의 얼굴을 가지는 법이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정책은 있을 수 없다. 특히 특정 집단에게 혜택을 주는 정책은 언제나 사회적 갈등을 야기했다. ‘서울대 지역균형선발제도’, ‘여성 할당제’, ‘군 가산점 제도’ 등의 정책은 모두 커다란 비판을 받고, 사회적인 토론을 유발했다. 그러나 이와 달리 고졸 채용 확대는, 그야말로 유령이다. 소리 없이 다가와 몇몇 기업에서 시행되더니, 어느덧 ‘사회적 합의’를 얻어버린 듯 보도되고 있다. 우리는 좋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책이 현실에서 악용되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다. ‘학력 차별 철폐’와 ‘학력 인플레 해결’이라는 목표에는 공감하지만 조금 더 신중하게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하는 이유이다.

@한국일보



고졸 채용 정책을 지지할 수 없는 이유

고졸 채용이라는 유령이 미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선거철이 끝나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지도 모르고, 한국 사회에 깊숙이 박힌 ‘학력’ 이라는 옹이를 뽑아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충분한 토론 없이 시행된 정책은 성공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지금의 ‘묻지마 고졸’ 채용은 분명 과열되어 있다. 그리고 대졸과의 역차별 문제, 채용 이후 방침 부재 등 논란의 소지가 있다. 그러나 이 문제와 관련한 보도들을 정리해보면, [대통령은 ‘나도 상고 출신’ 드립을 치셨고, 기업들은 명비어천가를 부르며 너도나도 고졸을 채용하겠다고 난리고, 언론들은 그런 기업들을 보여주며 띄워주기 바쁘고, 야당은 ‘네가 웬일로?’] 하고 있는 꼴이다.

그 와중에 대졸자는 침이 마른다. 대학진학률이 비정상적으로 높다지만, 그렇다고 대학진학자가 비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이 ‘미친 사다리’는 사회가 만든 것이지, 대학생들이 만든 사다리가 아니다. 그리고 사회는 스스로 만든 ‘미친 사다리’를 걷어차 대학생들을 떨어뜨리려 한다. ‘학력 차별’이 한국 사회의 고질병이라면, ‘청년 실업’은 근래 생긴 악성 종양이다. 어쩌면 고졸 채용이라는 약은 고질병에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청년 실업’이라는 악성 종양에도 효과가 있을까? 오히려 고질병 잡자고 종양 터뜨리는 격이 아닐까? 고졸 채용이라는 정책에 무조건적인 지지만을 보낼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