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일본배우가 사과를 했단다. 소위 혐한류 발언으로 세간의 지탄을 받고, 급기야는 소속사에서까지 퇴사해야 했던 배우, 다카오카 소스케 이야기다. 그는 개인의 트위터에 “후지 TV에는 여러모로 신세를 지고 있지만 보지 않게 된다. 종종 한국방송국인가 싶을 때도 있다. 일본인은 일본 전통 프로그램을 보고 싶다. 한국 관련 방송이 나오면 TV를 꺼버린다.”라는 글을 남겼고, 그 글은 국내 언론에 ‘혐한류 발언’으로 보도되었다. 언론들은 바빴다. ‘그의 아내가 유명 여배우이다, 다카오카 소스케의 발언 때문에 아내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등의 신변잡기식 기사부터, 말이 나온 김에 수년 전의 ‘혐한류 만화’까지 거슬러 올라가 혐한류의 역사를 되짚는 기사도 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볼 일이 있다. 수많은 보도를 통해 자연스레 접하게 되는 ‘혐한류’라는 용어부터다. 혐한류라는 용어는 지난 2005년, 동명의 만화가 일본에서 출간된 이후 고유명사화되어 사용되고 있다. 물론 그 만화는 안중근이 테러리스트라는 주장부터 한국은 강간 공화국이라는 주장까지, 한국을 혐오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제목이 의도했듯, 명실공히 ‘혐한류’라 할만하다. 그러나 다카오카 소스케의 발언은 혐한류라 이름 붙일 수 있는가. 그의 발언은 ‘반한류’, 또는 ‘극한류’에 가까울지언정 혐한류로 해석하기는 무리가 있다. 글자 하나 차이지만 ‘반’과 ‘혐’의 차이는 매우 크다. ‘반미’를 주장하는 사람은 있어도 ‘혐미’를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반’이 견해의 차이, 즉 ‘다름’에 초점을 맞춘 글자라면, ‘혐’은 ‘무조건 싫다’라는 ‘틀림’에 초점을 맞춘 단어다. 때문에 최근 다카오카 소스케의 발언을 놓고 혐한류라 칭하는 언론의 보도는, 오히려 ‘혐일본’적 보도라 할 수 있다. 지난 2006년,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를 주장하는 영화인 단체의 성명서 일부를 보자.

“미국은 ‘한류’라는 자랑스러운 이름으로, 영화를 앞세워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의 문화산업을 무너뜨리려 한다. 바로 이것이 그토록 집요하게 미국이 한국의 스크린쿼터에 매달리는 이유다. 결국 한국영화가 쇠락의 길로 접어들지 않는 한 미국의 압력과 횡포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다카오카 소스케의 발언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만약 다카오카 소스케의 발언을 놓고 혐한류라 규정한다면,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를 외치는 위 발언은 혐미류인가.

이처럼 언론은 혐한류의 생산에 큰 역할을 한다. 위에서 보듯 말장난을 통해 한류에 대해 나쁘게 평가하는 것을 모두 ‘악’으로 매도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혐한류(반한류)를 생산해내기도 한다. 흔히 볼 수 있는 ‘한류 유럽 정복, 대만 침략’ 등의 기사 제목이 그 예다. 이는 우리 스스로가 한류를 ‘문화 침략’으로 보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 스스로가 할리우드 영화, 미국 드라마의 유행을 놓고, 문화제국주의를 들먹거리며 비판한 경험이 있으면서 우리나라 스스로 한류를 ‘정복, 침략’ 등의 단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반발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문화를 수출하는 ‘판매자’가 스스로 ‘정복자’임을 강조하는 꼴이니 반발이 없을래야 없을 수 있겠는가.

혐한류에 대한 대응으로 혐일류가 만들어졌다. 이것은 옳은가.

특히 일본 대중문화 전면개방 이후에도, ‘왜색 논란’, ‘국내 정서 논란’ 등으로 한국 지상파에서 일본 드라마나 노래는 볼 수 없다. 반면 한국의 k-pop이나 드라마는 NHK와 같은 일본 지상파 방송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 침략적인 한류 보도는 한류(韓流)를 한류(寒流)로 만들 뿐이다.

또한 혐한류를 비판하는 우리조차도 ‘혐’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축구선수 기성용은 지난 1월 일본과의 한일전에서 골을 넣은 후 원숭이 세레모니를 선보였다. 신중치 못하다는 비판과 함께 통쾌했다는 칭찬도 동시에 일었다. 그 뿐인가. Made in china를 보면 질겁부터 하는 습관은 여전하고, ‘짱깨, 짱골라’ 등의 용어는 일상화되어있다. 일본에서의 혐한류가 -특히 최근의- 한류 ‘상품’에 치중되는 경향이 강하다면, 우리의 ‘혐중류’는 문화 전반에 대한 증오에 가깝다. 그래서 더 나쁘다. 정녕 혐한류를 개탄하고 이를 비판하고 싶다면 우리 안에 뿌리박힌 ‘혐일, 혐중류’ 먼저 없애야 할 것이다.

혐한류를 비판하기 앞서 우리부터 돌아봐야 한다.

한류는 실체다. 정도와 효과에 있어 이견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차츰 우리의 컨텐츠가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정(正)이 있으면 반(反)이 있는 법이다. 모두가 한류에 동의할 수는 없고, 반발의 목소리가 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한류가 거세질수록 반한류도 거세질 것이다. 이에 현명히 대처해야 한다. 단순한 ‘한류 반대’ 조차도, ‘혐한류’로 몰아 비판하는 것은 어리석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반한류를 비판하기 이전에 우리 안에 뿌리박힌 반중, 반일 정서부터 몰아내야 한다. 한 마디로, 열린 마음으로 한류를 바라보는 여유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최근 일본에서 ‘반한류 집회’가 열렸다고 한다. 한류스타 카라는 이에 대해 “백이면 백, 모두 다 같은 생각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혐한류를 비판하기 바쁜 우리 모두가 한번쯤 생각해 볼 말이다.