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보다 ‘고대녀’ ‘해적녀’라는 별칭이 더 유명한 김지윤씨를 만났다. 그는 ‘레프트 21’의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레프트 21이 운동단체 ‘다함께’가 만드는 격주신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글’을 통해 계속 투쟁을 하고 있는 셈이다.

20대 시절의 대부분을 ‘다함께’라는 운동단체에서 반전·노동 운동에 힘썼던 그였다. 10년 동안 ‘고대 병설보건대 투표권 인정요구’ 시위, 광우병 촛불시위, 강정해군기지 반대 등 굵직굵직한 투쟁현장에서 자신의 이름을 남겼었다. 그러나 학생 운동권이 몰락하고 있고, 진보정치가 대중들의 외면을 받는 가운데서, 그의 투쟁도 빛이 바랬다.

회의감이 들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여전히 꼿꼿하고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두려움이 없어 보였다. 인터뷰 내내 노동자들의, ‘99%’의 투쟁이 필요하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며, 미래에 대해 비관적이거나 회의적인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정치 사안에 대해 물어보면 거의 답변은 정해져있는 듯했다. 그의 신념이 너무 확고해서였다. 그래서 20대로서의 ‘삶’을 주목해봤다.
 

 


Q. 내가 만나본 20대 중후반의 운동권들은, 2002 촛불시위로 정치화가 되는 케이스가 많았다. 지윤씨도 마찬가지였나?

나는 경남 마산에서 왔다. 사실 자라면서 시위나 집회 같은 걸 본적이 한 번도 없었다. 버스 파업 같은 게 간혹 있긴 했는데. ‘아 오늘 걸어가는 날이네’ 정도로 생각했다. 당연히 파업을 왜 하는지 하나도 몰랐다. 운동권은 80년대에 끝난 거로 생각했고, 드라마에서 나오는 추억거리라고 생각했다. 우리 사회에 이런저런 문제가 있지만, 살만하다고 생각했다.
 
 

Q. 대학에 와서 달라진 건가?

언론인이 되고 싶어 교지편집부에 들어갔다. 당시 이명박 시장이 청계천 개발을 하면서 노점상들을 쫓아내는 것을 보게 되었고, 피해자인 노점상들을 인터뷰하면서 문제의식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라크 전쟁과 노무현 정부의 파병 등을 보면서 충격을 받기도 하면서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2004년도에는 교지편집부 소속으로 인도 뭄바이 세계 사회 포럼을 가게 되었는데, 도착하자마자 빈부격차가 느껴졌다. 구걸하는 아이들도 많았고, 엄마가 아이들에게 구걸을 시키고 있었다. 자기 자식에게 구걸을 시키게 만드는 사회에 대해 분노가 일어났다. 그런데 인도의 빈부격차를 보면서 한국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한참 타워팰리스 이야기가 나오고 있을 때였는데, 그 옆에는 바로 판자촌이 있지 않은가. 그런 경험이 나에게 이 사회가 부조리하고 부정의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깨달음을 준 것 같다. 이 사회의 진실의 단면을 직접 눈으로 보고 나니까, 분노를 하면서 각성을 하게 됐다.
 

Q. 다함께에서는 교지편집부 들어가자마자 활동하게 된 것인가?

아니다. 다함께는 2학년 때 가입을 했고, 활동을 열심히 하게 된 건 그러고 나서도 한참 있어서다. (열심히 하게 된 계기는?) 시나브로...(웃음) 반전운동을 열심히 했고, 반전 운동에서 다함께가 하는 역할을 보았다. 나도 이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 옳다고 느껴지고, 힘을 보태야겠다는 확신을 가져야 열심히 하지 않겠는가. 내부에서도 수많은 토론과정을 거치면서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이를테면 2004년 탄핵이 터졌을 때 다함께의 입장을 지지했다. 그때 학내 운동권에서도 입장이 갈렸다. 어떤 쪽은 ‘노무현을 방어하자. 우리 대통령 노무현이 탄핵되어서는 안된다.’ 이런 입장이었고, 다른 쪽은 ‘노무현은 탄핵되어 마땅한 대통령이기 때문에 방어할 필요가 없다’였다. 다함께에서는 ‘노무현이 탄핵당해야 한다면 민중들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한나라당에 의한 탄핵은 노무현과 그 옆과 뒤에 있는 진보진영을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입장을 취하면서, 탄핵 반대 운동에 동참하기로 하고 진보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나는 그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Q. 운동한 것에 대한 후회는 없는가? 운동을 안 했으면 명문대 학벌을 기반으로 좋은 직장을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후회는 굳이… 나는 활동하면서 스스로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질 수 있었고, 그 눈을 통해서 본 세상에 대해서 스스로 판단하고, 부조리함을 바꾸기 위해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해나가는 과정이 있었다. 친구들과 통장 잔고에서는 현격한 차이가 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삶에서 얻는 자존감이라는 게 있었다. 나는 희생하면서 운동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와, 내 가족, 친구들과 같은, 이런 보통의 사람들이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위해서 내가 노력하는 것이지, 희생은 아니다.

Q. 희생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남들에게는 희생처럼 보이기도 한다. 삶의 소소한 즐거움을 놓친 부분은 많을 것 같은데.

나름대로 재미있게 살아왔다. 운동하면서 마음 맞는, 삶에 대한 진정한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도 많이 만났다. 20대에 나름의 가치관을 세우고, 어떤 ‘뼈대’를 세웠다는 점에서 좋았다. 아쉬운 부분은 여행을 조금 더 가봤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 세계사회포럼에 참여하기 위해 인도도 가고, 세계반전포럼을 위해 이집트 혁명 전야의 기분도 느껴보고… 나름 그곳에서 많은 경험을 한 것 같다.
 

Q. 사실 운동의 가장 큰 방해요소는 돈도 아니고, 애인도 아니고, 부모님이다. 부모님은 말리시지 않았나?

운동하는 걸 부모님이 알게 되신 계기 자체가 학교에서 출교당하고 나서 (김지윤씨는 병설보건대 투표권 보장 시위를 하다가, 교수들의 퇴근길을 막고 그들의 의견이 담긴 요구안을 내민다. 그러나 교수들은 끝까지 요구안을 받지 않고  복도에 있는 의자에 앉아 버티고 있었다. 다음 날 이 사건은  ‘교수 감금’으로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시위 주동자로 출교당했지만 재판을 거쳐 복학을 했고, 현재는 졸업을 했다.) 이후에 천막투쟁 하면서 알게 된 것이다. 일단 마녀사냥 당하는 상황에서 구출하는 게 부모님으로선 중요한 상황이기 때문에 반대할 겨를이 없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우리 딸이 무슨 활동을 하다가 학교에서 출교까지 당했지?’ 이렇게 생각하셨을 거다. 그런데 겪어보니까 학교라는 거대 권력과 언론들이 작당을 하고, 학교에서 운동하는 애들을 뿌리를 뽑으려고 하는 거라고 느끼신 것 같다. 그런데 우리 애들 투쟁에 미화 노동자분들도 연대하고 있지? 저분들은 왜? 이런 부분에 대해서 하나하나 관심을 넓혀가는 과정을 부모님도 같이 겪으셨다.

부모님도 딸에게 거는 기대가 분명 있으실 거다. 가끔 죄송하기도 한데, 그 죄송함을 갚는 방법이, 남들처럼 돈을 많이 버는 건 아닐 것이다.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 내가 후회하지 않고, 내 길에서 내 확신을 가지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님에게 떳떳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Q. 통합진보당 청년비례대표 경선에 도전하고, 20대 국회의원에 도전했었다. (현재는 탈당) 당시 청년비례대표에서도 부정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구)당권파들에 대한 원망이나 불신은 없나?

통합진보당 사태에서 경선비례후보 전원 사태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지지했다. 구당권파는 정치적 책임을 지면서 진보정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과정을 보여줬어야 하는 데 그게 안 돼서 사람들의 환멸을 부추겼다. 물론 신당권파도 경선부정에서 자유로울 순 없는 상황이고, 그쪽이 자신들을 보호하려고 마녀사냥을 방조한 측면도 있다. 어쨌든 이 문제는 구당권파든 신당권파든 진보의 원칙에서 진실을 파악하고 정의를 바로 세우는 과정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두 세력 다 그 문제에 대해 노력하지 않아서, 지리멸렬하고 갑갑한 현재의 상황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고 본다. 어느 한 파에 대한 원망보다는, 당시 그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그럴만한 능력과 위치에 있었던 분들의 태도에 대해서 여전히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Q. 국회의원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나? 새누리당 이준석씨는 운동권들이 10년 동안 좌파 운동하다 보면, 다른 걸 할 수 없기 때문에 정치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고 말했는데, 이 말에 대한 본인의 생각은?

진보정치가 정당에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진보 내에서 진보 정당이나 의회는 일부분이라고 본다. 때문에 그 부분에서 기여할 게 있다면 '그것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을 뿐이다. 일신의 출신만을 생각했다면 통합진보당에서 경선하는 것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통합진보당으로 나가세요,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나로서는 소외받는 사람들 편에 서서 목소리를 내는 역할에 동참하고 싶기 때문에 진보정당 활동을 하는 것이다. 활동의 일부분인 것이다. 그리고 정말 국회의원이 인생의 목표로 생각되었다면 해적기지 사건이 터졌을 때, 사과했을 것이다. 정치 안하면 뭐 할거냐고? 싸워야 한다.

Q. 해적기지라는 표현은 대체 왜 썼는가?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소지가 있었던 것 같은데

독창적 표현은 아니다. 지난해부터 건설이 강행되고, 물리력으로 반대운동을 짓밟는 과정 속에서 나왔던 단어다. 주민들이나 평화활동가 분들이 ‘해적이나 다름없다.’ ‘해적기지다.’ 이렇게 말해고, 실제 해적기지처럼 건설됐다. 문정현 신부님같이 거기에서 오랫동안 운동에 헌신해온 분들이 그런 표현을 썼고, 나 역시 그분들을 따라 쓴 것이다. 내가 ‘해적’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해군이 ‘자신들의 명예를 훼손했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지금 제주 강정에서 해군이 하고 있는 일 자체가 그들 스스로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 있는 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고, 생존권을 빼앗고, 그런 운동가들을 연행해가고, 연행한 사람들 구속시키고, 벌금을 몇천몇억씩 물리고 있는 건 해적이나 다름 없어 보인다.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조금의 사과나 반성 없이, 표현만 꼬투리 잡아서, 마치 사병들의 명예를 위하는 양 구는 해군당국이 위선적이라고 생각한다.

투쟁하는 사람들의 정제되지 않은 언어 속에 진실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거기 계신 울분이 ‘해적’이라는 표현에 담겨 있는 거 아닌가. 강정의 진실이 그 단어에 녹아있는 것이다.
 

 

Q.요즘에는 해군기지 반대하면 종북이라고 하더라. 그런 말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종북이라는 말은 모욕적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에 대해 우호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물론 나는 지지하지 않지만, 그 사상 자체가 탄압을 받으면 같이 싸워야 하는 문제라고 본다. 보수가 ‘종북’으로 지칭하는 사람들은 남한에서 민중운동에 헌신해왔던 사람들이다. 나는 그 분들을 동지라고 부른다. 나와 북한 문제에 대해서 입장이 다르지만, 해군 기지, 쌍차 문제 등 다른 수많은 쟁점들에서 동지로 부를 수 있는 분들이 굉장히 많다.

좌파의 투쟁. 진보적 투쟁을 폄하하는 수사로 종북이라는 단어를 쓴다는 생각이 든다. 이한구 같은 사람은 한명숙, 이해찬도 종북이다 이렇지 않나. 어떻게 국회에서 ‘종북 백과사전’ 같은 걸 들고 나올 수가 있는지 궁금하다. 이명박 정부들어서 표현의 자유가 심각히 침해되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종북이라는 단어는 그런 걸 보여주는 표식 같은 거다.
 
 

Q. 대선은 진보세력이 크게 고전을 할 것 같다. 대선 이후에 진보 정치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일단 지금 세계경제 위기가 심각한데, 한국도 그런 위기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미 위기를 겪고 있는 유럽 같은 곳에서 교훈을 찾을 필요가 있다. 얼마 전에도 23개의 국가에서 공동총파업과 시위가 벌어졌다. 노동자들이 긴축정책에 대해 반대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고 있는데, 그 부분은 한국에서도 곧 중요한 과제로 대두될 가능성 높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쌍용차문제 현대차 문제가 대선 이후에도 투쟁이 계속 될 가능성이 있다. 쌍용차 문제는 새누리당이 국정조사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번 본회의에서 실시 되지 않을 거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그런 점을 본다면 앞으로 진보 정치세력이 해야 할 일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Q. 대선이 끝나고, 앞으로 본인의 활동 계획은 어떻게 되나?

이제까지 해왔던 걸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하다. 예를 들면 지금 고공농성중인 노동자 분들이, 하루 빨리 지상으로 내려오셔서 같이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날이 오게 하려면 나같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전에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이 있었는데,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반대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런 게 내가 하는 많은 일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Q. 차기 정부에 바라고 싶은 점이 있나?

누가 되더라도 첫 번째로는 쌍용차 문제 해결, 두 번째로는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해야 한다. 쌍용차 문제 해결을 더 먼저 말씀드린 건, 지난 주말 쌍용차 집회에서 김진숙씨가 그런 이야기를 하셨다. ‘모두가 일자리를 늘리겠다고 하는데, 왜 해고자 복직은 안시키는거냐? 일자리 타령하면서 정작 일자리 뺏긴 사람들에게 일자리 돌려주는 일은 왜 안 하느냐’라고. 정말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해군기지 건설 백지화도 당연히 필요한 일이겠고…

20대 입장에서 생각을 해본다면, 양질의 일자리문제, 등록금 문제를 말만 하지 말고 실천해줬으면 좋겠다. 모두가 반값 등록금을 이야기하는데 얘기만 하지 말고 실천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물론 정치인 집단들이 말 바꾸는 걸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에 정책을 강제하는 건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